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뜻밖의 차가운 비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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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차가운 비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간밤엔 크게 뒤척이며 종래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얼핏 선잠에 들 듯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문지방을 뚫을 기세로 세차게 땅을 두들겨 패는 빗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곤히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눈을 떴지만, 이불을 털고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가람은 멍청하게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제 옆에서 뒤척이는 기척이 일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가람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엊저녁에 마당에 널어두었던 빨랫가지를 걷어야만 했다. 이미 물에 젖어 죽은 시체의 혀처럼 축 늘어져 버렸을지라도. 한시라도 급히.
일렬로 늘어진 채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빨랫가지들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한 손으로 우산을 쥔 채 남은 손만으로 집게 따위를 떼어내며 물먹은 천들을 걷어내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간간이 얼굴엔 빨래에서 튄 물방울, 우산 가장자리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 바람을 타고 뺨 위로 질척이는 빗물 따위가 들러붙고 있었다. 가람은 미간을 살풋 짓구기며 얼굴을 닦아본다. 축축한 손으로 얼굴을 닦다 보니 물을 끼얹는 것과 매한 마찬가지였기에, 물기 어린 얼굴은 그대로였다.
거둬낸다고 나름 힘을 써가며 옷가지들을 추스른 것치고는 상당량의 티셔츠나 바지 따위들이 빨랫줄 위로 줄지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람은 다시 한 번 축축한 제 이마와 콧잔등을 손등으로 훔쳐내 본다. 눈 안으로 빗물이 파고든 탓에 앞이 짙은 증기에 휩싸인 양 희뿌옇다. 비는 좀체 그칠 생각을 않는지 다닥다닥대며 거세게 지면과 우산을 때려온다. 흙탕물이 튀었다. 우산 위로 긴 빗줄기들이 투박이는 통에 가람은 그 소리에 마치 제가 두들겨 맞는 착각이 일었다. 눈을 다시 한 번 끔뻑여본다.
바지런히 손을 놀려야겠다. 지체없이 가람은 옷가지를 빨랫줄에서 떼어낸다. 그 틈 사이로 팔뚝에 걸려있던 바구니가 출렁이며 그 안에 옷가지가 들어찼다. 이어 두 번, 세 번의 기우뚱. 저는 아직 줄에서 옷을 끊어내지 못했는데 무슨 영문일까. 고개를 들자 어느샌가 주은찬이 곁에 서 있었다. 언제 제 곁에 성큼 다가와 서 있던 걸까. 멀찍하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가람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손을 놀리는 은찬의 옆얼굴이 보였다.
"뭐하는 거야?"
"그냥."
가람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바구니에 다시 무게가 실리는 바람에 팔이 저렸다. 그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은찬은 가람의 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비오는 소리에 깼거든. 마당에 나왔더니 네가 빨래를 걷고 있기에."
"그러니까 왜."
"도와주느냐고? 여기에 내 옷도 있잖아."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소리도 거세져 간다. 비에 때려 맞은 진탕물이 자꾸만 튀어 오른 탓에 은찬의 바지 아랫단과 운동화 뒤축이 진한 흙색으로 변해있었다. 진흙으로 물들다 못해 잿빛으로 변해버린 밑단을 보며 가람은 고개를 돌렸다.
타인의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마치 저를 향해 동정하듯 적선하는 무의미한 친절이라던가, 이리저리 충돌해 부딪쳐오는 흥미 위주의 호기 따윈 가람에게 있어 방해물이나 다름없었다. 가람은 언제나 그러한 방해물들을 능숙히 피해왔으며, 그것은 중앙에서도 여타 다를 바 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상정치 못했던 변수로 '주은찬'이 작용하고 있었을 뿐.
