[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9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9
본디 입이 짧은 건지 제 앞이라 입맛이 없는 건지, 가람은 연신 밥을 깨작였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이미 식사가 끝난 후에 억지로 자리를 버티는 이처럼 둔한 젓가락질에 은찬은 설핏,
“입맛이 없어요?”
묻는다.
“왜요.”
가람은 대차게 대꾸했다. 여즉 밥알이 성한 그녀의 밥그릇을 힐끔 쳐다보다,
“왜 이렇게 안 먹어요.”
하고 말했다. 깨작이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자니 든든히 배를 채우는 제가 무안해질 정도였다.
“알 바 아니잖아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가람은 밥그릇에 화풀이하듯 젓가락으로 괜히 밥풀들을 휘휘 젓는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메뉴가 문제였던 건지, 아니면 사람 바글바글한 학식이 못마땅했던 건지 이마 위 잔금들이 역력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학교 밖으로 나가 번듯한 식당에서 밥을 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밥 먹을 시간을 내어준 것도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인데 대정문 밖까지 나가달라는 수고를 부탁할 순 없었던 은찬은 그대로 학생식당에 안착했다.
학식의 메뉴래봤자 <그날의 메뉴>라는 이름을 단 경양식,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가 번갈아 나오는 한식, 한약내가 옅게 나는 갈색 소스로 잔뜩 버무려놓은 탓에 바삭한 맛이라고는 눈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돈까스가 들어간 양식, 영양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MSG에 길들여진 이들이 찾는 라면 따위가 전부였으므로 주문하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능숙하게 자판기에 돈을 넣고 은찬은 가람을 향해 “뭐 먹을래요?”하고 물었었다. 그 말에는 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도 제가 사겠습니다, 라는 속내가 역력했으나, 가람은 “흥”하는 콧방귀 한 번으로 응수한 채 제 지폐를 자판기에 쑤셔 넣었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때에, 두 사람은 한껏 거드름피워가며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했으나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머뭇거림으로 입술만을 달싹거리던 그가 가람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에 음식이 나와버려 은찬은 가람의 이름을 뱉기 대신 밥을 씹어야만 했다.
가람의 기색을 살피며 은찬은 밥을 꽤 더디게 먹었다. 평소 10분 안팎으로 끝나던 그의 식사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30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가람은 이미 젓가락도 놓아둔 채로 팔짱을 끼고 제 앞에 앉은 속 편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에 찔리는 몸이 따가웠지만, 은찬은 꿋꿋하게 밥그릇 벽에 붙은 밥 한 톨까지 수저로 긁어 제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 사내의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을 때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 타지 않은 식판을 개수대에 쏟아내는 그녀의 뒤를 같이 가자를 말을 덧붙이며 은찬이 빠르게 쫓고 있었다. 가람의 시선이 흘끗, 뒤쫓던 그의 뺨 위를 지나갔던 듯도 하다.
체육관 앞까지 다다라서도 그녀의 뒤를 잇는 발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덧붙여,
“이제 연습하러 가요? 가서 구경해도 돼요? 금요일인데 쉬지도 않아요?”
끊임없이 잇대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짜증이 밀려왔다.
“아, 진짜 짜증 나.”
앞서가던 몸이 휙 돌아선다. 살벌한 눈길로 찌르듯 매섭게 눈초리를 세우고 그를 향해 톡 쏘아붙인다.
“밥 다 먹었으니까 이제 꺼져요.”
“싫다면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의 그가 말을 되받아쳤다. 가람의 얼굴에 당혹감이 설핏 너울치기도 했는데, 당황치 않은 그녀는 곧 잠잠히 얼굴을 가라앉히며 애써 침착함을 가장해 보였다.
“밥 먹으면 꺼지기로 했잖아요.”
목소리만큼은 난처함이 지워지지 않아 미묘히 떨리는 듯도 했다. 그에 따라 긴장감으로 그녀의 목줄기가 팽팽해지며, 마른 침을 삼키느라 움직이는 목울대 탓으로 쇄골이 얄팍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였다.
