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6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6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6

 

이튿날 은찬은 어김없이 체육관을 찾았다. 점심을 앞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체육관에 있을 게 분명했다. 화요일은 그녀의 공강이었다.

매트 위에 가람이 일자로 곧게 누워있었다. 연습하다 잠시 쉬는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는 눈을 붙이고 있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팍의 움직임을 보아 잠들어있음이 분명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깨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그녀가 잠을 참 많이 자는구나, 싶었다. 요 며칠 새 지켜본 봐로 그녀는 잠을 참으로 많이 잤다. 눈을 뜨고 연습을 하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그 둘 뿐인 모습만이 은찬이 지켜볼 수 있는 그녀의 전부였다. 그녀는 정말로 행동패턴이 좁았다. 아니, 단순했다. 오직 예 혹은 아니오. 라는 선택기능밖에 심어지지 않은 기계처럼 그녀 역시 뇌 속에 연습 아니면 잠이라는 공식밖엔 주어지지 않은 기계같았다.

먹는 모습도 얼마 보지 못했다. 그녀가 온종일 먹는 거라곤 자그마한 음료수 한 병. 아무리 기계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전원공급을 해주는 물질은 있다. 하다못해 털털거리며 굴러가는 소형 자동차라도 기름 한 방울은 먹어야 바퀴가 움직이지 않던가. 그렇다고 해서 음료수 한 병으로 신체가 제대로 굴러갈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그녀의 연습량은 상당했고, 그녀는 능히 그 스케줄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기운이 솟는 걸까? 은찬은 문뜩, 모든 건 정신력-소위 끈기라고 말하던 코치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엔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대학 입학 한 학기 지나기 무섭게 끄나풀을 놓치든 연습을 놓아버린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그는 냉랭하기보다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마치 응당 그렇다는 듯이 교과서에 적힌 말을 줄줄 외워 읊어주는 프로그램처럼 지극히 무심하게-그래서 저 말이 지금 저를 채찍질하는 것인지, 의욕을 복돋아주려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무정하게 말했었다. 그 말이 새삼스레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 정신력의 차이인가? 인재들이란 그런 걸까? 독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저 조막만 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도무지 맞지 않는 말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올라 앳기가 빠지지 않은 볼따구나 화장기없이 수수해 전체적으로 새푸름한 안색에서나, 작은 아귀에도 비틀릴 듯한 목줄기나 얕게 솟아오른 쇄골뼈에서도.

매트 위를 굴러다니는 그녀는 오랜 시간 운동을 지속해왔던 여타 다른 이들처럼 그 운동에 맞게 신체가 개조된 양 팔다리가 길쭉길쭉했지만, 그에 비해 전체적인 체격이 남달리 왜소했다. 왜소했기에 되려 팔다리가 길어 보이는 착각이 이는지도 몰랐다.

미술품을 감상하는 이 마냥 그녀의 뺨, 눈두덩과 가느다란 손과 발을 그가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녀의 엉겨있던 속눈썹들이 파르르 떨리며 벌어진다. 감긴 눈이 열리며 붉은 눈동자가 그의 앞에 펼쳐진다. 깜빡인다. 물기 없는 눈동자가 빛을 머금어 감에 따라 또렷하게 변모해간다. 갑작스런 그 벌건 깜빡임에 그가 뒷걸음질 치던 그때, 그녀의 샛붉은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 미안.”

변태예요?”

……

역력한 적의에 은찬은 그저 뒷머리만을 긁적였다. 갑작스레 제 눈에 들이찬 시붉은 머리카락에, 그와 대조되는 무채색 검은 눈동자를 본 가람이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가람은 기분 나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화다닥 말을 내뱉었다. 마치 몸에 들러붙은 기분 나쁜 먼지를 털어내듯 탁탁, 손바닥으로 제 몸에 들러붙었을 그의 시선을 털어내고 있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당연히 기분 나쁘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자고 있길래 말을 걸 수가 없어서…….”

