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3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13
*
관심을 끊자고 생각했더니 기존의 평화로운 생활이 순탄히 돌아왔다. 교수님의 뒷말이야 뭐, 나중에 가서 그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애당초 그 스스로 좋아 시작한 일이 아닌 만큼 적재적소를 배제하고 저에게 떠맡긴 교수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잠깐의 잔소리가 두려워 질질 끌려다니기에는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누리는 장점이 턱없이 많아, 저울질할 필요도 없이 가냘픈 양심의 눈대중만으로도 은찬은 가람을 방치하는 일이 손쉬워졌다.
우선, 한가롭다. 여유롭다. 제가 그토록 바라던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통통배 같은 생활을 유유자적 이어나갈 수 있었다. 둘째로, 자유로웠고, 셋째로도 자유로웠고, 넷째로도 자유로웠다.
정말로 몹시나 자유로웠다. 그래서 지루해질 만큼. 뜨문뜨문 함박눈 내리는 정경을 하릴없이 지켜보는 들짐승처럼,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백설만이 몸에 닿는 동굴 속 뱀처럼. 고루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무료함에 등 떠밀려 창밖을 내다보다 언뜻언뜻 시야 끝에 걸린 체육관 지붕을 보다가, 가람을 떠올리기도 할 정도로.
왜 갑작스레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제 의중을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주변을 감싼 모든 공기들이 고요했고, 나지막이 발등에 내려앉는 숨소리 적나라히 귀에 들릴 정도로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루함에 도태되어버린 그는 맹인들이 풍경을 잃는 대신 다른 감각들에 집중하게 되듯이, 은찬은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오늘과 같은 청각. 복도를 왕왕 울려대는 저 야단법석들을 그는 흥미로워한다.
허공을 찌르는 날카로운 새된 소리를 보아하니, 여자아이들이 분명하다. 성질은 웃음소리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사포와 같이 꺼끌꺼끌한 뒷맛이 남는 웅성거림이었다.
호기에 끌려 그는 문을 열어젖힌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어두운 낭하에 집중했다. 군데군데 전등이 나간 복도는 간간히 빛이 일렁이는 어두운 동굴을 떠올리게 하였는데, 그로 인해 상당수의 얼굴이 번져버린 수채화처럼 윤곽이 희미해 알아보기가 어려운 게 실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게 불만이면 니들이 잘하던가, 상을 타던가.”
빨간 눈동자는, 홀로 색이 두텁게 발려 딱딱하게 굳어버린 유화 덩어리 같았다. 청가람이었다.
“그럼 너 혼자서 그 넓은 곳을 차지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니?”
“그럼 빨리 와서 차지하던가. 누가 쓰지 말래? 써. 니들 맘대로.”
“야, 청가람. 니가 걸핏하면 배 째라하고 전세 놓고 쓰는데 우리가 거기 가서 연습하니?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럼 뭐가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체육관 넓잖아. 와서 써.”
“진짜 재수 없어. 니가 알아서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기계체조 다 죽어서 너밖에 없잖아.”
고개가 삐딱하게 돌아가 있다. 쓰레기통 뚜껑 위 어쭙잖은 구더기를 쳐다보듯 모난 눈초리로 다수의 여학생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긴 머리칼을 한데 모아 구슬처럼 머리 뒤에 얹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체교과 학생이 역력히 표출되고 있었다. 또한, 조교실 앞에서 싸울 정도라면…… 누구든 남의 과 복도에서 싸우진 않겠지 그는 노곤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 죽어서 나밖에 없든 말든 상만 타오면 됐지, 니들이 뭔 상관이야. 머리 많은 게 대수야? 뭐 제대로 하는 게 있어? 상 한번 못 타는 니들보단 낫거든?”
쪽수에 밀리지도 않고 기세등등하게 맞받아치고 있다. 미운 소리만 골라 하는 법, 상대방을 배알꼴리게 만들자! 특별편, 이런 강좌라도 어디선가 듣고 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침하게 대꾸해가고 있어, 분위기가 험악하다.
체교과의 특징이라면 우선, 몸을 사리지 않아 아낌없이 베푼다는 점에 있는데 그건 다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뼈대가 가냘픈 계집 몇몇이서 서로의 머리채를 붙들기 무섭게 은찬은 저도 모르게 총알처럼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아, 자, 잠깐, 잠깐만! 잠깐! 애들아!”
어깨 밑을 웃도는 체구들이 대다수인 여학생들이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필시 은찬의 머리털도 몇 움큼 빠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문신마냥 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운동하는 아이들만큼 싸움에도 승부욕이 넘치는 바람에 오기로 서로의 머리채를 쥔 주먹을 끝까지 펴내지 않아 풀어내기까지 애를 먹어야만 했다. 뭉쳐진 한 명을 떼어내면 다른 한 명이 달려들고, 서로가 아군인지 적군이지 분간도 안하고 잡아당기고 있어 은찬은 일단 가람의 팔을 잡아당겼다. 등 뒤로는 가람이, 앞으론 두어 명의 여자애가 묵직하게 부딪쳐와 은찬은 얕게 휘청거렸다. 한 덩이가 두 덩이로 갈라지자 멈칫거리는 틈이 생겼기에 은찬은,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짐짓 단호하고 엄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주도권을 뺏기면 안 되었기에 그는 뒤이어 황급히,
“어린애도 아니고 싸우면 어떡해. 말로 해결해야지.”
