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백건/현백/현건] 영화 보여주는 남자

[현우+백건/현백/현건] 영화 보여주는 남자

*au 주의!

*조용한 영사기사 현우 X  백수 건이.




문안엔 짙은 그늘이 있었다. 방은 하나의 거대한 암굴 같았다. 혹은 깊은 밤하늘. 희미한 빛 한줄기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양 창문엔 진한 남색의 암막 커튼이 빼곡히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석 끝엔 형형색색의 별이 내뿜는 듯한 발광만이 그득했다.

옅은 빛을 뿜어내는 모니터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이름은 '현우'라고 했다. 음침한 방만큼이나 칙칙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 어두컴컴한 방안에 서 있자 못내 꺼림칙한 기분도 일었지만, 건은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그가 뱉은 첫 마디는 '문을 닫아주세요.'였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건은 문을 닫았다. 그나마 문을 통해 스며들어와 장내를 밝히던 빛마저 차단되자 다시 사방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였다. 뒷말은 없었다. 사내는 저에게 무신경했다.

건은 닫힌 문 앞에 멀뚱멀뚱하니 서 있었다. 소리 없이 눈동자만을 굴려서 방안을 천천히 탐색해본다. 때마침 제 오른편에 있던 기계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하품을 하듯 윙윙거리는 소음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기계가 내뿜는 초록색과 붉은색의 빛들이 평행선을 그리며 눈을 세차게 찔러오는 바람에 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이며 기계에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대체 이게 다 뭔 일인가, 싶었다. 그런 어리둥절함에 빠져있기도 잠시, 눈앞에 진한 회색의 화면이 떠오른다. 그 검은 창에 은빛의 태엽들이 겹겹이 맞물리며, 어둠에 잠겨있던 사방이 환해지며 사내의 옆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사내가 두 번째 말을 뱉었다. "의자에 앉으시죠." 였다.

그 목소리에 비로소 제 앞에 놓인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귓전을 감싸오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건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동시에 하얀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딱히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온종일 침대 위를 질펀하게 뒹굴다가, 제 뱃속에서 울리는 울음소리에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잠깐의 쪽잠 뒤에 지겹도록 티비를 봐도 고작 3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과 권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슬슬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손바닥을 차고 넘치는 시간은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주린 배나 채울 겸 냉장고를 열었는데 텅텅 비다 못해 살풍경한 안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장을 봐온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건은 머리를 긁적이다 슬리퍼에 발을 꽂곤 휘적휘적 집을 나서게 되었다. 후딱 돌아와야지,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던 길이 저의 예상과 달리 꼬여버렸다.

따가운 볕이 내리쬐다 못해 팔뚝이며 목덜미에 자꾸만 촘촘히 박히는 통에 찔리듯 아팠다. 지글거리는 아스팔트가 뜨거운 김을 토해내는 바람에 자꾸만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프라이팬이 따로 없네. 계란 한 알을 톡하고 깨서 떨어트리면 잘 익은 후라이가 만들어질 것만 같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먼저 녹아서 눌어붙은 계란이 될 거 같은데? 죽죽 떨어지는 땀을 닦아내며 건은 짜증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집까지는 아직 십여 분은 더 걸어가야만 한다. 불쾌감이 치솟는 건의 눈앞에 마침 그늘진 건물의 입구가 보였기에, 거침없이 발을 놀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 예상대로 건물은 시원했다. 시원하다 말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더위를 식히기엔 충분히 쾌적한 온도였다. 정신없이 들어오느라 제대로 살필 여력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극장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다 낡아빠져, 그늘을 찾을 요량만 아니었다면 제가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법한.

인영하나 없는 극장을 대충 두리번거리며 건은 소파에 앉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양손 무섭게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자 입에선 절로 한숨이 내뱉어졌다.

다음부턴 귀찮게 나오지 말고 인터넷 주문인지 뭔지 그거나 알아봐야겠다, 투덜거리며 셔츠를 팔랑이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오는 번쩍거리는 대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번뜩이는 머리와 달리 옷은 추레했다.

당황하기도 잠시, 대머리가 갑자기 제 손을 덥석 잡아오는 바람에 건은 짜증이 확 치솟았다. 손을 뿌리칠 새도 없이 대머리는 다짜고짜 잘 부탁한다며 얼굴 만면에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네로군! 오늘 면접자가!"