어느 날부터 텁텁한 모래알, 버석거리는 낱알들을 실수로 씹어 삼킨 듯 주은찬의 행동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단단한 생선 가시, 혹은 까끌까끌한 모래가 목구멍 안쪽을 거세게 할퀴고 지나가는 것 마냥, 주은찬의 과도한 친절들이 가람의 목을 메이게 했다. 그 집요한 친절에 가람이 불만을 표할 새도 없이 은찬은 언제나 '그냥'이라는 말로 대답을 욱여넣곤 하였다. 둘 사이 균열에 채워지는 '그냥'이라는 무의미한 말들.
저녁 찬을 준비하는 제 근처로 다가와 어깨너머로 기웃거리며 도와줄 것 없냐고 묻는 말 뒤에 따라오는 '그냥', 티비를 틀어놓은 채로 빨래를 개킬 때면 능글맞게 다가와 웃으며 제 눈치를 살피며 심심해서라는 말 뒤에 들러붙는 '그냥'이라는 말. 한 큰술의 밥알을 목 뒤로 떠넘길 때 제게 꽂혀오는 시선에 변명하듯 덧붙이는 그 '그냥'과 이따금 시선이 교차할 때면 멋쩍은 듯이 넘기려는 궁여지책의 '그냥'이라는 말.
점칠 되는 무의미한 그 말, 필시 '그냥'이라는 말은 없다. 분명. 뭔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진위를 알 수는 없었지만 가람은 그 안에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호소하는 제 직감을 믿기로 정하였다.
주은찬에게 있어서 '그냥'이란 없었다. 중앙에 있어서 주은찬의 '그냥' 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건 오롯이 청가람, 저뿐이었다.
현우의 부탁을 들어줄 때도, 도움을 줄 때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요구해온다. 손 하나 까딱해서 넘겨주면 될 리모콘을 건네줄 때도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가령, 그럼 오늘은 내가 방 안쪽에서 잔다? 라거나, 내일 아침은 네가 이불을 개키라는 말 따위로 대가를 독특히 받아내곤 했다. 제 절친한 친우이자 소꿉친구인 백건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무조건 꽃게탕이라던가, 제가 좋아하는 해물 반찬을 내세운다거나.
그러나 유독 저에게만은 대가를 요구해오는 일이 없었다. 뭣보다 가람, 스스로가 부탁을 하지 않았으니까. 응당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도와주겠다는 말로 다가온 은찬의 손가락과 가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덕분에 설탕통이 엎어지고 말았고, 씽크대는 입자 고운 싸라기눈이 내리기라도 한 양 새하얀 눈밭이 되고 말았다. 가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설탕을 도로 퍼담을까 하다 묵묵히 물로 쓸어내렸다. 녹진한 덩어리들이 개수구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 뒤에서 꼬리 내린 채 제 눈치 보기 바쁜 은찬을 향해 가람이 물었다.
대체 왜 그래. 짜증으로 담금질 된 날카로운 말을 가람이 매섭게 내뱉었다. 도와주고 싶어서. 은찬은 능숙한 웃음으로 처세했다. 그러니까 왜 도와주고 싶은 건데. 그냥. 또 그놈의 '그냥'이다.
"이 세상에 그냥이란 건 없어. 무슨 속셈이야."
정말로 별다른 속셈은 없는데, 그렇게 대답을 흘리는 은찬이 뺨을 구기며 웃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 해."
정말 별 뜻 없는데. 맥아리 없이 울리는 대답이 개수구를 타고 흐르는 설탕 덩어리에 막혔다. 약간의 뜸을 들인 은찬이 '실은', 하고 운을 떼던 순간 가람은 속으로 그럼 그렇지 했다. 속셈이 없을 리가 없었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거창한 대답이나 속셈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바보스럽고, 멍청한 그 대답에 가람은 자칫 휩쓸리듯 그래?하고 수긍할 뻔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 없어."
다행스럽게도 딱 잘라 끊어낼 수 있었다. 왜? 뒤는 당연히 물음이었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던진 거야? 안 들어도 빤한 대답을 주은찬은 제 귀로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쓸모없고 성가셔. 거슬리거든."
착 가라앉은 가람의 음성에 은찬은 그저 웃음기 어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왜."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흘낏, 가람의 안색을 살피며 은찬은 침이 마른 듯 제 입술을 혀로 가벼이 훑었다.
