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3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13
*
관심을 끊자고 생각했더니 기존의 평화로운 생활이 순탄히 돌아왔다. 교수님의 뒷말이야 뭐, 나중에 가서 그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애당초 그 스스로 좋아 시작한 일이 아닌 만큼 적재적소를 배제하고 저에게 떠맡긴 교수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잠깐의 잔소리가 두려워 질질 끌려다니기에는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누리는 장점이 턱없이 많아, 저울질할 필요도 없이 가냘픈 양심의 눈대중만으로도 은찬은 가람을 방치하는 일이 손쉬워졌다.
우선, 한가롭다. 여유롭다. 제가 그토록 바라던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통통배 같은 생활을 유유자적 이어나갈 수 있었다. 둘째로, 자유로웠고, 셋째로도 자유로웠고, 넷째로도 자유로웠다.
정말로 몹시나 자유로웠다. 그래서 지루해질 만큼. 뜨문뜨문 함박눈 내리는 정경을 하릴없이 지켜보는 들짐승처럼,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백설만이 몸에 닿는 동굴 속 뱀처럼. 고루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무료함에 등 떠밀려 창밖을 내다보다 언뜻언뜻 시야 끝에 걸린 체육관 지붕을 보다가, 가람을 떠올리기도 할 정도로.
왜 갑작스레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제 의중을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주변을 감싼 모든 공기들이 고요했고, 나지막이 발등에 내려앉는 숨소리 적나라히 귀에 들릴 정도로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루함에 도태되어버린 그는 맹인들이 풍경을 잃는 대신 다른 감각들에 집중하게 되듯이, 은찬은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오늘과 같은 청각. 복도를 왕왕 울려대는 저 야단법석들을 그는 흥미로워한다.
허공을 찌르는 날카로운 새된 소리를 보아하니, 여자아이들이 분명하다. 성질은 웃음소리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사포와 같이 꺼끌꺼끌한 뒷맛이 남는 웅성거림이었다.
호기에 끌려 그는 문을 열어젖힌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어두운 낭하에 집중했다. 군데군데 전등이 나간 복도는 간간히 빛이 일렁이는 어두운 동굴을 떠올리게 하였는데, 그로 인해 상당수의 얼굴이 번져버린 수채화처럼 윤곽이 희미해 알아보기가 어려운 게 실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게 불만이면 니들이 잘하던가, 상을 타던가.”
빨간 눈동자는, 홀로 색이 두텁게 발려 딱딱하게 굳어버린 유화 덩어리 같았다. 청가람이었다.
“그럼 너 혼자서 그 넓은 곳을 차지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그럼 빨리 와서 차지하던가. 누가 쓰지 말래? 써. 니들 맘대로.”
“야, 청가람. 니가 걸핏하면 배 째라하고 전세 놓고 쓰는데 우리가 거기 가서 연습하니?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럼 뭐가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체육관 넓잖아. 와서 써.”
“진짜 재수 없어. 니가 알아서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기계체조 다 죽어서 너밖에 없잖아.”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가 있다. 쓰레기통 뚜껑 위 어쭙잖은 구더기를 쳐다보듯 모난 눈초리로 다수의 여학생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긴 머리칼을 한데 모아 구슬처럼 머리 뒤에 얹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체교과 학생이 역력히 표출되고 있었다. 또한, 조교실 앞에서 싸울 정도라면…… 누구든 남의 과 복도에서 싸우진 않겠지 그는 노곤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 죽어서 나밖에 없든 말든 상만 타오면 됐지, 니들이 뭔 상관이야. 머리 많은 게 대수야? 뭐 제대로 하는 게 있어? 상 한번 못 타는 니들보단 낫거든?”
쪽수에 밀리지도 않고 기세등등하게 맞받아치고 있다. 미운 소리만 골라 하는 법, 상대방을 배알꼴리게 만들자! 특별편, 이런 강좌라도 어디선가 듣고 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침하게 대꾸해가고 있어, 분위기가 험악하다.
체교과의 특징이라면 우선, 몸을 사리지 않아 아낌없이 베푼다는 점에 있는데 그건 다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뼈대가 가냘픈 계집 몇몇이서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기 무섭게 은찬은 저도 모르게 총알처럼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아, 자, 잠깐, 잠깐만! 잠깐! 애들아!”
