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2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2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12


정문을 빠져나와서도 한차례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디 가요.”

자꾸만 애먼 방향으로 몸을 틀어버리는 가람의 손을 은찬은 붙든다.

“이거, 놔요!”

힘을 주어 있는 힘껏 저를 내팽개치려는 그녀를 향해,

“그러다 또 넘어져요.”

얄밉게 한마디 던진다. 가람은 눈썹을 씰룩이고 입술을 지그시 눌러 깨물며 그를 노려본다.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까 좀 내버려두고 가라구요!”

“가다가 쓰러지면 어떡해요. 아픈 사람 길바닥에 두고 가는 매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거든요.”

웃는 얼굴로 잘도 얄미운 말을 뱉는다. 그는 콧등을 작게 찡그리며 웃고, 이어진 손을 힘주어 붙든다.

“아니면 업어줄까요? 그럼 좀 조용해지려나.”

“그럼 죽여버릴 거예요.”

“네. 사실 저도 업고 싶지는 않아요.”

얄미운 말이 도통 가라앉지 않는다. 가람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과 난처함, 짜증이 역력했다. 짜증으로 찌푸려진 미간과 달리 허물어진 뺨에 새겨진 구덩이는 난처함이었다, 난처한 그 뺨엔 보조개가 엷게 패여 있었다.


둘은 나란히 교정을 걸었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이은 상태로. 누군가가 보았다면 갓 마음을 동여맨 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미간을 팬 그녀가 엉거주춤하게 걸음을 옮겨낼 뿐이었다. 앞서가는 강직한 등의 그를 따라서.


의무실에 도착한 가람의 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게 다물려 있다. 입술을 꽉 깨물어 움츠린 채로 은찬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픈 거 같은데……”

은찬은 난감한 듯 뒷목을 긁으며 진료의자에 앉아있는 가람을 내려다보며 대변인을 자처했다.

“아파요? 어디가?”

흰 가운을 곱게 차려입은 그는 무릎을 굽혀 가람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어본다. 얼굴과 얼굴이 거리가 가까워 가람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들고 있었는데 덩달아 은찬의 미간도 묘하게 주름졌던 듯도 하다.

“배요.”

질문은 가람이 받았는데 대답은 은찬이 대신한다.

“맞죠?”

은찬은 그때 가람의 오른편에 서 있었는데, 제가 대답을 대신하며 가람의 어깨를 슬쩍 짚었던 듯도 했다. 가람은 눈을 깜빡이다,

“네.”

하고 대답했다.

“더부룩하거나 체한 거 같기는 않고요? 콕콕 쑤시는 기분이에요? 음― 화장실에 가고 싶지는 않나요?”

머뭇머뭇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는 그처럼 가람의 입술이 작게 오므려 들었다가 아주 자그마한 새 울음소리처럼,

“―이요.”

말했다. 아주 가까이 서 있던 은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마주 본 채로 입술을 들여다보던 그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였기에,

“네?”

그가 묻는다.

“―이요.”

“죄송해요, 잘 못 들어서.”

가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달싹거리다 다시 뱉었지만 알아듣지 못한 그의 얼굴엔 곤란함이 가득했다. 결국, 가람은 눈을 감고 제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꽉 움켜쥐고선 다부진 목소리로,

“새― 생리통이라구요!”

비명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아……”

은찬은 탄성 비슷한 깨달음을 소리 내 밭고, 가람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해 가을날 추풍 아래 잘 익은 땡감이 따로 없다. 온통 새빨갛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보송한 귓바퀴도 새빨갛다.

가로수처럼 미동 없이 가람의 옆에 서 있는 은찬과 달리 흰 가운의 그는 엷은 미소를 입술에 띄우곤 가람의 손바닥 안으로 푸른 알약 두 개를 쥐어주었다. 둘 사이에 자그마한 속삭임처럼 대화가 오갔지만, 은찬은 크게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가람이 알약을 입에 털어 넣을 때, 이어서 흰 가운의 그와 그녀 두 명의 입술이 벌려지며 대화를 나눌 때, 그래서 고요한 공기에 작디작은 소곤거림이 작은 땀으로 박음질 되고 있을 때, 막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던 듯도 하다.


“많이 아프면 여기서 조금 누워있다가 가도 돼요.”

상냥한 목소리로 쉬고 가길 저하는 그의 청에 가람은 고개를 저었는데,

“쉬고 가요. 많이 아파 보이던데.”

은찬이 말했다. 가람은 엉거주춤허니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지도 못한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눈이 깜빡, 깜빡거렸다. 훤한 백열전구 아래서 다홍빛 눈동자가 빛을 머금은 탓에 초롱초롱하다.