"친구 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는데."
"나도 너랑 친구 놀이 하자는 건 아니야."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니, 친구는 또 아니란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주은찬의 뜻 없는 '그냥'처럼 이 역시도 별다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며, 가람은 미심쩍은 마음을 못내 털어내었다. 거짓말처럼 설탕들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개수구를 바라보며 가람은 다시 한 번 수도꼭지의 물을 틀었다. 가람이 네모난 싱크대 구석의 미처 씻겨나가지 못해, 딱지처럼 굳어버린 원추형 설탕 덩어리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가람이 녹진한 설탕 때를 발견하기 직전, 혹은 그것을 철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며 뜨거운 물을 제 손등과 손목에 퍼붓기 전, 공기 중으로 비상하는 온수의 증기에 이마와 콧잔등이 젖던 그때, 그래서 가람이 못내 손등으로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참이나 공들여 꼼꼼히 닦아내기 전, 전화가 울렸다. 불시의 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보세요, 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가람이니? 하는 여인의 맑은 음색이 수화기를 비져나왔다. 가람은 무음으로 응답했다. 수화기를 쥔 채로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들을 요량이었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려넘기던 가람의 정신을 번뜩 들게 만드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뵈었니?
무슨 말이냐고 영문을 묻기도 전에 그녀가 제 입으로 술술 불고 있었다. 며칠 전에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것, 돌아가는 길에 중앙에 둘러 너를 보겠다고 말해 기뻤다, 네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특해 하는 눈치였다, 기대된다며 열심히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는 설탕 범벅의 소음들을. 너무도 허무맹랑한 하얀 거짓말들을 가람이 믿을 턱이 없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가람은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두었다.
애당초 그가 내게 기대라던가 실망을 할 위인이었던가. 기대한다는 말 따위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의 안중에 가람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너무도 견고한 무관심의 장벽이 가람과 애비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얼떨결에 받아지게 된 짐짝, 제 유일무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있어서 '어미'라는 이름의 부당한 짐을 짊어주었기에 그가 가람을 향해 베풀 애정 따윈 당연히 없었다. 그녀는 '어미'가 되어선 아니했다. 오롯이 제 사랑하는 연인이었어야지.
잘 포장된 도로 위로 불쑥 튀어 올라 제 발을 걸어 넘어트린 돌 같은 불청객, 너무 작고 사소해 별 볼 일 없고 변변찮은 물건으로 그는 가람을 대해왔다. 혹은 지나가다 주운 공돈. 그리 넉넉지 않아 운이 좋다며 기쁨을 표하기도 시원찮고, 버스 한 번 타는 편리를 누리기에 적당한, 딱 그만큼의 가치가 가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지상행 열차 편도 표를 딱 한 번 끊을 수 있는, 액수의 자신. 그래, 가람은 그의 편도 표였다. 열차를 타기 전까지는 못내 소중한 물건인양 손안에 꼭 쥐고 몇 번씩이나 들여다보며 확인한 주제에 열차에 발을 올리는 순간이면 주저 없이 휴지통에 버려버리는 그러한 것.
그게 가람과 아버지의 인과였다. 가람은 사랑을 원했고, 아버지 또한 사랑의 곁에 머물 시간이 필요했다. 가람은 애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아버지는 하루속히 가람이 하늘에 올라 저가 내려가길 기대했다. 사실, 여기에도 기대라는 말 따위가 꿰차고 앉아도 되는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지만.
전화는 명백한 또 한 번의 확증, 확인사살이었다.
가람은 스스로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좋아해 주리라 믿었다. 애정이 어린 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록 위선투성이일지라도, 그 위선에 들러붙은 부스러기에 불과한 정 정도는 받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머니를 향한 저 눈동자가 아주 잠시라도 제 얼굴 위에 머무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그런 날을 어린 가람은 꿈꿨었다. 그런 가람을 향해 아버지는 너무도 흔쾌히 약조를 해왔다. 네가 사신강림만 성공한다면, 청룡이 된다면. 응당 그리하리라. 그러한 약조를 대가로 약속했었다.