어물어물 단물 빠진 껌을 뱉어내기 아쉬워 연신 씹어내듯 말을 웅얼웅얼 뱉는 그가 가람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 그러시겠죠. 사람이 잠을 자고 있으면 그걸 지켜보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정말로 미안해요.”

사과는 그만하고 정말 미안하다면 좀 꺼져줄래요? 방해거든요.”

은찬의 어깨를 자그마한 손바닥이 힘있게 밀쳤다. 그 작은 손 어디에서 그런 강한 힘이 나왔는지 은찬은 떠밀려 작게 휘청거렸다. 그에 아랑곳없이 가람은 구석에 벗어던졌던 양말에 발을 끼우고, 운동화에 발을 넣고 끈을 옥죈다.

밥 먹으러 가요?”

아직도 안 갔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바라본다.

같이 먹을래요? 내가 살게요.”

어제도 분명히 말했죠. 내가 밥을 먹든 말든 댁이 상관할 바 아니라고.”

지치지도 않냐는 마음에 가람은 그를 있는 힘껏 날세워 쏘아본다. 은찬은 엷게 뺨을 긁고 있었고,

그렇게 적선할 대상이 급급하면 학교 앞 골목이나 나가보시죠? 길고양이 많이 돌아다니잖아요? 밥주면 좋다고 꼬리 흔들고 다가올 테니까. 아쉽게도 난 고양이가 아니라서.

……

한마디로 나한테 관심 끄고 꺼지라는 말이에요.”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달아나듯 그를 홀로 내버려두곤 출구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은찬은 잠시 뺨을 긁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결함이야. 분명한 결함이지…… 성격적 결함……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이던 그의 얼굴에 놀라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평소와 다르게 눈앞에 떠올라야했을 쨍한 백열전구는 온데간데없고 벌건 빛만이 빗발치고 있었다. 흐리멍텅했던 시야가 몇 번의 눈을 깜빡임으로 초점이 고여질 때,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제 망막에 맺혀들고 있었다. 빨간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그 사이로 곧게 솟은 가지런한 코 아래에 있던 입술. 그리고 검은 점.

적잖게 동요했던 모양인지 가람은 그날 저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음료수를 쥐어버렸다. 묘하게 패키지가 닮았던 탓에 값을 치르고 나와 뚜껑을 딸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입안으로 들어차는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식감에 가람은 당황해 그대로 땅으로 뿜듯이 액체를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운동화에 얼룩이 졌고, 기분 역시 얼룩덜룩한 보도블럭같이 질척임으로 가득해졌다.

신경질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음료수를 집어넣고 오늘 점심은 공쳤다는 생각으로 체육관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혹여라도 그가 매트 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평소에 애용하던 지름길도 버려둔 채로 에둘러 빙빙 돌아 시간을 적당히 때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했다. 애꿎은 녀석 때문에 한 시간이나 되는 연습시간을 낭비한 일에 가람은 혀를 차며 벤치 위에서 넋놓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맑았고 볕은 따사로웠다. 꽃샘추위를 이겨낸 꽃봉오리들이 이제 두툼하게 잎들을 부풀려가고 있었다. 제 머리 위로 흰 구름덩이들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표표히 흘러가고 있었다. 듬성듬성하게 흰 여백을 남겨두고 하늘색 크레파스를 미처 칠하지 못한 스케치북처럼 보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주변을 둘러보길 수차례 지속하다 문뜩 지루함을 느꼈고, 이쯤이면 그도 떠나갔겠지 싶었기에 체육관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도착한 체육관은 텅 비어있었고, 그제야 체증이 가신 듯 그녀는 크게 숨을 내뱉고 다시 한 번 매트 위로 발을 올린다. 작은 몸이 매트 위로 떠올랐다.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2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2


* au 설정 주의

* 찬가람도 들어가있어요. 



*



재회는 의도치 않게 이루어졌다. 어두운 도시의 전망이 멋들어지게 도배된 그 투명한 방 속에서.

왔어?”