"면접? 아니, 사람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

"이 극장이 낡아 보이긴 해도 꽤 튼튼해서 당장 망할 일은 없네!"

"아니, 그러니까. 저는 면접자가 아닌데요."

"자네마저 퇴짜를 놓으면 후임을 찾기가 곤란한데…."

한숨이 나온다. 아무래도 사람을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한사코 아니라며 뿌리치는 제게 지독히도 매달려온다. 그 뒤로 꼼짝없이 붙들려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극장 이곳저곳을 쏘다녀야만 했다. 덩달아 제 삶에 1도 쓸모없을 극장의 잡다구레한 역사 따위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눈앞에선 대머리가 백열전구를 받아 번뜩이는데 자꾸만 머리 한쪽으론 소파에 내팽개쳐놓았던 봉투가 아른거린다. 덩달아 굶주린 제 배가 떠올랐다. 맞다, 나 배고팠어.

"아, 고기 먹고 싶다."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입 밖으로 우렁차게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그 기세로 대머리에게 이끌려 식당에 가서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앞에선 자꾸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뒤로는 틀어놓은 티비소리가 울리는 통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가 고팠기에 밥은 맛있었다.

아무래도 극장 사정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재정문제라던가 그런 자세한 내막 같은 건 덮어두더라도 오랫동안 후임자가 나타나지 않아 곤란했던지 연신 잘 부탁한다며 대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머리가 또 한 번 번쩍였다.

출근시간은 2시로 퇴근은 12시. 나갈까보냐.

못내 찜찜했지만, 공짜 밥 한 끼 얻어먹은 셈 치자며 티비를 보고, 밥을 먹고, 이불 속을 뒹굴거리면서도 건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게 되었다. 시곗바늘이 세차게 2시를 향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 몰라. 건은 이불을 머리팍 끝까지 눌러 덮었다.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착각한 쪽이 나쁜 거지. 그러니까 사람 말 좀 잘 들으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못내 양심이 찔려왔다. 아, 짜증 나. 진짜 귀찮다. 결국, 건은 2시를 5분 남짓 남긴 채 허둥지둥 문밖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속으로 끝없이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으며.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괜스레 머쓱해진 건은 뒷머리만 긁적였다.

아주 잠깐 쪽잠을 잤다고 생각했는데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있었다. 아주 늘어지게 잤구먼,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던 화면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그러니까 바닷가로 도망간 여자주인공을 남자가 붙잡아 사랑 고백을 하는 지루하고, 또 지루한, 굉장히 지루한 장면이었던 거 같은데. 건은 팔짱을 끼고, 입을 찢어져라 크게 벌리며 하품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시 한 번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12시가 방금 지났다. 사내는 여즉 말이 없었다. 모니터의 불빛만을 눈에 담은 그는 좀체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사내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다.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 단면만이 건의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면 목 아프지 않나, 건은 다시 한 번 하품을 토했다. 그 뒤로 연신 잘긴 하품을 해대던 건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퇴근은 12시라고 했으니까 가도 상관없겠지, 뭐. 방문을 나서기 전 인사라도 건넬까 싶어 힐끔 뒤를 돌아봤지만, 사내의 안중에 저는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보나 마나 인사해도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 짐작하며 건은 문을 나선다. 어두웠던 방과 달리 복도의 백열등은 눈이 시리도록 쨍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긴 시간 암전에 젖어 침침한 눈을 비비며 건은 천천히 극장을 빠져나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2.

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상영표를 챙긴다. 그다음엔 종이 위에 인쇄된 시간과 모니터 상의 시간이 맞는지 비교해가며 대조해볼 것, 오류가 생겼을 땐 인쇄가 잘못된 것이니 종이를 고치고 절대로 컴퓨터 프로그램엔 손대지 말 것. 영화가 시작되면 불을 끄고 끝나면 불을 켜는 일, 그것들이 전부였다. 그 외의 할 일은 일절 없었다.

프로그램의 간단한 조작법부터 시작해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사무적이었다. 딱딱하고 건조하게 메말라 살가움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낮았기에 근거 없이 신뢰가 싹트는 음성이었다. 필요 이상의 대화는 단절된 지 오래된 듯한 묵직하고 단단한 소리였다.