어린 가람은 어리석고 아둔하게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 허물에 불과한 허상의 약조를 맹목적으로 맹신했다. 매일 밤, 꺼진 가로등불을 대신하는 달을 벗 삼아 집으로 돌아갔다. 새까맣게 변해버린 하늘을 바라보다 반짝이는 별도 언뜻 눈에 담았던 것 같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름보다 더 위, 하늘이란 곳에서 땅을 내려다본 그와 우연찮게 눈이 마주치는 일이,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를 찾게 되는 날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못내 바랬던 것 같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 연습실 바닥에 누워 뒤섞이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을 보다가도, 저물어가는 붉은 낮과 솎아지는 푸른 밤을 보면서도, 밤낮을 바꿔가면서까지 일상의 모든 초점을 아버지를 향한 애정의 갈구에 맞추었었다.
물론 지금 와 돌이켜본다면 그만큼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어긋나버린 이 시점에서 그 노력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가람은 수세미로 거칠게 씽크대를 문지른다. 철에 비벼진 손바닥이 쓰렸다.
세상에 이유가 없는 행동은 없었다. 모든 것에는 마땅한 인과가 있다. 하다못해 가을철 떨어지는 낙엽에도 봄에 싹을 틔웠기 때문에 지게 되는 인과가 있었고, 썩어 문드러지는 과실에도 열매를 맺었다는 원인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주은찬은?
마냥 소꿉장난이나 치자는 건 아닐 텐데, 무슨 연유로 이토록 제게 '그냥'이라는 말로 겹칠 된 친절을 베풀어오는 것일까. 무슨 속셈으로, 꼼수가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처럼 제 손등을 부러 스치듯 어루만지고 지나치는 손길에도.
"소꿉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거 괜찮네. 음, 그럼 가람이 네가 내 마누라야?"
"웃기지 마. 꺼져."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한다.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질긴 시선을 느끼며 가람은 묵묵히 프라이팬을 달군다. 머릿수에 맞춰 계란을 꺼내는데 주은찬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양 입술을 달싹인다.
"오늘 계란후라이야?"
"어."
"난 계란말이가 더 좋은데"하고 뜻 없이 말을 흘린다. 누가 지가 바라는 반찬을 말하라 했던가, 꿈도 크다. 콧방귀를 치며 가람은 실수로 유리그릇에 계란을 깨 넣었다. 그 작은 충격에도 노른자가 볼품없이 깨져버렸다. 어쩔 수 없지, 계란말이를 해야지.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실수다.
"계란말이 해주는 거야?"
침묵하는 가람의 귀 위로 '기쁘다'하는 탄성이 덮여 쓰였다. 순진한 웃음소리를 등 돌린 채 가람은 이마와 뺨을 연신 쓸어내렸다.
언제부턴가 시선에 익숙해져 크게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 주은찬으로 하여금 제약되는 행동반경의 불편함은 뒤로 제쳐놓게 되었다. 뭣보다, 주은찬이 자아내는 소음에 유습해진 탓도 있으리라.
제가 요리를 할 때 누군가 곁을 지키고 있던 적은 없었다. 그 낯선 괴리감이 가람을 주춤거리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귀를 때려오는 은찬의 자잘한 음성을 가람은 언제부턴가 기다리게 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 빨간 뒷통수와 그림자를 눈으로 더듬어가며 찾곤 하였다. 더러 은찬이 넋을 놓고 티비를 볼 때, 백건따위와 실없는 농까지 던져가며 환하게 웃음을 터트릴 때가 그러했다. 너무 필요 이상으로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가람은 은찬의 웃는 낯에서 면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꾸만 제 뺨과 귀를 두들겨치는 젖은 소리에 가람은 눈을 떴다. 빨래를 널고 잠깐 쪽잠이나 잘까 싶어 눈을 붙였던 것이 두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눈을 뜨니 환한 볕이 내리쬐는데도 굵은 빗방울이 땅을 패고 있었다. 풀이 젖는 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생각나 가람은 신발에 마구잡이로 발을 구겨 넣으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얼룩이 패인 빨랫감을 한바탕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비에 젖은 몸이, 천 더미가 무거웠다. 땀과 비에 젖어 들러붙은 앞머리를 손등으로 훔쳐낼 때, 거짓말처럼 제 머리 위로 비가 멎었다. 분명 귓전을 때려오는 빗소리는 여즉한데, 하늘이 토해내는 잘긴 빗방울도, 바닥을 툭툭 때려가는 빗소리도, 제 눈앞에서 물들어가는 빨래도.