얕게 물기가 어린 두 눈이 깜박거렸다. 동그란 홍옥이 반짝이다가 눈꺼풀에 먹혀 반이 되고, 사라졌다가도 다시금 동그랗게 농익어간다. 사과를 먹어치우는 눈꺼풀, 그리고 엉겨 붙었다 떨어지는 속눈썹을 눈에 담는데 그 중 한 가닥이 떨어져 뺨 위에 앉아,

“속눈썹이 붙어서.”

가람의 얼굴 위로 은찬의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숙인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더듬는다. 긁는다. 가늘고 여린 속눈썹을 떨궈낸다. 달콤한 과일 향과 한데 뒤엉킨 습한 땀내가 그의 안으로 훅하고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 단내에 섬찟 놀라며 은찬은 황급히 몸을 떼어내었고 가람은 물끄러미 그를 눈에 담고 있었다. 안갯속을 헤치기 위해 눈꺼풀을 찌푸리는 이처럼, 눈동자를 작게 만들며.


초대받지 못한 어색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들고 있었다. 흰 가운의 그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뒤적이며 종이 팔락이는 소리만을 들려주고 있었기에 침묵은 줄곧 이어졌다. 말라가는 유화처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미동 없이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이대로 있기도 뭣해 은찬은,

“그럼 잘 쉬다 가요.”

엄지와 검지를 맞비벼 미련 없이 속눈썹 가닥을 털어낸 그는 솜털만치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향해 샐쭉, 한번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녀는 대답이 없다. 흰 가운을 입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까지 마친 그가 문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도 가람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두꺼운 쇠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 치듯 조용한 복도에 쿵 하고 울릴 때,

“같이 있어 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그 옆을 지킬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 정도로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던 낯빛을 떠올리며 뭐 상관없지 않나,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제가 곁에 있어 줄 이유도, 그렇다고 딱히 그대로 가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제가 있는다고 고통이 덜어질 리도 없고 약을 먹은 그녀는 이제 아프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딱 이 정도면 적절했다. 적당한 온도의 배려와 베풂. 그런 사이였다. 청가람과 주은찬은.



*



그렇지만 이튿날 괜스레 그녀가 걱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르면 몰랐지, 여동생을 곁에서 지켜본 은찬에게 있어서 ‘생리통’의 고통이 사람에게 얼마나 패악을 부리는 못된 성질을 지닌 요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못해 변기와 수없이 입 맞추듯 웩웩거리던 여동생의 그날을 떠올리자 못내 우려가 생기는 게 의아한 기우는 아니었다.

역시 의무실에 두고 오는 것보다야 집에 데려다주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은찬은 머리를 긁적이다 점심나절에 체육관으로 향했다. 설마 혹시나 거기에 있을까 싶었기에. 텅 빈 매트를 기대하며 문을 열었는데 그녀가 있었다. 역시나.


“이제 안 아파요?”

그녀는,

매트 위에 다리를 쫙 벌려 일자로 만든 채로 상체를 바닥에 붙여 몸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 휘어진 등줄기를 바라보던 그의 미간에 힘줄이 솟아오른다.

공강인 화요일이었기에 연습이 아니라면 학교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연습 하루 거른다고 몸에 가시가 돋나, 좀 봐가며 쉬어도 괜찮지 않나, 하는 불만이 그의 맘 한쪽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올라 은찬은 다소 날이 선 어투로,


“배 안 아프냐구요.”

하고 물었는데 가람은 전날처럼 눈만 깜빡여댄다. 대답할 기운이 없는 건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인지 그가 다가와도 이전처럼 진절머리 치지도 않은 채로 바라보고만 있다.

“밥은 먹었어요?”

그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벌려두었던 다리 한쪽을 접어 발등을 감싸 쥐기만 한다. 묵언 수행하는 절간 스님처럼 다문 입은 대답이 없었다.


“밥은 먹었냐구요.”

닦달하듯 되묻자,

“먹든 말든.”

매트 위에 상체를 숙이는 그녀의 퉁명스런 중얼거림이 은찬의 귓속으로 사르르 스며들어왔다. 가시돋힌 음성이 나부끼며 톡, 톡, 그의 미간을 찔러대어 보기 싫게 상처가 난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고, 엎드려있는 그녀의 등줄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리어 체육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기 전 내쉬던 짙은 한숨은 불쾌감이 역력해 가람의 목덜미를 간질이기에 충분한 농도였다. 진한 한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얼핏, 눈초리 끝에 걸린 빨간 홍채 안으로 닫혀가는 체육관 문이 어른어른 스미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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