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6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6
이튿날 은찬은 어김없이 체육관을 찾았다. 점심을 앞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체육관에 있을 게 분명했다. 화요일은 그녀의 공강이었다.
매트 위에 가람이 일자로 곧게 누워있었다. 연습하다 잠시 쉬는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는 눈을 붙이고 있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팍의 움직임을 보아 잠들어있음이 분명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깨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그녀가 잠을 참 많이 자는구나, 싶었다. 요 며칠 새 지켜본 봐로 그녀는 잠을 참으로 많이 잤다. 눈을 뜨고 연습을 하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그 둘 뿐인 모습만이 은찬이 지켜볼 수 있는 그녀의 전부였다. 그녀는 정말로 행동패턴이 좁았다. 아니, 단순했다. 오직 예 혹은 아니오. 라는 선택기능밖에 심어지지 않은 기계처럼 그녀 역시 뇌 속에 연습 아니면 잠이라는 공식밖엔 주어지지 않은 기계같았다.
먹는 모습도 얼마 보지 못했다. 그녀가 온종일 먹는 거라곤 자그마한 음료수 한 병. 아무리 기계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전원공급을 해주는 물질은 있다. 하다못해 털털거리며 굴러가는 소형 자동차라도 기름 한 방울은 먹어야 바퀴가 움직이지 않던가. 그렇다고 해서 음료수 한 병으로 신체가 제대로 굴러갈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그녀의 연습량은 상당했고, 그녀는 능히 그 스케줄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기운이 솟는 걸까? 은찬은 문뜩, 모든 건 정신력-소위 끈기라고 말하던 코치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엔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대학 입학 한 학기 지나기 무섭게 끄나풀을 놓치든 연습을 놓아버린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그는 냉랭하기보다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마치 응당 그렇다는 듯이 교과서에 적힌 말을 줄줄 외워 읊어주는 프로그램처럼 지극히 무심하게-그래서 저 말이 지금 저를 채찍질하는 것인지, 의욕을 복돋아주려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무정하게 말했었다. 그 말이 새삼스레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정신력의 차이인가? 인재들이란 그런 걸까? 독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저 조막만 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도무지 맞지 않는 말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올라 앳기가 빠지지 않은 볼따구나 화장기없이 수수해 전체적으로 새푸름한 안색에서나, 작은 아귀에도 비틀릴 듯한 목줄기나 얕게 솟아오른 쇄골뼈에서도.
매트 위를 굴러다니는 그녀는 오랜 시간 운동을 지속해왔던 여타 다른 이들처럼 그 운동에 맞게 신체가 개조된 양 팔다리가 길쭉길쭉했지만, 그에 비해 전체적인 체격이 남달리 왜소했다. 왜소했기에 되려 팔다리가 길어 보이는 착각이 이는지도 몰랐다.
미술품을 감상하는 이 마냥 그녀의 뺨, 눈두덩과 가느다란 손과 발을 그가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녀의 엉겨있던 속눈썹들이 파르르 떨리며 벌어진다. 감긴 눈이 열리며 붉은 눈동자가 그의 앞에 펼쳐진다. 깜빡인다. 물기 없는 눈동자가 빛을 머금어 감에 따라 또렷하게 변모해간다. 갑작스런 그 벌건 깜빡임에 그가 뒷걸음질 치던 그때, 그녀의 샛붉은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미, 미안.”
“변태예요?”
“아……”
역력한 적의에 은찬은 그저 뒷머리만을 긁적였다. 갑작스레 제 눈에 들이찬 시붉은 머리카락에, 그와 대조되는 무채색 검은 눈동자를 본 가람이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가람은 기분 나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화다닥 말을 내뱉었다. 마치 몸에 들러붙은 기분 나쁜 먼지를 털어내듯 탁탁, 손바닥으로 제 몸에 들러붙었을 그의 시선을 털어내고 있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자고 있길래 말을 걸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단물 빠진 껌을 뱉어내기 아쉬워 연신 씹어내듯 말을 웅얼웅얼 뱉는 그가 가람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아, 그러시겠죠. 사람이 잠을 자고 있으면 그걸 지켜보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정말로 미안해요.”