“나는 그런 약속한 적 없어요.”
은찬은 시치미를 뗀다. 사실이긴 했다, 밥 먹는 거 봐서 꺼지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첫째로 기준이 모호했고, 둘째로 약속하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덧붙여 어렵게 잡은 기회이니만큼 억지로라도 친근감을 만드는 게 은찬의 주된 목적이었다. 뻔뻔한 얼굴로 저를 태평스레 바라보는 사내를 보며 가람은 앞뒤가 다른 남자라며 속으로 혀를 차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그가 탐탁지 않았던 가람은 신경질을 부렸는데, 은찬은
“댁한테 관심을 가져야 해서요.”
똑 부러지게 말했다. 목소리는 나긋했고, 적당한 저음으로 다가와 제 뺨에 착 감겨들고 있었기에 문득 가람은 제 자신이 요연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빨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바람에 안 그래도 뻘건 눈이 땡볕에 놀란 토끼가 따로 없었다.
세차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시선만을 제 얼굴에 칠하는 가람을 향해 은찬은 눈을 마주치며,
“관심 좀 가질게요. 그러니까 앞으로 시간 좀 내줄래요?”
물었고, 약간의 머뭇거리는 뜸 후에,
“헛소리.”
하고 가람이 대답했다. 눈이 하도 세차게 깜빡이고 있어 속눈썹이 속절없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었다. 눈동자를 아래로 처박은 통에 기다란 속눈썹이 밑으로 자란 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그 검은 이파리 아래 뺨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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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6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8
오히려 일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길고양이한테 적선하라고 했더니 정말로 주고 있네요?”
은찬은 말을 잊은 채 황망히 제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고 며칠 새 지켜봤다고 제 것인 양 눈에 낯익은 검은 운동화가 제일 첫 번째였고, 그 위로 시선을 쭉쭉 뻗어 올려 보이자 가람의 얼굴이 닿았다.
“네…….”
금요일 정오, 콩알만 한 새순이 돋은 나뭇가지를 때리는 햇볕이 따사로웠다. 밋밋한 연녹색 나뭇잎이 한층 싱그러워 보인다. 햇빛은 보도블럭은 물론이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 따위에도 원 없이 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눈앞이 쨍했다. 온몸이 찜통에 오른 듯 따끈따끈히 데워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문턱이 닳도록 조교실을 제 안방마냥 드나들던 건은 오늘따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선수 쳐 밥을 먹었고 귀갓길 통행버스에 몸을 실은 지 오래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로 인해 은찬은 홀로 점심을 때워야 했는데 나가서 사 먹자니 몸을 움직이기 귀찮았고, 굶자 다짐하니 급격히 허기가 몰려왔다.
금요일이니만큼 점심은 적당히 해치우고 저녁에 거하게 차려 먹자는 생각으로 대정문 앞까지 걸어가 도시락 하나 사 올라오던 길에 그는 따가운 볕을 느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모니터와 겸상할 처지였다. 그는 가까운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기로 정했다. 평소라면 털끝도 안 내비치던 고양이 한 마리가 제 발치로 다가왔기에 생선튀김 하나를 던져주던 차였고, 때마침 그녀가 나타났다.
뜻밖의 등장에 은찬이 잠시 말을 잊고 할 말을 찾아 부산스레 제 머리를 굴리던 차에 그녀가 쌀쌀맞게 말했다.
“사람 먹는 거 고양이한테 주면 죽어요.”
과장된 비약이었다.
“줘야 될 걸 줘야죠.”
내리깐 시선이 제법 싸했다. 그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길에도 고양이는 꼬리를 가지런히 바닥에 내린 채 그가 던져준 튀김의 겉을 핥고 있었다.
“그럼 고양이한테는 뭘 줘야 해요?”