묘하게 어두워진 제 머리맡의 그늘을 올려다보던 가람은 낯익은 손등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제 비를 거두고 그늘을 드리운 건 교복 마이인 듯하다. 푸른 천을 쥔 그 손가락, 손목, 팔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은찬의 웃는 낯이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
"비가 오길래."
물방울이 뺨에 달붙는다. 주은찬의 머리칼에도 물방울이 맺혀있다. 빨간 머리를 타고 흐르는 투명한 원이 색과 모양을 달리해가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구슬이 눈꺼풀에 맺혔다. 눈을 깜박이자 빨간 속눈썹에 맺혀있던 물이 힘없이 미끄러지며 상기된 볼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눈이 마주친 주은찬이 웃고 있었다. 은찬의 붉은 속눈썹을 때리며 투닥이던 빗소리가 가람의 가슴을 때리고 지나갔다.
집안으로 돌아와 빨래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여기저기 얽히고 설킨 실타래같은 눅눅한 빨래들을 잡아 풀며 가람이 몸씨름을 할 때, 은찬은 제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자박이는 소리를 따라 바닥 깊이 진하고 뚜렷한 발자국이 찍힌다. 잦아들었던 발소리가 다시 크기를 높이었을 때, 가람의 머리 위로 수건이 둘렸다.
"감기 걸리겠다."
그렇게 말하고 멀어져가는 제 앞의 젖은 등을 향해 가람은 물끄러미 시선을 던진다. 비에 젖어 티가 몸에 달라붙은 탓에 곧은 날개뼈가 선연히 도드라지고 있었다. 등을 돌린 은찬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 일도 없었다. 가람은 손에 들린 빨래들을 정리하다가 놓고 하염없이 등을 바라보다 다시 빨랫감을 집었다가 놓아버리면서 은찬의 등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사람의 뒷모습은, 때때로 보는 이로 하여금 쓸쓸한 기분이 일게 만들었다. 이건 머리로 익힌 것이 아닌 오랜 세월 가람이 스스로 터득한 감정이었다. 은찬의 뒷모습은, 문득 가람의 마음에 스산한 외로움을 던지고 있었다. 가람은 눈을 비빈다. 은찬의 등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제법 다부진 구석이 있어 뵌다. 곧은, 등뼈의 굴곡을, 바라본다.
차라리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었으면 한다. 저답지도 않게 괜한 무게를 잡고 있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꺼풀을 다시 비볐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돌아보지 않는다. 왜 그런지, 제게 매몰찬 등을 보여주던 제 아비가 생각났다. 자조적으로 한쪽 뺨을 끌어당기자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나.
"물 떨어지잖아."
나보다 제가 더 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주제에 다가와 둘러졌을 뿐인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온다. 부드럽게. 닦는다기보단 작은 동물을 품에 넣고 쓰다듬에 더 가까운 동작이었다. 손길을 받으며 가람이 다시 한 번 눈을 세차게 비비자 눈꺼풀 안으로 밤하늘이 맺혔다. 달의 볕도 듣지 않고 별 하나 보이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밤이었다. 그날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람은 홀로 걸었고,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넘어져 손바닥이 까졌었다.
