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6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7
일주일, 목요일은 은찬이 가람을 지켜본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 날도 은찬은 가람에게 향했다. 홀로 서 있기엔 비대할 정도로 널찍한 체육관에는 언제나 가람만이 있었다. 사람 서넛은 더 들어와도 개인 공간이 차고 넘칠 것만 같은 넓대대한 매트들이 주어졌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다.
작은 가람에게 있어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체육관은 아빠 옷을 몰래 빼다 입은 초등학생의 넘치는 소매만큼이나 여백이 풍요롭게 주어져, 도리어 위압감이 느껴지곤 했다. 맞지 않는 옷을 몰래 훔쳐 입고 나가 밑단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버리는 바람에 더럽혀진 외투 자락으로 인해 꾸지람을 듣기 전 샘솟을 긴장감과도 같은 야릇한 감각이, 그 얄팍한 공간에서 시선을 던지다 보면 손바닥 안에 괴이는 땀처럼 마음에 차올랐다. 왜소한 그녀 덕에 체육관은 더욱이 넓어 보였고, 체육관이 넓어 그녀는 작다.
도시락 반찬 통에 가지런히 담긴 계란말이들처럼 매트들은 체육관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비록 계란말이와 달리 노란색이 아닌 촌스런 체육복 같은 청색이지만. 사이사이 고명처럼 빨간 도마와 평행봉 따위가 평평한 바닥에 발을 대고 있었다. 그 외의 여백들은 모두 파란 물빛이었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무게에 짓눌려 가라앉았다 솟았다 하는 그 파란 물빛은 멀리서 보면 꼭 파도가 이는 잔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가람은 오늘도 제 손끝과 발끝으로 그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삐걱대는 매트의 작은 숨소리와 함께. 조용하고 텅 빈 체육관 벽 이곳저곳에 딱따구리처럼 제 초침소리를 못 박는 시계와 함께. 고르게 숨을 내쉬고 땀을 흘리며, 엉긴 머리칼을 제 목 뒤에 문신처럼 그려 넣은 채로.
은찬은 체육관 사방에 둘려 쳐진 계단-겸 관중석을 겸비하고 있는 딱딱한 돌 위에 몸을 앉혔다. 그는 가람을 빼곡이 주시한다. 눈과 눈이 마주칠 순간을 기다리며,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묵직한 숨을 흘려보냈다. 숨소리가 제법 굵었다.
굵은 숨이 흘낏, 가람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기라도 한 모양일까. 헝클어진 앞머리를 거둬내며 가람이 붉은 제 눈동자로 은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류알같이 붉은 눈동자만큼이나 상기된 뺨도 붉었다. 은찬은,
“안녕? 청가람?”
시큰둥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거리가 가까워 분명 목소리가 들렸을 테고, 종전 눈을 맞췄기에 필시 제 존재를 깨달았음이 분명한데도 가람은 냉랭히 그를 무시한다.
역시 무리야. 은찬은 조용히 마음에 새김질을 했다.
그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일 리가 없었다. 제가 클론이 아닌 이상은…….
*
어린아이도 한두 번의 호통 뒤에 달디단 사탕을 입에 물려주면 웃기 마련이다. 눈물 자국 성글게 그려진 얼굴로 언제 울었다는 양 입을 벌리며 사탕을 쥐어먹지만, 은찬에겐 사탕이 없었다. 아이와 그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호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고, 차이점이 있다면 아이는 사탕을 받았지만 은찬은 적의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아무렴 빈손이 아닌 게 어딜까,
마른 한숨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적막한 공기들을 제 한숨으로 들쑤시기라도 할 요량인지 그는 끝없이 한숨을 쉬며 드륵드륵 소리 내 의자 바퀴를 끌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 지루한 정적을 깨부술 훼방꾼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한 번이면 될 판돈을 거듭해 끼얹듯 제 위로 얹혀진 교수님의 당부와 부탁에 그의 어깨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듯이 축 쳐져 버리고 말았다.