은찬이 묻는다. 갑작스런 그 질문에 줄곧 고양이에게 박아대던 시선을 뽑아낸 그녀는 당황한 듯도 보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말해줘야 해요? 그 정도는 스스로 찾아봐요. 고양이 예뻐하는 건 그쪽이니까.”
샐쭉하니 말한다.
“아니면 고양이한테 물어보던가.”
덧이어 퉁명스럽게 중얼거린다. 새침한 그 얼굴을 은찬은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가람이 고개를 든 탓에 눈싸움하듯 시선이 이어졌다. 미간이 구겨진 새초롬한 그녀와 넉넉하게 뺨이 풀어져 나긋한 얼굴의 그가 볕 아래 있었다. 문득,
“그럼 가람 씨는요?”
그가 입을 열었는데 그녀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반문하듯 치켜 올라가는 눈썹과 찌푸려진 눈살을 보며,
“뭘 줘야 해요?”
하고 은찬이 다시금 말을 보충해가며 물었다. 그녀는 혀를 찼다.
“난 필요 없어요.”
맺어지는 대답에 그는,
“왜요?”
하고 천연한 얼굴로 묻는다. 그 덕에 벌어지는 잠깐의 틈.
“고양이 따위가 아니니까.”
소리를 따라 벌어지는 가람의 입술을 은찬은 두 눈을 끔뻑끔뻑하며 지켜본다. 낯부끄러울 정도로 집요히 제 얼굴을 쑤셔오는 그 시선에 아주 약간 그녀의 뺨이 연붉어졌던 듯도 했다.
“기다려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은찬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별안간 떨어진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꽤 거친 발걸음을 놀려대고 있었는데 그녀에 비해 긴 다리를 지닌 그로서는 따라잡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은 연습 안 해요?”
“……”
“안 해요? 응? 밥은 먹었어요?”
“정말 시끄럽네!”
앵무새처럼 쉼 없이 재잘거리며 제 곁을 웅웅대는 그의 목소리에 별안간 가람이 소리를 쨍! 하니 질렀다. 덕분에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이 나란히 마주 본 모양을 갖췄다. 여유로운 은찬의 면전을 향해,
“그놈의 밥!”
하고 가람이 세차게 말한다.
“먹어주면 꺼질 거예요?”
화를 내는 듯도 보였으나 당황스런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은찬은,
“역시 안 먹었구나. 같이 먹어요.”
능글맞게 웃는다. 가람은 헛웃음을 치며 그의 대답을 채근한다.
“그럼 꺼질 거냐구요.”
“글쎄요? 먹는 거 봐서?”
장난스레 농치듯 말을 건네며 베실베실 웃는 그를 보던 가람의 얼굴에 울긋불긋한 물이 들었다. 벌건 염료가 물든 듯 불긋한 얼굴로 가람은 홱 하니 고개를 달리하고 도망치듯 은찬의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디 가요.”
“밥 먹자면서요.”
가람이 은찬 들으라는 듯, 화다닥 말을 허공에 흩뿌렸다. 귓바퀴가 새빨갰다. 은찬은 실실 웃으며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팽개치듯 내던졌다.
“같이 가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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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날조 주의!
7
일주일, 목요일은 은찬이 가람을 지켜본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 날도 은찬은 가람에게 향했다. 홀로 서 있기엔 비대할 정도로 널찍한 체육관에는 언제나 가람만이 있었다. 사람 서넛은 더 들어와도 개인 공간이 차고 넘칠 것만 같은 넓대대한 매트들이 주어졌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다.
작은 가람에게 있어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체육관은 아빠 옷을 몰래 빼다 입은 초등학생의 넘치는 소매만큼이나 여백이 풍요롭게 주어져, 도리어 위압감이 느껴지곤 했다. 맞지 않는 옷을 몰래 훔쳐 입고 나가 밑단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버리는 바람에 더럽혀진 외투 자락으로 인해 꾸지람을 듣기 전 샘솟을 긴장감과도 같은 야릇한 감각이, 그 얄팍한 공간에서 시선을 던지다 보면 손바닥 안에 괴이는 땀처럼 마음에 차올랐다. 왜소한 그녀 덕에 체육관은 더욱이 넓어 보였고, 체육관이 넓어 그녀는 작다.