몇 번의 마우스질 후에 그는, 모니터와 종이를 번갈아가며 수정을 기하는 건을 바라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의자 밑 바퀴가 끌리며 나는 드르륵 소리와 종이 위 활자를 덮어가기 바쁜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암흑 속에 울려 펴지고 있었다. 그 정적 위로 마우스의 달칵임이 파문을 일으킬 뿐 두 사람의 침묵은 지켜지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와중에 홀로 빛을 쏘아대는 하얀 모니터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마치 어두운 이 방안의 태양 같았다. 그 빛에 눈이 시리고 침침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묵직한 피로감이 눈과 목, 그리고 뒷덜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건은 바지런히 연필을 놀리느라 혹사당한 제 손목을 주무른다.

이 어두운 방 안에서 밝아지는 곳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제 앞에 자리잡은 투명한 유리창이었다. 창문처럼 뚫려있는 각진 창을 통해, 마치 여명같은 스크린의 빛줄기들이 간간이 하얀 모니터에 질린 건의 눈을 찌르며 달래오곤 했다. 어스푸름한 새벽녘의 색을 지닌 그 유리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네모나고 텅 빈 상자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일었다.

오늘도 역시 시간표를 확인하는 새 몇 번일까 커다란 유리창 너머의 화면 스크린이 뒤바뀌고 있었다. 덩달아 작은 방안엔 여러 번의 여명과 일몰이 스쳐 지나간다.

"불 끌까요?"

건이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스위치를 내렸다. 유리창 너머의 각진 사각형이 다시 한 번 어둠에 침식되고 있었다. 어두운 화면에선 우윳빛 불빛이 흐르고,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소음이 건의 귀를 적셨다.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3.

일을 시작한 지 근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건은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의 이름이 현우라는 것과 저보다 일찍 출근하며, 영화관의 그 누구보다도 늦게 퇴근한다는 사실뿐. 또한,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확한 영사기계와 다름없었다. 제자리에 앉아 엉덩이 한번 떼는 일 없이 영화를 틀고 끄는 모습이 꼭 그러했다. 영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영사기인 양, 등을 우뚝한 기둥처럼 꼿꼿이 편 모양새로 하얀 모니터만을 응시한다.

종이 위에 씌여진 숫자들이 시계 위로 옮겨질 때면 정확한 손놀림으로 영화를 상영했다. 건은 그 숫자보다 아주 약간의 시간, 10여 초 빠르게 불을 내린다. 영화가 끝날 때면 다시 10초 느리게 건은 불을 올려 공간을 밝혔고, 썰물이 지듯 서서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래 봤자 십여 명 남짓에 불과한 사람들이 전부였지만.

영화관 자체가 낡았을 뿐만 아니라, 상영되는 영화들조차도 케케묵어 곰팡내가 들었을 법한 것들이 전부였다. 이십 년도 더 전에 히트를 쳤었던 아날로그 필름의 영화들부터 시작해서, 고전으로 불리우며 토요일 심야에 시네마 천국 등 따위에서 틀어줬을 법한 흑백영화라던가, 영화에 대한 일체의 배경지식이 없는 제가 보기에도 '꽤나 수작이군.'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그러했다. 사실 그렇다 쳐도 이 장소가 아니었다면 제 손으로 찾아봤을 리는 전무한 영화였지만.

첫 감상은 '이런 걸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단 말야?' 였다. 그렇지만 있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꽤 많았다.

관객이 많은 날이면 네모난 칸의 절반 이상이 사람들의 머리로 채워졌다. 아무리 적은 날이어도 열댓 명은 되었다. 덕분에 종이 위의 인쇄된 목록들이 무용지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하루에 많게는 6편, 적게는 4편 정도가 스크린을 채우곤 맥없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오늘 틀은 영화는 총 5편이었다. 처음과 맨 끝의 화면은 기억이 나지만, 사이의 3편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기억나는 장면들조차도 어렴풋했다.