“사과는 그만하고 정말 미안하다면 좀 꺼져줄래요? 방해거든요.”
은찬의 어깨를 자그마한 손바닥이 힘있게 밀쳤다. 그 작은 손 어디에서 그런 강한 힘이 나왔는지 은찬은 떠밀려 작게 휘청거렸다. 그에 아랑곳없이 가람은 구석에 벗어던졌던 양말에 발을 끼우고, 운동화에 발을 넣고 끈을 옥죈다.
“밥 먹으러 가요?”
아직도 안 갔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바라본다.
“같이 먹을래요? 내가 살게요.”
“어제도 분명히 말했죠. 내가 밥을 먹든 말든 댁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지치지도 않냐는 마음에 가람은 그를 있는 힘껏 날세워 쏘아본다. 은찬은 엷게 뺨을 긁고 있었고,
“그렇게 적선할 대상이 급급하면 학교 앞 골목이나 나가보시죠? 길고양이 많이 돌아다니잖아요? 밥주면 좋다고 꼬리 흔들고 다가올 테니까. 아쉽게도 난 고양이가 아니라서.”
“……”
“한마디로 나한테 관심 끄고 꺼지라는 말이에요.”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달아나듯 그를 홀로 내버려두곤 출구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은찬은 잠시 뺨을 긁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결함이야. 분명한 결함이지…… 성격적 결함……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이던 그의 얼굴에 놀라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평소와 다르게 눈앞에 떠올라야했을 쨍한 백열전구는 온데간데없고 벌건 빛만이 빗발치고 있었다. 흐리멍텅했던 시야가 몇 번의 눈을 깜빡임으로 초점이 고여질 때,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제 망막에 맺혀들고 있었다. 빨간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그 사이로 곧게 솟은 가지런한 코 아래에 있던 입술. 그리고 검은 점.
적잖게 동요했던 모양인지 가람은 그날 저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음료수를 쥐어버렸다. 묘하게 패키지가 닮았던 탓에 값을 치르고 나와 뚜껑을 딸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입안으로 들어차는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식감에 가람은 당황해 그대로 땅으로 뿜듯이 액체를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운동화에 얼룩이 졌고, 기분 역시 얼룩덜룩한 보도블럭같이 질척임으로 가득해졌다.
신경질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음료수를 집어넣고 오늘 점심은 공쳤다는 생각으로 체육관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혹여라도 그가 매트 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에 애용하던 지름길도 버려둔 채로 에둘러 빙빙 돌아 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했다. 애꿎은 녀석 때문에 한 시간이나 되는 연습시간을 낭비한 일에 가람은 혀를 차며 벤치 위에서 넋놓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맑았고 볕은 따사로웠다. 꽃샘추위를 이겨낸 꽃봉오리들이 이제 두툼하게 잎들을 부풀려가고 있었다. 제 머리 위로 흰 구름덩이들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표표히 흘러가고 있었다. 듬성듬성하게 흰 여백을 남겨두고 하늘색 크레파스를 미처 칠하지 못한 스케치북처럼 보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주변을 둘러보길 수차례 지속하다 문뜩 지루함을 느꼈고, 이쯤이면 그도 떠나갔겠지 싶었기에 체육관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도착한 체육관은 텅 비어있었고, 그제야 체증이 가신 듯 그녀는 크게 숨을 내뱉고 다시 한 번 매트 위로 발을 올린다. 작은 몸이 매트 위로 떠올랐다.
'둥굴레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8 (0) | 2016.04.08 |
---|---|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7 (0) | 2016.04.08 |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2 (0) | 2016.03.28 |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5 (0) | 2016.03.21 |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4 (0) | 201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