도시락 반찬 통에 가지런히 담긴 계란말이들처럼 매트들은 체육관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비록 계란말이와 달리 노란색이 아닌 촌스런 체육복 같은 청색이지만. 사이사이 고명처럼 빨간 도마와 평행봉 따위가 평평한 바닥에 발을 대고 있었다. 그 외의 여백들은 모두 파란 물빛이었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무게에 짓눌려 가라앉았다 솟았다 하는 그 파란 물빛은 멀리서 보면 꼭 파도가 이는 잔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가람은 오늘도 제 손끝과 발끝으로 그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삐걱대는 매트의 작은 숨소리와 함께. 조용하고 텅 빈 체육관 벽 이곳저곳에 딱따구리처럼 제 초침소리를 못 박는 시계와 함께. 고르게 숨을 내쉬고 땀을 흘리며, 엉긴 머리칼을 제 목 뒤에 문신처럼 그려 넣은 채로.
은찬은 체육관 사방에 둘려 쳐진 계단-겸 관중석을 겸비하고 있는 딱딱한 돌 위에 몸을 앉혔다. 그는 가람을 빼곡이 주시한다. 눈과 눈이 마주칠 순간을 기다리며,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묵직한 숨을 흘려보냈다. 숨소리가 제법 굵었다.
굵은 숨이 흘낏, 가람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기라도 한 모양일까. 헝클어진 앞머리를 거둬내며 가람이 붉은 제 눈동자로 은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류알같이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상기된 뺨도 붉었다. 은찬은,
“안녕? 청가람?”
시큰둥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가까워 분명 목소리가 들렸을 테고, 종전 눈을 맞췄기에 필시 제 존재를 깨달았음이 분명한데도 가람은 냉랭히 그를 무시한다.
역시 무리야. 은찬은 조용히 마음에 새김질을 했다.
그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일 리가 없었다. 제가 클론이 아닌 이상은…….
*
어린아이도 한두 번의 호통 뒤에 달디단 사탕을 입에 물려주면 웃기 마련이다. 눈물 자국 성글게 그려진 얼굴로 언제 울었다는 양 입을 벌리며 사탕을 쥐어먹지만, 은찬에겐 사탕이 없었다. 아이와 그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호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고, 차이점이 있다면 아이는 사탕을 받았지만 은찬은 적의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아무렴 빈손이 아닌 게 어딜까,
마른 한숨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적막한 공기들을 제 한숨으로 들쑤시기라도 할 요량인지 그는 끝없이 한숨을 쉬며 드륵드륵 소리 내 의자 바퀴를 끌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 지루한 정적을 깨부술 훼방꾼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한 번이면 될 판돈을 거듭해 끼얹듯 제 위로 얹혀진 교수님의 당부와 부탁에 그의 어깨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듯이 축 쳐져 버리고 말았다.
건의 말대로 이전 학부생일 때처럼 그저 청가람과 친해지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 성질에 있어서 ‘자발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덧붙여 불필요한 ‘적의’와 저를 향한 이유없는 ‘배척’이 더해졌다는 점에서 또한 지극히 그 성질이 달랐다. (결여)
차라리 클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사지가 두 개면 좋겠어. 하나는 청가람에게 보내놓고, 본체는 지금처럼 유유자적 시간이나 때우고 싶었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제게 맡겼다는 것은 모름지기 어느 정도 청가람을 눈대중 치고 있었단 뜻일테니…… 그만두고 싶다는 저의 질문에 아쉬움은 표할지언정 의문은 갖지 않으리라. 착오였다.
「못하겠어요.」
뱉지 못해 어물어물한 말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
수요일 저녁, 귀가를 서두르던 은찬을 발견한 교수는 계단 위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저를 호명하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려 마주친 계단 너머의 초로를 향해 가벼이 묵례를 건넸다.