중앙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매끄러운 붉은 공단 옷을 입은 둥그런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중앙에는 탁상보다 자그마한 크기의 원형 테이블이 걸쳐져 있었다. 새빨간 천을 씌어놓은 건 아마도 미각을 돋우기 위한 심산으로 보였다. 모서리라고 할 곳도 없이 둥그런 식탁의 둘레를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어느 순간 하얀 덩어리 앞에서 멈춘다.

백건.

하얀 그를 보고 검은 머리의 그는 마음으로 조용히 이름을 읊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이리와 앉아.”

은찬은 제 오른편이자 백건의 왼편인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현우는 뜸 들이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안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지긋하게 응시했다. 금빛으로 된 나무줄기-덩굴들이 벽지 위에 수놓아진 그 방은 얼핏 보면 싸구려 술집같은 느낌이 배어 나와 저도 모르는 새 제 몸으로 스며들 것만 같은 위화감이 일었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벽지로 가려지지 않은 건 입구에서 정면으로 위치한 유리벽 이였다. 외벽이 탄탄한 유리로 이루어진 그 방은 조망이 꽤나 좋았다. 특히나 오늘 같은 저녁, 하늘의 반은 짙푸른 물이 든 남빛 심해와도 같고, 나머지 반은 쇠퇴해가는 태양 빛으로 작렬하는 주홍빛을 띄고 있는 야색은 실로 출중했다. 현우, 그의 심미 의식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현우가 자리에 앉기 위해 의자를 잡아당겼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굳센 소리를 허공에 던졌다. 까끌까끌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손에 들고 있던 차키와 휴대폰을 왼편에 올려둔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은찬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건가요. 한가하게 밥이나 먹자는 건 아닐 테고.”

한가하게 밥 먹자는 거 맞아.”

은찬은 넉살 놓은 미소를 배시시 띄우며 웃는다. 그 가벼움에 현우는 헛웃음이 절로 내뱉어졌다. 행동거지가 너무도 가벼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은찬은.

저번 일도 있고 해서 불렀어.”

저번이요.”

우리 집에 가람이 보러 왔을 때, 내가 그냥 내쫓았잖아.”

그 재수 없는 강아지.”

현우가 이 방으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듣는 건의 목소리였다. 현우는 살짝 고개를 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단단한 옆얼굴은 시선에 미동조차 없다.

가람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마.”

제 아끼는 강아지에 대한 험담에 은찬이 불쾌감을 내비쳤다.

재수 없는 걸 어떡하라고.”

그 재수 없는 개 덕분에 이렇게 비싼 밥 얻어먹잖아.”

누가 사달라고 하디?”

백건. 미안하다니까?”

여타 어느 골목에나 가면 볼 수 있듯, 여섯 살배기 또래 아이들 사이의 실랑이와도 같은 대화를 들으며 현우는 지루함과 아찔함을 느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왼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대었다.

그래도 너 그 재수 없는 개 덕분에 내 도움받을 일은 있잖아. 안 그래?”

꽤 지긋하니 이어질 거 같던 말싸움은 은찬의 말 한마디에 맥없이 끊겼다. 깨끗하던 미간 위로 불쾌한 빗금을 하나둘 그어 넣은 백건이 단단히 팔짱을 꼈고, 은찬은 그와 달리 쾌활한 기분이 역력히 드러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튼, 저번 일은 사과할게. 미안하다.”

퍽이나.”

너 자꾸 그럴래?”

그의 단조로운 사과에 건은 콧방귀를 뀐다. 현우는 피식 이는 가벼운 웃음을 짓고,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정돈하며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양껏 먹어.”

양껏 먹으라고 해도……. 현우는 식탁 위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원형 테이블 각 가장자리엔 기름져 보이는 중화식 요리들이 늘어져 있었다. 기름기를 잔뜩 머금어 윤기 도는 탕수나 얄팍한 튀김옷을 입어 겉보기에도 바삭해 보이는 탕수육이나, 말린 열매 따위를 고추와 볶아 내놓은 음식이라던가, 죽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미안해질 정도로 느끼해 보이는 새빨간 냄비 속 멀건 액체를 바라보며 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먹을 만한 것이라곤 생뚱맞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뿐이었다.