어깨 밑을 웃도는 체구들이 대다수인 여학생들이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필시 은찬의 머리털도 몇 움큼 빠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문신마냥 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운동하는 아이들만큼 싸움에도 승부욕이 넘치는 바람에 오기로 서로의 머리채를 쥔 주먹을 끝까지 펴내지 않아 풀어내기까지 애를 먹어야만 했다. 뭉쳐진 한 명을 떼어내면 다른 한 명이 달려들고, 서로가 아군인지 적군이지 분간도 안하고 잡아당기고 있어 은찬은 일단 가람의 팔을 잡아당겼다. 등 뒤로는 가람이, 앞으론 두어 명의 여자애가 묵직하게 부딪쳐와 은찬은 얕게 휘청거렸다. 한 덩이가 두 덩이로 갈라지자 멈칫거리는 틈이 생겼기에 은찬은,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짐짓 단호하고 엄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주도권을 뺏기면 안 되었기에 그는 뒤이어 황급히,
“어린애도 아니고 싸우면 어떡해. 말로 해결해야지.”
덧붙였다. 모난 말대꾸가 돌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한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히 제 설교를 듣고 있다. 등 뒤에 가려진 가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기서 듣어보니 연습실 문제인 거 같던데, 맞니? 연습실 문제라면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조교실에 찾아와서 말은 해볼 수 있는 거 아니니?”
언제부터 제가 그런 예의 바른 인간이었다고 이런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실상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제 입에선 입바른 말들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과실 복도 앞에서 싸우면 어떡해. 지나가다 교수님이 보시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너희 전부 다 이번 대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야?”
“아니요……”
선두가 되어 머리채를 잡던 이의 입에서 외로 얌전히 대답이 뱉어져 나왔다. 은찬은 그에 나름 흡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래.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연습실 문제는 교수님께 말씀드려보도록 할게. 그러니까 너희가……”
“리듬체조부요.”
“그래, 리듬체조.”
선두가 되어 머리채를 잡던 이의 입에서 외로 얌전히 대답이 뱉어져 나왔다. 은찬은 대답에 나름 개운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몇몇 아이들이 제 등 뒤를 향해 눈을 흘기고 지나가곤 했지만, 거친 몸짓은 없었다. 복도에 한차례 성급한 발소리들이 웅성거리더니 뒤이어 썰물 지듯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평화가 찾아온 조용한 통로에서 은찬에게 남은 문제라곤 제 뒤에 서 있는 청가람,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는 소심스럽게 제 몸을 돌려 등 뒤의 가람을 쳐다보았는데, 날이 선 눈동자가 사나운 부리로 저를 쪼듯 쳐다보고 있었다.
“싸우면 어떡해요.”
다소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는데,
“무슨 상관…… 왜 멋대로 끼어들어서―”
그녀는 눈동자만큼이나 날이 시퍼렇게 선 차가운 말투로 퉁명스레 받아쳤고, 은찬 역시 지지 않고,
“다쳐봐야 정신 차릴래요?”
그의 똑부러지는 목소리를 그녀는 듣는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다듬어졌던 그녀의 말을 부러트린다. 가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썹을 찌푸리고, 미간 사이에 촘촘히 주름을 수놓으며 그를 째려보았다.
“다치면 그쪽이 손해죠. 저쪽은 다치나 안 다치나 상을 못 탄다면.”
일목요연한 말들이었다. 가람은 미간을 쪼글쪼글해진 미간으로 뺨을 작게 씰룩이다가,
“흥. 남 이사.”
하고 뱉는데 묘하게 삐친 아이처럼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고맙다곤 말 안 해줘요? 그래도 나름 구해줬는데.”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빈말이라도 들어볼까 싶어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다 발라버릴 수 있거든.”
얄밉게 대답을 맞받아치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자 약 올리고 싶어지는 마음에,
“아, 그래요? 내가 보기엔 밀리는 거 같던데. 머리 잡혀서.”
“……”
제법 짓궂게 말했더니 빈정상한 모양인지 입술만 샐쭉하게 내민 채로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지 않아 정수리 왼 부분이 뿔이 솟아난 듯 보인다. 갈색 뿔. 앞머리는 죄다 오른쪽으로 치우쳐있고, 찰랑거리던 생머리는 마치 엉망진창으로 롤을 감아 풀었던 양 보이기도 하다. 손주먹에 눌렸던 건지 턱 주변이 온통 새빨갛게 부어있었는데,
“입술.”