“돌아가는 길인가?”
“네? 네……”
어색하고 난처할 때면 습관적으로 목 언저리를 긁어내리는 그였다.
“그럼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
“예?”
“저녁 약속이 있다면 아쉽지만 짧게 끝내줄 테니. 올라오게.”
“저, 그게―”
“마침 물어보고 싶은 일도 있고 말일세.”
명백한 강요였다. 권유의 탈을 뒤집어쓴 그의 목소리에 기가 눌린 은찬은 그대로 내려왔던 계단에 터덜터덜 올라섰으며, 어느샌가 또 한 번 차갑게 식어가는 차를 사이에 둔 채로 초로의 연구실에서 그와 낯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주던가?”
“예? 예, 뭐.”
“시간이 정말로 금방 흘러가 버려. 자네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과 천천히 지나가는 일 중 무엇이 더 마음에 드나?”
그는 이렇듯 종종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은찬을 향해 건네곤 하였는데 5년이란 시간 동안 종강총회 때면 그를 불러다 시낭독-물론 시는 초로의 교수가 직접 지정해준다-테이블 숲 한가운데 서서 낭송하게 한 뒤로 은찬은 그것이 단순히 노인 특유의 감수성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 전 천천히 가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서인가?”
“뭐, 나름대로요.”
“누구나 그렇지. 좋은 때는 천천히 거북이처럼 지나가길 바라고, 나쁜 순간은 재빨리 끝나가길 바라니 말이야.”
느긋한 그의 말투와 다르게 은찬은 초조히 손깍지를 끼웠다. 바싹바싹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물었다.
“그래서 저를 왜 부르셨는지……”
“사랑하는 제자를 잠깐 보려는데 그게 문제인가?”
“하하.”
“청가람은 만나봤나 싶어서 말이야. 애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지?”
“잘 알고 계시네요.”
“낯가림이 심해서 그럴 거야, 얼굴만 익히면 곧 친해질 수 있을걸세.”
아니던데요,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킨다. 위아래를 상반되게 그려놓은 그림인 양 눈썹은 난처함으로 축 쳐져 있는데 입술은 매끄럽게 올라간 표정으로 은찬이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겠네요, 하…하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내게 찾아오게.”
그 도움이라면 지금 필요하다. 아니, 애당초 그런 도움을 청할 일을 그는 제게 권유하지 않았어야 한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아래로 처박혔다.
“저는 사실……. 저한테 왜 시키셨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저보다 잘할 사람은 많을 거예요. 제가 조교라서 맡기신 거라면 그건 굉장히―”
“자네를 믿고 맡겼다 생각해주면 안 되겠나?”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곤 줄곧 테이블 아래로 처박아 두었던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은찬은 초로의 주름진 미간 사이에 제 시선을 굳건히 박아넣으며,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말했고, 그에 흔들림 없이 인자한 얼굴의 늙수그레한 노인이 대답한다.
“자네가 시간이 많아 보여 부탁한 게 아니니 안심하게.”
“왜 하필 저죠.”
“자네에게 적격이라고 생각했거든.”
“전 못하겠―”
“자네가 시간이 많아 보여 부탁한 게 아닐세. 저번에도 말했듯 주군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말을 끊는다. 가위로 실을 잘라내듯,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그의 앞니를 때리며 흘러나오던 그 소리를 자르며 노인은 웃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세월을 얼굴에 그려 넣은 노인의 눈가는 웃을 때면 쪼글쪼글해지며 보기 좋은 나이테를 그려낸다. 은찬은 그런 그의 낯을 보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손끝으로 긁어댈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함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벼랑 끝으로 핏덩이를 내치는 사자와도 같은 추진력이었던 건지, 교수는 갈피를 잡지 못함이 역력한 그를 가람을 향해 밀쳐내었다.