덧붙였다. 모난 말대꾸가 돌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한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히 제 설교를 듣고 있다. 등 뒤에 가려진 가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기서 듣어보니 연습실 문제인 거 같던데, 맞니? 연습실 문제라면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교수님께 직접 여쭤보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조교실에 찾아와서 말은 해볼 수 있는 거 아니니?”
언제부터 제가 그런 예의 바른 인간이었다고 이런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실상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제 입에선 입바른 말들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과실 복도 앞에서 싸우면 어떡해. 지나가다 교수님이 보시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너희 전부 다 이번 대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야?”
“아니요……”
선두가 되어 머리채를 잡던 이의 입에서 외로 얌전히 대답이 뱉어져 나왔다. 은찬은 그에 나름 흡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래.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연습실 문제는 교수님께 말씀드려보도록 할게. 그러니까 너희가……”
“리듬체조부요.”
“그래, 리듬체조.”
선두가 되어 머리채를 잡던 이의 입에서 외로 얌전히 대답이 뱉어져 나왔다. 은찬은 대답에 나름 개운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몇몇 아이들이 제 등 뒤를 향해 눈을 흘기고 지나가곤 했지만, 거친 몸짓은 없었다. 복도에 한차례 성급한 발소리들이 웅성거리더니 뒤이어 썰물 지듯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평화가 찾아온 조용한 통로에서 은찬에게 남은 문제라곤 제 뒤에 서 있는 청가람,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는 소심스럽게 제 몸을 돌려 등 뒤의 가람을 쳐다보았는데, 날이 선 눈동자가 사나운 부리로 저를 쪼듯 쳐다보고 있었다.
“싸우면 어떡해요.”
다소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는데,
“무슨 상관…… 왜 멋대로 끼어들어서―”
그녀는 눈동자만큼이나 날이 시퍼렇게 선 차가운 말투로 퉁명스레 받아쳤고, 은찬 역시 지지 않고,
“다쳐봐야 정신 차릴래요?”
그의 똑부러지는 목소리를 그녀는 듣는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다듬어졌던 그녀의 말을 부러트린다. 가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썹을 찌푸리고, 미간 사이에 촘촘히 주름을 수놓으며 그를 째려보았다.
“다치면 그쪽이 손해죠. 저쪽은 다치나 안 다치나 상을 못 탄다면.”
일목요연한 말들이었다. 가람은 미간을 쪼글쪼글해진 미간으로 뺨을 작게 씰룩이다가,
“흥. 남 이사.”
하고 뱉는데 묘하게 삐친 아이처럼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고맙다곤 말 안 해줘요? 그래도 나름 구해줬는데.”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빈말이라도 들어볼까 싶어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다 발라버릴 수 있거든.”
얄밉게 대답을 맞받아치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자 약 올리고 싶어지는 마음에,
“아, 그래요? 내가 보기엔 밀리는 거 같던데. 머리 잡혀서.”
“……”
제법 짓궂게 말했더니 빈정상한 모양인지 입술만 샐쭉하게 내민 채로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지 않아 정수리 왼 부분이 뿔이 솟아난 듯 보인다. 갈색 뿔. 앞머리는 죄다 오른쪽으로 치우쳐있고, 찰랑거리던 생머리는 마치 엉망진창으로 롤을 감아 풀었던 양 보이기도 하다. 손주먹에 눌렸던 건지 턱 주변이 온통 새빨갛게 부어있었는데,
“입술.”
오른쪽 입가에 거스러미가 앉은 듯 새빨갛게 핏기가 어려있었다. 얇은 실이 수놓은 입가를 보며 은찬은 다시 한 번, “입술.” 하고 “터졌어요.” 말했다. 가람은 영문모를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더듬더듬 제 입가를 매만졌는데, 자꾸만 반대편을 만지는 통에 답답한 나머지 은찬은 손을 뻗었고,
“아―”
“여기.”
가람의 입술을 매만졌다. 퍼석하게 메마른 탓에 껍질이 올라 있어 꺼슬꺼슬하리라 상상했는데 부드러운 감촉만이 손끝에 옮겨붙고 있었다. 손톱 끝에 얼핏 선 붉은 살점이 걸린 듯도 해 그가 망설이는 사이로 그녀가,
“어, 어딜 만져!”
하고 화를 내었다. 입가에 걸쳐있던 빨간 실금들이 어느새 얼굴 전면에 수를 놓은 양 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런 그녀와 달리 그는 단조롭게
“약이라도 발라야겠어요.”
말하고,
“이딴 건 침 바르면 나아.”
그녀가 대꾸해, 그는 잠시 고민하듯 낮게 음― 소리를 내뱉다,
“연고라도 줄 테니까 바를래요?”
그녀를 자연스럽게 조교실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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