오른쪽 입가에 거스러미가 앉은 듯 새빨갛게 핏기가 어려있었다. 얇은 실이 수놓은 입가를 보며 은찬은 다시 한 번, “입술.” 하고 “터졌어요.” 말했다. 가람은 영문모를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더듬더듬 제 입가를 매만졌는데, 자꾸만 반대편을 만지는 통에 답답한 나머지 은찬은 손을 뻗었고,
“아―”
“여기.”
가람의 입술을 매만졌다. 퍼석하게 메마른 탓에 껍질이 올라 있어 꺼슬꺼슬하리라 상상했는데 부드러운 감촉만이 손끝에 옮겨붙고 있었다. 손톱 끝에 얼핏 선 붉은 살점이 걸린 듯도 해 그가 망설이는 사이로 그녀가,
“어, 어딜 만져!”
하고 화를 내었다. 입가에 걸쳐있던 빨간 실금들이 어느새 얼굴 전면에 수를 놓은 양 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런 그녀와 달리 그는 단조롭게
“약이라도 발라야겠어요.”
말하고,
“이딴 건 침 바르면 나아.”
그녀가 대꾸해, 그는 잠시 고민하듯 낮게 음― 소리를 내뱉다,
“연고라도 줄 테니까 바를래요?”
그녀를 자연스럽게 조교실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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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2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12
정문을 빠져나와서도 한차례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디 가요.”
자꾸만 애먼 방향으로 몸을 틀어버리는 가람의 손을 은찬은 붙든다.
“이거, 놔요!”
힘을 주어 있는 힘껏 저를 내팽개치려는 그녀를 향해,
“그러다 또 넘어져요.”
얄밉게 한마디 던진다. 가람은 눈썹을 씰룩이고 입술을 지그시 눌러 깨물며 그를 노려본다.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까 좀 내버려두고 가라구요!”
“가다가 쓰러지면 어떡해요. 아픈 사람 길바닥에 두고 가는 매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거든요.”
웃는 얼굴로 잘도 얄미운 말을 뱉는다. 그는 콧등을 작게 찡그리며 웃고, 이어진 손을 힘주어 붙든다.
“아니면 업어줄까요? 그럼 좀 조용해지려나.”
“그럼 죽여버릴 거예요.”
“네. 사실 저도 업고 싶지는 않아요.”
얄미운 말이 도통 가라앉지 않는다. 가람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과 난처함, 짜증이 역력했다. 짜증으로 찌푸려진 미간과 달리 허물어진 뺨에 새겨진 구덩이는 난처함이었다, 난처한 그 뺨엔 보조개가 엷게 패여 있었다.
둘은 나란히 교정을 걸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이은 상태로. 누군가가 보았다면 갓 마음을 동여맨 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미간을 팬 그녀가 엉거주춤하게 걸음을 옮겨낼 뿐이었다. 앞서가는 강직한 등의 그를 따라서.
의무실에 도착한 가람의 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게 다물려 있다. 입술을 꽉 깨물어 움츠린 채로 은찬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픈 거 같은데……”
은찬은 난감한 듯 뒷목을 긁으며 진료의자에 앉아있는 가람을 내려다보며 대변인을 자처했다.
“아파요? 어디가?”
흰 가운을 곱게 차려입은 그는 무릎을 굽혀 가람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어본다. 얼굴과 얼굴이 거리가 가까워 가람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들고 있었는데 덩달아 은찬의 미간도 묘하게 주름졌던 듯도 하다.
“배요.”
질문은 가람이 받았는데 대답은 은찬이 대신한다.
“맞죠?”
은찬은 그때 가람의 오른편에 서 있었는데, 제가 대답을 대신하며 가람의 어깨를 슬쩍 짚었던 듯도 했다. 가람은 눈을 깜빡이다,
“네.”
하고 대답했다.
“더부룩하거나 체한 거 같기는 않고요? 콕콕 쑤시는 기분이에요? 음― 화장실에 가고 싶지는 않나요?”
머뭇머뭇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는 그처럼 가람의 입술이 작게 오므려 들었다가 아주 자그마한 새 울음소리처럼,
“―이요.”