건의 말대로 이전 학부생일 때처럼 그저 청가람과 친해지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 성질에 있어서 ‘자발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덧붙여 불필요한 ‘적의’와 저를 향한 이유없는 ‘배척’이 더해졌다는 점에서 또한 지극히 그 성질이 달랐다. (결여)
차라리 클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사지가 두 개면 좋겠어. 하나는 청가람에게 보내놓고, 본체는 지금처럼 유유자적 시간이나 때우고 싶었다.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제게 맡겼다는 것은 모름지기 어느 정도 청가람을 눈대중 치고 있었단 뜻일테니…… 그만두고 싶다는 저의 질문에 아쉬움은 표할지언정 의문은 갖지 않으리라. 착오였다.
「못하겠어요.」
뱉지 못해 어물어물한 말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
수요일 저녁, 귀가를 서두르던 은찬을 발견한 교수는 계단 위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저를 호명하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려 마주친 계단 너머의 초로를 향해 가벼이 묵례를 건넸다.
“돌아가는 길인가?”
“네? 네……”
어색하고 난처할 때면 습관적으로 목 언저리를 긁어내리는 그였다.
“그럼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
“예?”
“저녁 약속이 있다면 아쉽지만 짧게 끝내줄 테니. 올라오게.”
“저, 그게―”
“마침 물어보고 싶은 일도 있고 말일세.”
명백한 강요였다. 권유의 탈을 뒤집어쓴 그의 목소리에 기가 눌린 은찬은 그대로 내려왔던 계단에 터덜터덜 올라섰으며, 어느샌가 또 한 번 차갑게 식어가는 차를 사이에 둔 채로 초로의 연구실에서 그와 낯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주던가?”
“예? 예, 뭐.”
“시간이 정말로 금방 흘러가 버려. 자네는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과 천천히 지나가는 일 중 무엇이 더 마음에 드나?”
그는 이렇듯 종종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은찬을 향해 건네곤 하였는데 5년이란 시간 동안 종강총회 때면 그를 불러다 시낭독-물론 시는 초로의 교수가 직접 지정해준다-테이블 숲 한가운데 서서 낭송하게 한 뒤로 은찬은 그것이 단순히 노인 특유의 감수성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 전 천천히 가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서인가?”
“뭐, 나름대로요.”
“누구나 그렇지. 좋은 때는 천천히 거북이처럼 지나가길 바라고, 나쁜 순간은 재빨리 끝나가길 바라니 말이야.”
느긋한 그의 말투와 다르게 은찬은 초조히 손깍지를 끼웠다. 바싹바싹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그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물었다.
“그래서 저를 왜 부르셨는지……”
“사랑하는 제자를 잠깐 보려는데 그게 문제인가?”
“하하.”
“청가람은 만나봤나 싶어서 말이야. 애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지?”
“잘 알고 계시네요.”
“낯가림이 심해서 그럴 거야, 얼굴만 익히면 곧 친해질 수 있을걸세.”
아니던데요,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킨다. 위아래를 상반되게 그려놓은 그림인 양 눈썹은 난처함으로 축 쳐져 있는데 입술은 매끄럽게 올라간 표정으로 은찬이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겠네요, 하…하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내게 찾아오게.”
그 도움이라면 지금 필요하다. 아니, 애당초 그런 도움을 청할 일을 그는 제게 권유하지 않았어야 한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아래로 처박혔다.
“저는 사실……. 저한테 왜 시키셨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저보다 잘할 사람은 많을 거예요. 제가 조교라서 맡기신 거라면 그건 굉장히―”
“자네를 믿고 맡겼다 생각해주면 안 되겠나?”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곤 줄곧 테이블 아래로 처박아 두었던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은찬은 초로의 주름진 미간 사이에 제 시선을 굳건히 박아넣으며,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말했고, 그에 흔들림 없이 인자한 얼굴의 늙수그레한 노인이 대답한다.
“자네가 시간이 많아 보여 부탁한 게 아니니 안심하게.”
“왜 하필 저죠.”
“자네에게 적격이라고 생각했거든.”
“전 못하겠―”
“자네가 시간이 많아 보여 부탁한 게 아닐세. 저번에도 말했듯 주군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말을 끊는다. 가위로 실을 잘라내듯,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그의 앞니를 때리며 흘러나오던 그 소리를 자르며 노인은 웃고 있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세월을 얼굴에 그려 넣은 노인의 눈가는 웃을 때면 쪼글쪼글해지며 보기 좋은 나이테를 그려낸다. 은찬은 그런 그의 낯을 보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손끝으로 긁어댈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함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벼랑 끝으로 핏덩이를 내치는 사자와도 같은 추진력이었던 건지, 교수는 갈피를 잡지 못함이 역력한 그를 가람을 향해 밀쳐내었다.
