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0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10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10

 

*

 

벽에 걸린 시계는 숫자 4시를 향해 있었고, 그제야 소란스레 조교실을 매웠던 인파들이 개수구에 낀 거품이 빠지듯 열린 문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야 농도가 옅어진 산소를 깊이 들이마시며 은찬은 줄곧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있던 몸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목을 얕게 비틀었다. 우둑이는 뼛소리가 진하게 울리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정적에 공기들이 한데 얼어붙은 양 미동조차 없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덕분에 기다란 빛줄기 또렷한 모양으로 땅바닥에 고여 든다. 기다랗게 뻗어온 광선이 책장에 노란 웅덩이를 패어놓았다. 눈을 깜빡이며 제 목을 주무르던 그는 빛에 이끌린 듯 일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부터 뿌옇게 먼지가 들러붙은 유리창으로 내다본 풍경은 마치 잔금이 잔뜩 새겨진 안경 너머로 내다볼 때처럼 투과된 모든 색이 선연치 못하다. 꿉꿉할 거라던 주말 일기예보와 다르게 전에 없이 맑은 날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 때문에 하늘은 먼지가 끼어있었다.

빼곡하게 솟은 갈색 건물 사이에 삼각꼴 모양의 지붕 하나가 걸려있었다. 닳고 닳은 숯에서 떨어진 잿가루처럼 연한 회색을 자랑하는 체육관 건물이었다.

체육관…… 하고 자연스레 연상되어지는 그 뽀얀 얼굴 탓으로,

그러고 보면 밥은 제대로 먹었나.”

중얼거리는 그는 지금 가람을 생각한다.

 

*

 

뙤약볕이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빛을 내뿜는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은찬은 가람에게 가보지 못했다. 전번에 잡은 기회를 낚아채 그대로 기세 좋게 몰아칠 다시없을 기회였다. 운이 나빠도 겉치레적인 인사는 할 수 있으며, 슬그머니 말꼬리를 잡아 오전의 수업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식사를 같이 하며 저의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주말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염탐할수도, 귀찮음이 역력할 그녀를 졸졸 쫓으며 오후의 훈련까지 지켜보기가 가능했다. 물론 그녀가 심히 불쾌해 한다면 은찬은 언제든지 주저 없이 발걸음을 돌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실 그에게 아쉬울 건 없었기에.

오후 수업도 빽빽하니 차 있는 월요일이기에 실상 점심을 거르는 그녀가 분명 교양 수업이 이뤄지는 교실 속에 있으리라 은찬은 확신했다.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핸드폰을 들고 나가려는데 별안간 노크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은찬 조교님~”

은찬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지나갔다. 이내 그 빛은 점자 사그라들어 반가움으로 응결되었다.

홍수아?”

제 기억이 맞다면 재작년 겨울에 저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했던 그녀, 홍수아가 뽐내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반갑다. .”

으레 그렇듯, 길 지나던 오래된 친우를 만나 반가움을 표하는 이들처럼 은찬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악수대신 그의 팔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손바닥을 철썩하고 때려 보인다.

징그럽게 악수는.”

잘 지냈어? 여기는 무슨 일이야. 교수님 뵈러 온 거야?”

너야말로 학교에 쐐기를 박으려고 조교실까지 점령했냐.”

소탈하게 근황을 묻는 대화가 오갔다. 듣자하니 졸업 직전에 소규모 기업에 입사했던 그녀는 4월 봄비가 내리던 날 점심으로 순댓국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문뜩 지긋지긋한 환멸과 지루함을 느꼈고 칼퇴근을 용납지 않던 상사에게 미처 소화가 되기도 전에 보란듯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당당히 회사를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그 길로 집에 돌아가 다음날 배낭 하나 짊어진 채로 기차표를 끊어 전주로 국밥을 먹으러 내려갔다는 게 요지였다.

너 막사는구나.”

너보다야 안 막살아. 다 팽개치고 조교나 하고 있는 주제에.”

그래도 조교는 월급이라도 받거든요.”

~, 그 푼돈?”