실로 자연스럽게 그는 잔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투명한 유리잔이 미지근했다.

그 잘난 애완동물은 뭐하고 있냐.”

공통점도 유사성도 없는 세 사람의 만남의 대화는 겉도는 게 당연했다. 몇 번의 잔이 오가고 병이 기우는 새로 건은 문뜩, 유일하게 세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공통의 화제라고 할 수 있는 은찬의 애완동물에 관해 물었다.

집에 있지. 혼자서 외로울 텐데……

홀로 집에 두고 온 제 개에 대한 생각으로 풀이 죽은 그를 보며 건은,

걘 니가 없는 게 더 좋을걸.”

하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아니야. 가람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징그러워하는 거겠지.”

칭얼거리는 음성엔 물기가 어려 있다. 그런가……, 하고 말끝을 흐려 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은찬의 눈썹이 팔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따라 잔이 한 번 더 기울었다. 새까만 암빛으로 보이는 진한 액체가 투명한 유리잔 외벽을 따라 출렁거리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사라져 간다. 현우는 다시금 미간을 매만진다. 제 머리를 관통하는 따가운 통증을 느끼며. 웃음 하나하나가 매끄러운 가시가 되어 제 머리를 에워싸는 듯 한 통증에 현우의 미간이 쪼그라든다. 물을 먹어 쪼글쪼글해지는 한지처럼 가시를 먹어 구겨지는 미간.

건의 웃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은찬이 낮은 목소리로 짐짓 심각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

나 먼저 가볼게.”

갑자기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외투를 챙기는 그를 보며 건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걘 니가 없는 게 더 좋을 거라니까.”

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은찬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외로울 거야.”

말한다. 끝이 단단히 종결된 음절을 허공에 띄우는 그의 얼굴은 오랜 시간 공들여 숙려를 마친 수도승처럼 비장해 보였다. 현우는 조용히 제 빈 잔을 채운다.

먼저 갈 테니까 재미있게 놀아.”

건은 답응하지 않는다. 친우의 변덕스러운 태도에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바람맞는 일엔 아직은 익숙지 않은 듯도 보였다. 하기사…… 은찬의 변덕은 쉬이 맞출 물건이 아니기도 했다.

바지런히 손을 움직여 단추까지 곱게 꿴 그가 미련 없이 문밖으로 사라질 거라고 믿었는데,

오늘 또 먼저 가서 미안해.”

하며 현우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 손을 떨쳐내려는 양 그는 어깨를 가볍게 튕기며,

뭘 새삼스레.”

말했는데, 은찬은 빙그레 웃으며,

분명 재미있을 거야.”

하며 다시금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놓았다. 마치 단단한 담금질처럼 어깨를 지긋한 악력으로. 턱을 들어 힐끗 훑어본 그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고, 고개를 돌린 탓에 일직선으로 놓여진 조명이 눈이 시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마에 주름이 걸려있다.

 

, 닫히는 문의 잠금쇠 걸리는 소리로 방은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침묵을 고요를 깨는 건 물 흐르는 소리, 건이 제 빈 잔을 채우는 소리이다. 투명한 유리 면을 거침없이 타고 흐르는 짙은 액체는 또한 거침없는 손놀림을 따라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제법 병을 비워냈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건을 보며 현우, 그 역시도 조용히 잔을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화젯거리라곤 없었다. 정적과 술 흐르는 소리가 번갈아 부드럽게 울리는 방 안에서 두 사람은 멍청히 잔을 들고, 술을 마시고, 마시고, 거듭 마시는 일만을 반복한다. 목구멍을 넘어 위장까지 축축하게 알코올에 절여지는 느낌이 들어 현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까지도 건은 표정 하나 변함이 없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테이블 위 올려둔 차키를 챙기며 현우는 이 식사의 끝을 먼저 알렸는데, 그 말에 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마주치니 알 수가 있었다. 변함이 없는 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미약하게 떠진 눈, 덕분에 아래로 휘어지는 속눈썹이라던가, 테두리가 부옇게 뜬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거리며 저를 쳐다볼 때 현우는 그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너 술 마셨잖아.”