말했다. 아주 가까이 서 있던 은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마주 본 채로 입술을 들여다보던 그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였기에,
“네?”
그가 묻는다.
“―이요.”
“죄송해요, 잘 못 들어서.”
가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달싹거리다 다시 뱉었지만 알아듣지 못한 그의 얼굴엔 곤란함이 가득했다. 결국, 가람은 눈을 감고 제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꽉 움켜쥐고선 다부진 목소리로,
“새― 생리통이라구요!”
비명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아……”
은찬은 탄성 비슷한 깨달음을 소리 내 밭고, 가람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해 가을날 추풍 아래 잘 익은 땡감이 따로 없다. 온통 새빨갛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보송한 귓바퀴도 새빨갛다.
가로수처럼 미동 없이 가람의 옆에 서 있는 은찬과 달리 흰 가운의 그는 엷은 미소를 입술에 띄우곤 가람의 손바닥 안으로 푸른 알약 두 개를 쥐어주었다. 둘 사이에 자그마한 속삭임처럼 대화가 오갔지만, 은찬은 크게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가람이 알약을 입에 털어 넣을 때, 이어서 흰 가운의 그와 그녀 두 명의 입술이 벌려지며 대화를 나눌 때, 그래서 고요한 공기에 작디작은 소곤거림이 작은 땀으로 박음질 되고 있을 때, 막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던 듯도 하다.
“많이 아프면 여기서 조금 누워있다가 가도 돼요.”
상냥한 목소리로 쉬고 가길 저하는 그의 청에 가람은 고개를 저었는데,
“쉬고 가요. 많이 아파 보이던데.”
은찬이 말했다. 가람은 엉거주춤허니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지도 못한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눈이 깜빡, 깜빡거렸다. 훤한 백열전구 아래서 다홍빛 눈동자가 빛을 머금은 탓에 초롱초롱하다.
얕게 물기가 어린 두 눈이 깜박거렸다. 동그란 홍옥이 반짝이다가 눈꺼풀에 먹혀 반이 되고, 사라졌다가도 다시금 동그랗게 농익어간다. 사과를 먹어치우는 눈꺼풀, 그리고 엉겨 붙었다 떨어지는 속눈썹을 눈에 담는데 그 중 한 가닥이 떨어져 뺨 위에 앉아,
“속눈썹이 붙어서.”
가람의 얼굴 위로 은찬의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숙인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더듬는다. 긁는다. 가늘고 여린 속눈썹을 떨궈낸다. 달콤한 과일 향과 한데 뒤엉킨 습한 땀내가 그의 안으로 훅하고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 단내에 섬찟 놀라며 은찬은 황급히 몸을 떼어내었고 가람은 물끄러미 그를 눈에 담고 있었다. 안갯속을 헤치기 위해 눈꺼풀을 찌푸리는 이처럼, 눈동자를 작게 만들며.
초대받지 못한 어색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들고 있었다. 흰 가운의 그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뒤적이며 종이 팔락이는 소리만을 들려주고 있었기에 침묵은 줄곧 이어졌다. 말라가는 유화처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미동 없이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이대로 있기도 뭣해 은찬은,
“그럼 잘 쉬다 가요.”
엄지와 검지를 맞비벼 미련 없이 속눈썹 가닥을 털어낸 그는 솜털만치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향해 샐쭉, 한번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녀는 대답이 없다. 흰 가운을 입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까지 마친 그가 문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도 가람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두꺼운 쇠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 치듯 조용한 복도에 쿵 하고 울릴 때,
“같이 있어 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그 옆을 지킬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 정도로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던 낯빛을 떠올리며 뭐 상관없지 않나,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제가 곁에 있어 줄 이유도, 그렇다고 딱히 그대로 가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제가 있는다고 고통이 덜어질 리도 없고 약을 먹은 그녀는 이제 아프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딱 이 정도면 적절했다. 적당한 온도의 배려와 베풂. 그런 사이였다. 청가람과 주은찬은.
*
그렇지만 이튿날 괜스레 그녀가 걱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르면 몰랐지, 여동생을 곁에서 지켜본 은찬에게 있어서 ‘생리통’의 고통이 사람에게 얼마나 패악을 부리는 못된 성질을 지닌 요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못해 변기와 수없이 입 맞추듯 웩웩거리던 여동생의 그날을 떠올리자 못내 우려가 생기는 게 의아한 기우는 아니었다.
