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우리 사귀자

 [은찬가람/찬가람] 우리 사귀자

*au 설정 주의

*평범한 학생물이 보고 싶어서 쓴 찬가람.



주은찬은 나에게 다짜고짜 사귀자고 말했다. 마치 처음 보던 날, '안녕, 나는 주은찬이야'하고 자기소개를 하던 평탄한 목소리와 평범한 얼굴로.



 

그날은 다섯 번째 복도청소를 하는 날이었고, 평소처럼 신경질적으로 대걸레를 빨았던 탓에 옷에 큰 얼룩이 져버렸고, 더불어 가람의 미간에도 큰 주름이 진 날이었다.

방과 후 하교 시간을 한참 넘긴 후였기에 복도엔 사람의 인영 하나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반쯤은 불이 꺼져 어둑어둑해진 복도 끝에 가람이 짝다리를 짚은 채로 한참 동안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째려보고 있다 한들, 바닥이 슬슬 제 눈치를 보고 굽신거리며 절로 깨끗해질 리도 없었기에 가람은 대걸레를 질질 끌며 복도 끝 모서리로 자리를 옮겼다.

매일매일 닦아내고 닦아내도 좀체 깨끗해질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되려 다음날이면 말짱 도루묵이 되다 못해 한층 더 두껍게 신발때가 끼는 바닥이 짜증 났다.

오늘도 얼룩덜룩한 바닥을 노려보는 가람의 입에선 절로 '짜증나' 가 튀어나온다. 애꿎은 바닥에 화풀이하며 대걸레로 힘차게 바닥을 북북 문지르고 있는 가람의 앞으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왔다. 가람은 고개를 들어 발걸음 소리의 주인을 확인한다, 주은찬이었다.

"오늘도 벌청소?"

그렇게 말하는 은찬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내비칠 새도 없이, 은찬의 뒤로 줄줄이 이어진 실내화 자국이 눈에 띈다. 애써 깨끗하게 발자욱을 지워뒀더니, 고새를 못참고 그 잠깐의 걸음으로 얼룩덜룩해진 바닥을 보는 가람의 미간 주름이 한층 더 짙어져 버렸다. 분노로 깊게 패인 미간으로 가람이 짜증을 삭혀가며 문질러 닦자, 은찬이 걸레질을 피하며 걸음을 옮긴 탓에 반대편에 다시 발자국이 새겨진다. 찌걱이며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실내화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때리는 대걸레의 울음이 번갈아 몇 번인가 울렸을 즈음, 가람이 신경질적으로 걸레를 내팽개쳤다. 더불어,

"아, 쫌!"

하는 큰소리의 짜증도 함께.

그 모습을 보던 은찬이 뭔가 좋은지 홀로 실실 쪼개기 시작했다. 분을 삭이지 못하던 가람은 '넌 이게 웃겨?'하고 몇 번 인가 짜증을 내며, 발을 굴러 바닥을 때리기 시작한다. 이어 하얀 시멘트벽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발바닥으로 내려 찼다. 하얀 시멘트벽에 찍힌 제 검은 발자국을 보며 아차 싶었지만, '설마 벽까지 닦으라고 하겠어?'하는 마음에 가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세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그래도 이내 '설마'에 대한 불안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기에 제 발을 거두었다.

"진짜 짜증나."

제 손으로 내팽개쳐버린 대걸레를 집어야 하는 일도, 그러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도, 무릎을 굽혀야 하는 것도, 더불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주은찬의 발자국, 주은찬도 모두 다 짜증이 났다. 한층 더해진 짜증이 다시 한 번 가람의 미간을 깊게 팼다.

"자, 여깄어."

그러나 그런 모든 짜증이 무색할 치만큼 주은찬의 음성이 나긋나긋하니 다정했다. 모든 짜증을 삼켜내며 가람이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은찬이 먼저 대걸레를 주웠던 것이다. 그 음색에 이끌리듯 얼떨결에 가람은 건네어지는 나무봉을 쥐었다. 제일 먼저 닿은 것은 은찬의 손가락이었다. 손바닥 안으로 딱딱한 나무의 감촉이 차올랐고, 제 손가락-손등은 차가운 손가락이 움켜쥐고 있었다. 한참을 그 상태로 가람은 대걸레를-은찬은 그런 가람의 손을 쥔 채로 두 사람은 멀뚱멀뚱하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뭐야, 놔."

그 정적을 깨는 가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손을 놓지도, 입을 떼는 일도 없이 은찬은 그런 가람의 빨간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법 꼼꼼한 눈길이었다. 처음에는 미간을 깊게 팬 채로 노려보던 가람도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짜증으로 구겨진 왼쪽 눈꺼풀로 제 손을, 그 위에 겹쳐진 손등과 굵은 선의 팔뚝을, 그리고 바닥을 번갈아 쳐다보던 가람의 귀에 은찬의 말이 꽂혔다.

"청가람."

말은

"우리 사귀자."

말은 너무도 허무맹랑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급하게 고개를 올려세우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덤덤하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저를 바라보는 주은찬이 보였다. 이 새끼, 또 나 놀리는 거 아냐? 싶었는데, '싫어'하고 입을 떼기도 전에 제 손등을 세게 쥐어오는 손가락에 그만 말이 턱, 하고 목구멍에 막혀버렸다.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떨림에, 가슴이 찌르르하고 아렸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가람이 입을 떼, 말문을 트려는 순간 은찬의 손이 뺨에 닿았다. 문지른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온다.

제 눈앞에 한가득 들어찬 은찬의 웃음을 보며 가람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은 축축했지만, 제 뺨에 걸쳐진 손가락과 달리 따뜻한 듯 미지근했다. 다시 한 번 달칵, 하고 대걸레가 널브러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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