목요일 오후는 조용한 편이다. 먼저 오전에 전공수업들이 몰려있던 탓에 과실을 기웃거리는 이들 머릿수가 지극히 적었으며, 때 이른 주말을 맞이하기 위해 귀갓길을 서두르는 교수님들로 인해 연구실이 텅 비어버리기에 은찬 역시 미리부터 휴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노크 소리만 아니었더라도.
평상보다 여유로웠다. 기척이 3시부터 뚝 끊겼기에 은찬은 거진 오후 시간은 홀로 유유자적 신선놀음하듯 보냈다. 시곗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기 무섭게 퇴근준비까지 말끔하게 해 놓은 상태로 그는 웹사이트만을 들락거리던 차였다.
“들어오세요.”
분명 소리는 있었는데 들어오는 기척이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들어오세요’라고 문을 향해 말하고, 방문객을 확인하기 위해 책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본다. 문 손잡이가 부드럽게 출렁이며 쇳소리를 들려주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딱딱한 구두 소리가 들렸을 때 은찬의 몸이 의자에 데인 양 화다닥 떨어져 나왔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자네.”
“아, 안녕하세요.”
들어오는 이를 향해 은찬은 허리 굽혀 인사를 건네었다. 기동을 멈춘 로봇처럼 멍하니 서 있던 은찬은 황급히 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냉장고를 열어 황급히 그의 앞에 음료수를 건네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골라잡았기에 은찬과 그의 음료수병 색이 달랐다.
“지나가던 길에 들렸네. 자네도 곧 퇴근이던가?”
“네. 요즘은 한가해서 정시에 돌아가요.”
“그래. 저녁엔 주로 뭘 하지? 연습을 하나? 연애를 하나?”
“하하, 연애도 사람이 있어야 하죠.”
“대답을 넘긴 걸 보니 연습도 당연히 안하고 있을 테고.”
넘겨짚듯 건넨 그 말은 실상 정답이었다. 은찬은 연습 따위는 취급하고 있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개인훈련을 받았던지도 까마득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그의 사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임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들먹이듯 연습이란 단어를 꺼내는 그가 은찬은 난처하기만 했다. 은찬은 민망함과 닳고 닳아 고루해진 짜증을 누르며 뒷목을 긁었다.
“가서 밥이라도 한 끼 먹지.”
“교수님이랑요……?”
갑작스런 청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저를 바라보는 은찬을 향해 그럴 리가 있겠냐며 그가 웃었다.
“청가람 말일세. 목요일 오후니 연습을 하고 있을 거야.”
“아, 네.”
“가서 밥이라도 청해보지 그러나.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쭈글쭈글한 주름이 곳곳에 차 있는 그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했기에 은찬은 제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뱉어내지 못했다.
……이미 여러 번 까였는데요.
속으로만 대차고 강하게 질러볼 뿐이었다. 속으로 삭인 중얼거림이었기에 그에게 들릴 턱은 없었다.
*
역시나 뻔했다. 뻔한 일을 뭣 하러 이리도 순순히 자행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둘러대면 될 일이었는데…… 그냥 갈까 머뭇거리며 놀리던 발은 체육관 앞에 당도한 후였기에 그는 생각을 접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등 떠밀려 도착하기는 했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자의로 행했으니 시도라고 해볼 요량으로 그녀를 지켜봤다.
백건의 말대로 정말로 치근덕거리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괜히 엉킨 실타래를 더 꼬듯이 애먼 머리를 빙빙 돌릴 필요도 없을 테고. 곰곰이 생각하는 새 은찬의 눈길이 닿던 곳에 가람이 멈췄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안녕? 청가람?”
은찬은 인사도 건네보았다.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아예 등을 돌린 채 제 동냥질에 응해주지도 않았다. 초침만이 똑딱 소리를 내어가며 은찬에게 시선을 구하고 있었다. 굴러가는 시간을 보다가 그는,
절대로 안 돼, 무리야. 생각한다. 친구가 되어주라니……. 친구는 되잖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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