하나 더 추가. 발음이 늘어진다. 취한 모양이었다. 빨갛게 젖은 눈으로 저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진득했다.

그렇죠.”

그럼 운전 못 하는 거 아니야?”

말끝은 높은음이다. 흥얼거리는 콧소리를 닮았다.

대리운전을 부르면 되겠죠.”

자고 가.”

손등이 따뜻해졌다. 건의 손이 그의 손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이 위에 호텔이다?”

손바닥을 타고 미지근한 미열이 스멀스멀, 제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현우는 이맛살을 작게 찌푸렸고 그 탓에 실눈을 뜨는 양 검은 눈이 작게 줄어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건은,

.”

하고 부른다.

나랑 잘래?”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적시며 물어온다.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5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5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5

 

월요일 오후, 한주의 시작답게 책상 위에 가득 올라있던 각종 교무처 서류들을 말끔히 해치운 은찬은 체육관으로 향했다. 책상을 깨끗이 비웠음에도 얼굴에 개운함은커녕 비 오는 날 축 처진 개처럼 그늘져있었다. 그의 그늘의 연유는 딱 하나였다.

청가람’.

곁에서 챙겨줄 이 하나 없을 정도라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 이틀간 은찬이 지켜본 결과는 그랬다. 딱히 외적인 결함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결함은 내부에 기인하고 있는 거겠지…….

썩 그렇게 믿음직스런 인물이 아님이 분명한 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한다고 했을 정도면 응당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물건일 게 분명하다는 게 은찬의 생각이었다. 우선 아무리 개인 종목이 활성화된 운동을 하고 있다 한들, 체육과 특성상 그들은 떼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방임 되는 대상이란 없었다. 그런 무리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청가람, 그녀의 결함 때문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육체를 소모하는 과 특성답게 대다수가 활기차고 넉살이 좋아 처음보는 이에게도 낯 부끄럼 없이 술 한잔을 얻어먹을 정도로 외향적인 게 태반이다. 내성적인 이도 간혹 있었으나, 바람에 펄럭거리는 체육복만큼이나 오지랖을 펄럭거리는 이들은 동기사랑 나랑사랑이라는 구호 아래서 겉도는 그들에게 관심이라는 구호품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으니 말이다. 서로간의 유대나 우정을 강조하는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강압은 아니었다.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관심과 애정을 서로에게 쏟으며 단결하는 분위기가 무리의 특징이었다. 적어도 은찬이 현역일때는 그랬다.

그녀 앞에 붙어있는 인재라는 이름표가 문제였을까? 그 인재라는 말은 실로 모두에게 껄끄러운 딱지와도 같아서, 미움을 받는 이들이 몸에 붙이고 다니는 아니꼬움과도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부여받은 가격표와도 같이 높은 자신의 상품가치만큼이나 미움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종종 그런 엘리트들도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숨만 쉬어도 모두의 시기와 동경과 질시, 질투를 받는 점이 그들의 특성이었다. 그 와중에 폭탄 하나를 터트렸다면……. 응당 엘리트라고 하면 모두가 고질적으로 갖고 있는 편견처럼 그녀 역시 도도한 콧대를 휘날려 미움을 받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가 고립되는 건 아마 시간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가람이 미움을 받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은찬의 추리가 너무나 앞서나간 판단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야 그럴게, 가람은 정말로 혼자 있던 것밖엔 없었다. 혼자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연습했다.

개인 기록이 중요시되는 종목이다보니 개인훈련을 고집하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 체육관에 있어도 그녀는 그녀대로,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대로 훈련을 했을 테니 말이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오롯이 스스로에게만 몰두하기 위해 개인 훈련만 고집했던 이들도 몇 있었다. 멀쩡하던 이들도 슬럼프에 빠지거나 시합을 앞뒀을 땐 앞다투어 홀로 독방에 갇힌 죄수마냥 개인 훈련에만 몰두하였으니 말이다. 은찬 역시도.