데였다고 인지도 하지 못했던 손바닥이 쓰려 왔다. 손바닥을 꿈 움켜쥐며 비집고 나오려던 울음을 참아내 본다. 그날, 울음을 토해내었던지 아니면 묵묵히 손바닥을 털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지, 바지에 비비며 상처를 달래었던지는 이제 까마득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처럼 주은찬을 껴안지는 않았으리란 것이다. 확실했다.
젖은 등에 매달려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다, 네가 상냥하게 대해서라고. 주은찬의 탓이야. 친구니 소꿉놀이니, 자꾸만 곁에서 찡얼거리니까. 그 탓이라 말해본다.
얼굴에 또 한 번 짙은 비가 내린다. 미묘한 감정으로 물든 눈동자로 은찬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게 구겨진 미간으로 젖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던 은찬이 나지막한 한숨을 토했다. 은찬의 한숨에 따라 가람의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목보다 더 안쪽,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음습한 소리가 혀 위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할래? 소꿉놀이."
은찬이 가람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랑 소꿉장난하고 싶어서 잘해주는 거 아니야? 까짓거 한번 해줄게."
이 뒤엔 걸리적거리지 마, 그 말이 혀끝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은찬은 가람을 품 안으로 끌어당겨 동을 토닥여온다. 잔뜩 골이 난 어린아이를 달랠 때와 같은 동작으로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가람은 그 품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파묻었다. 은찬의 손가락이 제 뺨을 쓸다 턱에 내려앉는다. 얼굴의 가장자리를 더듬던 그 손길이 턱 끝에 머물던 순간, 두 입술이 맞닿았다. 저를 감싸고 있던 허물이 벗겨져 나감을 느끼며 가람은 조심히 혀를 입 밖으로 내밀어 본다. 습하고 축축한,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이 또 한 번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땀과 물기로 끈적이는 살을 맞붙인 채로, 가람은 선잠을 잤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켜 세울라치면 은찬이 다시 끌어당겨 품곤 하였다. 칭얼대는 아기를 도닥이든 등까지 두들겨가면서.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가람이 이내 성내듯 몸을 일으켰다.
"이거 놔."
간밤 사이에 청개구리로 탈바꿈하기라도 한 양, 놓으라는 제 말에 더더욱 어깨를 세차게 옭아매며 제 품으로 이끈다.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귓속으로 부드럽게 말을 속삭인다. 청가람.
"역시 좀 더 해줘, 소꿉놀이."
"내가 왜?"
"그냥."
주은찬은 또 그냥이라 뱉는다. 한 번 뿐이라고 했잖아, 싫어, 라고 거칠게 내뱉는 가람의 얄미운 입술을 깨물어온다. 숨이 막혔다.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역시 세상에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가람의 목덜미에 은찬은 제 뜨거운 입술을 대고 맞비빈다. 그 낯간지럽고 달뜬 동작에 가람은 문뜩 토기가 일었다. 은찬의 손이 가람의 허리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부디 떨쳐내지 않길, 망설임이 가득 담긴 동작이었다. 혹시라도 놀라 걷어내고 도망칠까 두려워 조심스럽고도 천천한 손놀림. 가람은 그 손등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주은찬의 품에 안겨있는 걸까. 조용히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어본다. 그런 제 손등을 다시 한 번, 은찬이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터져 나오려는 역기와 딸국질을 삼키며 가람은 다시 눈을 감는다. 주은찬이, 주은찬이 자꾸만 치근덕거리니까, 어쩔 수 없이 상대해주는 거야. 그것뿐이다.
은찬의 연한 손길이 다시 한 번 가람의 등을 토닥여온다. 가람은 그 안에서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간만에 너무도 편안히, 단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감은 눈 안엔 삽시간에 밤하늘이 일었다. 그 짙은 쪽빛 하늘엔 형형색색의 별이 빛나고 있었고, 더불어 제 손을 맞잡은 누군가가 다정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그 다정한 눈과 뺨, 미소짓는 입술과 마주친 순간이 있었다. 홀연,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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