역시 의무실에 두고 오는 것보다야 집에 데려다주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은찬은 머리를 긁적이다 점심나절에 체육관으로 향했다. 설마 혹시나 거기에 있을까 싶었기에. 텅 빈 매트를 기대하며 문을 열었는데 그녀가 있었다. 역시나.
“이제 안 아파요?”
그녀는,
매트 위에 다리를 쫙 벌려 일자로 만든 채로 상체를 바닥에 붙여 몸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 휘어진 등줄기를 바라보던 그의 미간에 힘줄이 솟아오른다.
공강인 화요일이었기에 연습이 아니라면 학교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연습 하루 거른다고 몸에 가시가 돋나, 좀 봐가며 쉬어도 괜찮지 않나, 하는 불만이 그의 맘 한쪽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올라 은찬은 다소 날이 선 어투로,
“배 안 아프냐구요.”
하고 물었는데 가람은 전날처럼 눈만 깜빡여댄다. 대답할 기운이 없는 건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인지 그가 다가와도 이전처럼 진절머리 치지도 않은 채로 바라보고만 있다.
“밥은 먹었어요?”
그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벌려두었던 다리 한쪽을 접어 발등을 감싸 쥐기만 한다. 묵언 수행하는 절간 스님처럼 다문 입은 대답이 없었다.
“밥은 먹었냐구요.”
닦달하듯 되묻자,
“먹든 말든.”
매트 위에 상체를 숙이는 그녀의 퉁명스런 중얼거림이 은찬의 귓속으로 사르르 스며들어왔다. 가시돋힌 음성이 나부끼며 톡, 톡, 그의 미간을 찔러대어 보기 싫게 상처가 난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고, 엎드려있는 그녀의 등줄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리어 체육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기 전 내쉬던 짙은 한숨은 불쾌감이 역력해 가람의 목덜미를 간질이기에 충분한 농도였다. 진한 한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얼핏, 눈초리 끝에 걸린 빨간 홍채 안으로 닫혀가는 체육관 문이 어른어른 스미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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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날조 주의!
11
가람이 몸을 담고 있는 중앙체육관에 대해 이제 와 설명을 해보자면, 지하로 1층, 지상으로 2층밖에 되지 않는 건물로 층수만 따져보면 교내에 있는 그 어느 건물보다도 적은 층을 가졌지만 한 층의 높이가 보통 건물들과 달리 평균적으로 2배에 달하는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층에 비례하는 면적만 따져본다면 교내에서 1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널찍하고, 높았다.
가람은 보통 지상 2층에 있는 소체육관에서 연습을 하는데, 한 층이 통으로 연결된 구조인 1층 대체육관에는 사람이 언제나 바글바글 넘실거렸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소체육관은 365일 바닥에 매트가 깔린 탓에 언제부턴가 체조부 전용 연습실이 되었던 사유도 한몫했다.
은찬은 평소처럼 2층에 위치한 소체육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작 한층 밖에 되지 않는데 엘리베이터는 타는 일도 무색해 계단을 오른다. 높이가 높이니만큼 계단을 다 오를 즘에는 턱까지 숨이 차오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배가 크게 부풀었다가 줄어든다. 목울대 역시 숨을 꿀꺽이는 탓에 거침없이 오르내렸다.
숨 고름 후에 가슴의 출렁임이 잠잠히 가라앉았을 때 그는 문을 열어젖혔다. 운동을 방해해버린 건 아닐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방해하는 건 연습이 아니라 그녀의 휴식인 듯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연습 때면 질끈 동여매던 머리칼을 풀어헤치곤 매트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토끼같이 동그랗게 모은 몸을 옆으로 두어 웅크린 그녀는 배를 감싸 쥐고 있어 제 온몸을 제 팔로 안아주려는 듯 보인다. 작은 등줄기가 고운 능선으로 휘어져 있었다. 은찬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잠을 자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인지, 그가 충분히 그녀에게 시선을 던져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줄어들었을 때,
“뭐예요.”
그녀가 감았던 두 눈을 펼쳐 보이며 쌀쌀맞게 말했다. 땀에 젖은 목줄기를 따라 넝쿨처럼 휘어진 머리칼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뺨 위에도 갈빛 얼룩처럼 들러붙어 있다.
“연습 많이 했어요?”