은찬은 과도한 추론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아직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편견을 지니고 접근하는 건 제가 보기에도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같았고, 미리서부터 겁먹을 필요조차 없었다. 인재든 뭐든, 청가람도 결국 저와 같이 인간일 테니 사자처럼 저를 잡아먹을 리도 없을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질질 늘어진다.

체육관 앞까지 도달하는 데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느긋하게 풍경 하나하나를 마음에 그려 넣듯 은찬은 시선을 뿌려대며 느긋이 걸었다. 결국 은찬은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손톱을 세워 문고리를 긁던 그는 결심한 듯 문고리를 돌렸다. 문고리를 돌리던 순간, 문득. 생각했다.

도무지 저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청가람이 제게 무거운 짐이면 어떡하지, 버거울 때 벗어던질 수 있는 짐인가. 저울질하는 새, 문은 열렸다. 가람의 시선이 제게 강렬히 꽂혀오고 있었다.

 

*

 

안녕?”

마침 가람은 매트 위에서 홀로 옷단을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검게 차려입었던 저번과 다르게 오늘은 진한 회색 민소매 상의에 진한 검은색 레깅스 차림이었다. 무릎 아래론 훤하게 드러나 있다. 그 덕에 허리 아래로 뻗어져 내려가는 골반이나 엉덩이, 탄력 진 허벅지에 자꾸만 눈길이 꽂혔다.

청가람……, 맞지?”

선홍색 눈동자가 빛 아래서 반짝였다. 찌푸려지는 미간, 매끄럽게 휘어 올라가는 외 입초리. 보조개가 살짝 패인 그 얼굴 위 두 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역력한 적의였다.

기자라면 꺼져요.”

연습하던 중이야? , 혹시 방해니?”

인터뷰 안 해요.”

인터뷰 아닌데…….”

무안한 은찬은 귓불만을 매만진다. 가람은 그에 아랑곳없이 은찬의 한쪽 어깨를 퍽 밀치곤 매트 끄트머리에 널브러져 있던 수건을 탁탁, 먼지까지 일으키며 털어댄다. 은찬은 한발찍 더 당겨 가람에게 다가갔는데, 그때 가람은 슬쩍 뒷걸음쳤던 듯도 하다.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바지에 손바닥을 쓱쓱 비벼 땀을 닦은 은찬은 악수를 청할 요량으로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살갑고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걸었기에 상냥한 감이 역력했다.

체교과 조교 주은찬이라고 해요. 지금 바빠요? 괜찮으면 이야기할래요?”

댁은 시간이 넘치시나 보네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살갑게 대하는 은찬과 다르게 가람의 태도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내민 손도 냉랭히 무시한 채 지나쳐간다.

, 아니면 있다가 밥 먹죠? 같이 밥 먹을래요?”

제 밥을 댁이 왜 신경 쓰시죠.”

말했잖아요. 이야기하자고.”

조교님께선 시간이 많나봐. 전 시간이 없어서 댁이랑 볼일이 없겠네요.”

지속되는 상냥한 목소리에도 날이 선 답만이 되돌아와 꽂힌다. 한쪽에 서 있는 그는 무시한 채 가람은 손목을 비틀고 팔꿈치를 주무르고 매트 위를 가지런한 몸놀림으로 한 바퀴 구른다. 마치 불청객 쫓아내듯 은찬을 뒷걸음질 치게 거리를 좁혀온다. 이윽고 쭉 내민 그녀의 팔줄기가 은찬의 콧등을 스치고 지나쳤을 때,

방해니까 꺼져줄래요?”

가람의 체취가 훅 밀려들어 왔다. 빨간 눈이 은찬의 눈동자 속으로 정확히 맺혔다. 결함이군……. 은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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