입가를 샐쭉 이며 비아냥거리던 그녀는 다시 제 할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 리가 없었다. 이제 막 개막했을 뿐이다

전주에서 국밥을 먹고 있다 보니 담양으로 내려가 떡갈비가 먹고 싶어졌고, 담양으로 가니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 회를 먹고 싶고, 갈매기에게 새우깡도 물려주고 싶어 지체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부산으로 향했다고 했다. 그렇게 유랑꾼처럼 돌아다니다보니 약 3개월간 꿍쳐두었던 월급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탕진되더라며 그녀는 웃고 있었다

홍수아, 그녀를 모르는 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며 허무맹랑 허풍을 치고 있다며 모함할 게 분명했지만, 은찬은 그녀를 잘 알았기에 순순히 납득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역시 한때는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던 체교과가 아니었는가.

그녀의 별명은 지뢰였는데, 가지런히 정돈된 앞머리 칼에 가려진 매끈한 이마나, 자기주장 또렷한 콧대, 언뜻 언뜻 해가 쪼고 간 탓에 박힌 주근깨가 있는 보송한 볼따구 등 반반하게 생긴 그 외모를 보면 외향 탓에 빚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지뢰라는 명성을 떨치게 된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황금비율 자랑하는 폭탄주덕분이었다. 그녀는 신입생 시절부터 예비역 입에 밤새도록 부어지던 폭탄주를 주조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점에 있다. 제조가 끝이라면 평범한 주조꾼에서 끝났을 텐데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그녀의 타겟이 되었다는 게 문제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붓는다는 말이 더 맞았고, 은찬 역시고 여러 번 그녀가 먹이는 폭탄주 덕분에 밤이 다 가도록 꺽꺽대는 여럿 날을 보냈었다.

강릉에 가서 그 좋다는 카페에 가서 마셨는데 서울이나 거기나 맛은 비슷하더라.”

어련하시겠어.”

뭐하러 두 세 시간씩 줄 서서 먹는지 몰라. 그 커피나 이 커피나, 똑같은 커피인데.”

콩나물국밥 하나 먹으러 전주를 가고, 떡갈비 하나에 담양까지 갔다던 그녀가 뱉을 말은 아니었지만, 은찬은 별 트집 없이 맞장구를 쳐대었다.

풍경이 좋아서겠지.”

그건 그렇더라. 풍경은 좋았어. , 먹는 이야기하니까 배고프다. 너 밥은 먹었냐?”

?”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의 출현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가 잠시 갈등하는 새로 그녀는,

나 밥 사줘. 월급 받는 조교님.”

자연스럽게 등을 떠밀어 문밖으로 내쫓는다. 오랜만에 학식도 먹고 싶구, 아니, 더 비싼 거 얻어먹어야지, 그녀는 재잘거리면서 자연스레 은찬의 팔에 제 팔을 엮어 낀다. 강풍에 휩쓸리듯 은찬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에 이끌려 조교실을 빠져나가게 되었다.

너 뜯어먹을 거야.”

라던 말은 웃자고 한 농이 아니었는지 수아는 은찬의 일주일 치 식비에 상당하는 금액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래도 너 가난한 조교니까 내가 적당히 봐준다.”

이게 적당히 봐주는 건가 싶어 은찬은 한숨을 쉰다. 제 앞엔 제육볶음이 놓여있고 그녀의 앞으론 오므라이스에 뚝배기 불고기, 오징어삼겹살볶음, 덧붙여 된장찌개가 놓여있다. 하얀 밥에 빨간 국물 비벼가면서 실하게도 먹는 그 모습에 은찬은 피식하고 작게 웃다, 제 앞에서 깨작거리던 가람이 떠올랐다. 음료수 한 병, 미동조차 없던 테이블 위 숟가락과 돼지고기에서 배어 나온 기름방울 성하게 둥둥 떠다니던 차갑게 식은 김치찌개도.

, 나 다 먹으면 커피도 사줘.”

얼굴 두껍기도 하지, 생각하면서도 은찬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눈꼬리를 슬며시 접어 웃는다. 싱그럽기도 했다. 염색물이 빠져 훤히 들여다보이는 검은 정수리를 내다보다 은찬은 문뜩,

걔도 이렇게 살가우면 좀 편할 텐데.”

들릴 턱이 없는 혼잣말을 부재한 가람에게 넌지시 건네며 밥술을 뜬다.