목요일 오후는 조용한 편이다. 먼저 오전에 전공수업들이 몰려있던 탓에 과실을 기웃거리는 이들 머릿수가 지극히 적었으며, 때 이른 주말을 맞이하기 위해 귀갓길을 서두르는 교수님들로 인해 연구실이 텅 비어버리기에 은찬 역시 미리부터 휴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노크 소리만 아니었더라도.
평상보다 여유로웠다. 기척이 3시부터 뚝 끊겼기에 은찬은 거진 오후 시간은 홀로 유유자적 신선놀음하듯 보냈다. 시곗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기 무섭게 퇴근준비까지 말끔하게 해 놓은 상태로 그는 웹사이트만을 들락거리던 차였다.
“들어오세요.”
분명 소리는 있었는데 들어오는 기척이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들어오세요’라고 문을 향해 말하고, 방문객을 확인하기 위해 책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본다. 문 손잡이가 부드럽게 출렁이며 쇳소리를 들려주었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딱딱한 구두 소리가 들렸을 때 은찬의 몸이 의자에 데인 양 화다닥 떨어져 나왔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자네.”
“아, 안녕하세요.”
들어오는 이를 향해 은찬은 허리 굽혀 인사를 건네었다. 기동을 멈춘 로봇처럼 멍하니 서 있던 은찬은 황급히 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냉장고를 열어 황급히 그의 앞에 음료수를 건네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골라잡았기에 은찬과 그의 음료수병 색이 달랐다.
“지나가던 길에 들렸네. 자네도 곧 퇴근이던가?”
“네. 요즘은 한가해서 정시에 돌아가요.”
“그래. 저녁엔 주로 뭘 하지? 연습을 하나? 연애를 하나?”
“하하, 연애도 사람이 있어야 하죠.”
“대답을 넘긴 걸 보니 연습도 당연히 안하고 있을 테고.”
넘겨짚듯 건넨 그 말은 실상 정답이었다. 은찬은 연습 따위는 취급하고 있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개인훈련을 받았던지도 까마득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그의 사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임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들먹이듯 연습이란 단어를 꺼내는 그가 은찬은 난처하기만 했다. 은찬은 민망함과 닳고 닳아 고루해진 짜증을 누르며 뒷목을 긁었다.
“가서 밥이라도 한 끼 먹지.”
“교수님이랑요……?”
갑작스런 청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저를 바라보는 은찬을 향해 그럴 리가 있겠냐며 그가 웃었다.
“청가람 말일세. 목요일 오후니 연습을 하고 있을 거야.”
“아, 네.”
“가서 밥이라도 청해보지 그러나.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쭈글쭈글한 주름이 곳곳에 차 있는 그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했기에 은찬은 제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차마 뱉어내지 못했다.
……이미 여러 번 까였는데요.
속으로만 대차고 강하게 질러볼 뿐이었다. 속으로 삭인 중얼거림이었기에 그에게 들릴 턱은 없었다.
*
역시나 뻔했다. 뻔한 일을 뭣 하러 이리도 순순히 자행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둘러대면 될 일이었는데…… 그냥 갈까 머뭇거리며 놀리던 발은 체육관 앞에 당도한 후였기에 그는 생각을 접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등 떠밀려 도착하기는 했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자의로 행했으니 시도라고 해볼 요량으로 그녀를 지켜봤다.
백건의 말대로 정말로 치근덕거리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괜히 엉킨 실타래를 더 꼬듯이 애먼 머리를 빙빙 돌릴 필요도 없을 테고. 곰곰이 생각하는 새 은찬의 눈길이 닿던 곳에 가람이 멈췄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안녕? 청가람?”
은찬은 인사도 건네보았다.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아예 등을 돌린 채 제 동냥질에 응해주지도 않았다. 초침만이 똑딱 소리를 내어가며 은찬에게 시선을 구하고 있었다. 굴러가는 시간을 보다가 그는,
절대로 안 돼, 무리야. 생각한다. 친구가 되어주라니……. 친구는 되잖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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