은찬은 묻는다. 그녀는 여즉 몸을 웅크린 채로 또 날이 선 시선을 죽이지 않고,
“알 바 아니니까 꺼져요. 안 그래도 짜증 나니까.”
하고 말한다. 작고 더 작게 하나의 원이 되려는 걸까, 제 몸을 데구루루 더 말아 보인다. 쪼그라드는 그 몸을 보며 은찬은,
“이제 연습 끝난 거예요? 더 안 해요?”
“……”
“밥은 먹었어요? 굶은 건 아니죠?”
대답 없는 가람을 향해 말을 붙인다. 웅크린 그녀 바로 옆에 넉살 좋게 제 몸을 앉히기도 하면서 조잘거린다. 은찬의 목소리가 가람의 귓가로 떨어져 내린다. 간질이는 듯한 음성들이 귓바퀴에 들러붙었다가 흘러내려가며 이따금 그녀 미간에 앉아 주름을, 깨물린 탓에 허옇게 일어난 핏기 가신 입술멍울로 제 자리들을 나타내곤 하였다.
“진짜 그 놈의 밥! 알아서 먹으니까 꺼져요! 쫌!”
“정말 먹었어요?”
꼬투리를 잡았다. 파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짓눌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람은 찌푸린 미간으로, 불만이 통통 튀는 목소리로, 짜증 섞인 새붉은 눈동자로,
“안 꺼지면 내가 꺼지죠.”
톡 쏘아붙이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강단졌던 말과 달리 몸은 느릿느릿하고 둔해 의도치 않게 은찬은 가람을 관찰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가느다란 몸줄기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온몸의 모든 선들이 발을 움직이는 작은 흔들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움츠러들고, 후들거리고, 출렁거렸다. 오른팔로는 배를 가리고 있었는데 힘이 단단히 들어간 그 손은 제 허리를 꽉 쥐고 있어 손등에 푸르스름한 힘줄이 내비치기도 했다. 작고 달뜬 한숨이, 잇새로 스미던 신음을 혀 밑으로 짓누르는 목소리가 가람의 입술을 타고 얄팍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목덜미에 들러붙은 머리덩굴들은 출렁이는 몸짓에도 도무지 떨어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목 뒤로부터 시작된 넝쿨은 어느샌가 앞으로 줄기를 뻗어 쇄골과 어깨까지 장악하고 있다. 갈색 앞머리 밑으로 언뜻언뜻 고운 이마가 엿보이기도 했다.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지나치게도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스산하리만큼 창백한 뺨을 보다 은찬은,
“어디 아파요?”
하고 묻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막는다. 그녀의 몸이 휘청였다. 발목이 느슨해진 탓이었다. 은찬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손바닥에 차오르는 그녀는 자그마했고, 땀으로 끈적했다.
“괜찮아요?”
“이거 놔요!”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많이 아파 보이는데.”
“필요 없어요!”
몸을 밀치는 아귀에 힘이 없었다. 그녀 깐에는 가슴팍을 세차게 밀친 거 같았는데 은찬이 휘청거리기보다는 제 몸이 힘을 잃는 바람에 매트 위로 미끄러질 뿐이었다. 은찬은 황급히 가람의 허리를 껴안아 제 품으로 당긴다.
뺨이 비벼진 가슴팍에 머리카락이 언뜻언뜻 제 넝쿨을 펼쳐낸다. 쥔 허리는 가늘었고, 덧붙여 붙잡은 손목도 제 손으로 감싸고도 손가락이 남아돌 정도로 가냘팠다. 옅은 땀 냄새가 난다. 더불어 약한 과일 향도. 샴푸 냄새일지도 모른다.
“으……”
가람은 작게 신음을 내뱉고 은찬은 한숨을 내쉰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 병원이 싫으면 의무실이라도 가요.”
“……”
“내가 데려다줄게요.”
은찬은 매트 위로 가람을 앉혔다. 설핏 가람의 입술이 열리며 소리를 내는 듯도 했으나 그는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묵묵히 그녀의 손앞에 운동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운동화 속에 넣어두었던 양말을 꺼내 신고 운동화에 발을 끼웠다. 리본 모양으로 운동화를 묶는 손가락이 제자리서 멈춘 초침처럼 자꾸만 덜덜거렸지만, 그는 나서지 않는다. 선을 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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