 

*


그녀와는 인문사회관 앞에서 헤어졌다. 그때도 그리 늦은 시각은 아니었으나, 오후 2시란 시각은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음이 명백했다.

가람의 월요일 오후 강의는 영어회화로 은찬 역시도 지루한 기억만 남아있는 수업이었기에 그녀가 제대로 들어갔을지 의뭉스러움이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수의 인원이 짝을 맺어 진행되는 방식이다 보니 새침 는 그녀에게 적절한 짝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필시 교수와 짝이 맺어지기 십상일텐데, 수업시간이면 책상에 찹쌀떡처럼 들러붙는 그녀가 제대로 버틸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밥은 제대로 먹은 건지, 수업은 잘 들어간 건지. 잘 하고 있는 건지.

우중충한 적갈색 벽돌로 쌓아 올려진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는 잠시 그 앞에서 머뭇거리며 계단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결국 발을 돌려 조교실로 향했다. 인문사회관과 체육교육관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어 걷는 새로 그에겐 충분히 머뭇거리고 발걸음을 돌릴 기회가 무수히 주어졌지만, 무르진 않았다.

조교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고, 평화롭고, 잊지 않고 온풍기를 켜두고 나갔기에 싸늘한 복도와 달리 따스했다. 문을 열자마자 몰아치는 온기에 뺨과 귓불, 목덜미, 손등이 차례차례 폭신하게 감싸여간다. 마치 가볍고 따뜻한 솜이불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블라인드를 거둬놓은 창문으론 밝은 볕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그는 블라인드를 내려 아주 약한 그늘을 제 몸에 기워 넣는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없는 그의 텅 빈 책상만큼이나 향후 그의 스케쥴도 텅텅 빈 밥그릇과도 같았다. 여유롭고 한가하게 웹서핑이나 해볼까 싶었는데,

들어오세요.”

이번에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 하는 덜 잠긴 수도꼭지 틈으로 비어져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이 규칙적인 울림이 똑, . 총 네 번 울리고 문이 열렸다.

바쁜가요?”

평균연령 반 50세를 자랑하는 체육교육학과의 평균 나이를 감소시켜주는 공로가 큰 30대 후반의 젊은 교수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은찬은 괜찮다며 황급히 자리에 일어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이번 학기에 신설된 과목을 맞게 된 시간강사였는데 30대 후반이라는 나이답게 눈가에는 가는 주름들이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며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으나, 그와 다르게 진한 고동빛을 자랑하는 땡그란 두 눈알은 쉴새 없이 돌아가기 바빠 불안감이 역력해 보였다.

방해한 건 아니냐며 예의 차리기도 잠시, 장장 60부에 달하는 강의자료들의 복사를 순식간에 부탁하고선 바람처럼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3시까지 총 60…… 시간은 이제 막 250분을 지나고 있는 차였다. 은찬은 조용히 팔을 걷어붙였다.

양면인쇄도 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스테이플러가 찍히는 기능도 없는, 간혹 사이사이 흑백 노이즈가 일어나는 낡아빠진 복사기를 보유하고 있는 체육교육학과 조교실로선 장장 18쪽에 달하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9장 남짓의 인쇄물도 소화하기가 벅찼다. 스테이플러를 찍던 그는 도서관 지하에 있는 복사실에 가서 부탁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제 사비를 들여야 함이 역력했기에 이내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기계처럼 스테이플러를 찍고, 인쇄물을 합쳤으며, 그 사이로 40분이란 여유는 후딱 지나가 버려, 몰려드는 학부생들로 바글바글해진 조교실은 소란에 휩싸였다. 여학생 몇이 도와주겠다며 달려든 통에 종이가 날렸고, 제 몫만 챙겨서 나가기 바쁜 학부생들 여럿 사이에 밀쳐지기도 했던 그가 겨우내 안정을 찾은 건 아까 말했듯이 오후 4.

 

 

4시면 모름지기 수업이 끝나도 애당초 끝났으리라, 틀림없이 그녀는 지금 체육관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진한 회색 지붕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그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어 내렸다. 그 덕에 손톱 끝에 살짝 윗입술이 걸쳐지기도 했다. 그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다 조교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길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했다. 바로 체육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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