낡은 흑백영화들은 화면 곳곳에 자글거리는 하얀 점들이 떠올랐다. 마치 잔모래들이 흩뿌려진 듯했다. 눈을 아무리 세차게 깜빡여보아도 흰 모래의 잔상들이 눈동자를 쿡쿡 쑤셔와 금세 피로해지기 일쑤였다. 덕분에 자연스레 비교적 눈이 편한 자막에 시선이 꽂힘은 당연했고, 영화를 봤다기보단 자막을 읽었기에 생각이 안 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건은 피로한 눈을 매만지며 다시 글자들을 읽는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자막이 삽시간에 사라지더니, 배우들의 이름이 꿰어진 구슬들처럼 줄줄 위로 올라간다.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며 조명을 켠다. 마지막 영화기에 관객 수는 적었다. 군데군데 잘못 놓여진 바둑알같던 사람들의 머리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눈을 들어 시계를 보자 어느새 숫자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음에도 제 옆의 그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늘 밤도 그는 홀로 이 방에 남아, 가장 늦게 불을 끄고, 누구보다 마지막으로 극장문을 나설 것이 분명했다.

건은 조용히 모니터를 끈다. 인사조차 던지지 않으며 방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복도의 백열등은 너무 밝고 훤해, 눈이 시리다.

그러고 보면 그는 무슨 까닭으로 그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것일까. 또,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문뜩 자그마한 호기의 불꽃이 건의 가슴팍에 피어올랐다.

그는 그 동굴 같은 방에 홀로 남아 어둠 속에서 무얼 할까.




4.

그의 존재를 부풀리는 건 뜬구름과 같은 소문들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근본 없는 뒷소문에 귀가 홀리기 마련이었고, 여유롭다 못해 지루한 이곳에서 비밀의 베일에 싸인 그는 딱 좋은 입방앗거리였다. 끊임없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생긴 무수한 유언비어 위에 그는 앉아있었다.

어느 유명한 기업의 후계자라더라, 재계 서열 싸움에서 진 뒤에 이곳으로 도피했다던데 실은 성격이 괴팍해 가문에서 내쫓김 당했다는 말도 있더란다. 역시나 그 콧대가 높아 말 한마디에 대꾸하는 법이 없다며 사람들은 낭설로 그를 창조했다.

간간이 복도에서 스칠 때마다 그에 대한 호기를 내뿜으며 붙잡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온전히 건의 몫이었다. 그 사람 하반신이 온전치 못하진 않느냐, 발을 절뚝거리진 않더냐. 사실 절름발이라 걷는 모습이 추해 온종일 의자에만 앉아있다던데 사실이냐. 너무도 허무맹랑해 진위여부를 가릴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 뜬소문들에 건은 답하지 않았다. 부러 무시한 건 아니고 저는 정말로 그에 대해서 몰랐으니까.

마지막 말은 조금 신빙성이 느껴지긴 했다. 건 역시, 제 눈으로 그가 걷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일단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를 않는다. 그러니 진실을 알 턱이 있나. 그렇지만 앞선 소문들엔 당최 신뢰가 싹트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 그는 한낱 영화를 좋아할 뿐인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청도설에 질려갈 즈음, 대머리가 건을 찾아왔다. 퇴근을 막 앞둔 시각이었기에 지루함에 하품을 내뿜는 건을 보며, 그는 '시간 있나?'라 물었다. 시간이 없으면 뭐 어쩌시게요.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내어 뱉진 않았다. 건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밖으로 나온 그는 양해를 구하며 담배를 피웠고, 건은 멀뚱하니 그 옆에 서 있었다.

"어찌 일은 할만한가?"

할만하다면 할만한 일이었고, 아니라 한다면 이유는 속절없는 지루함뿐이 전부였기에 건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대머리는 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같이 일하는 이가 말이 없어 지루하지?"

"뭐…"

"말은 없지만 좋은 이라네."

말에 모순이 있었다. 말이 많아도 좋은 사람은 있을 거고, 말이 없어도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뭐, 그렇지만, 시종일관 말을 걸며 저를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 일은 없으니 일단은 좋은 사람인가? 허언쟁이들보다야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건은 수긍하기로 했다.

"영화관에 뜬소문들이 참 많지?"

"굉장히 많던데요."

"믿지는 말게, 그는 좋은 사람이야. 참으로 성실해."

이 영화관에 오고 나서 그를 칭찬하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대머리는 담배 한 대를 더 피우곤 말을 이어갔다.

"영화 중에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게 있다네. 아는가?"

들은 적은 있지만, 본적은 없다. 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주인공을 닮았어."

"?"

"현우 말이야."

그 영화는 모른다. 그렇기에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책을 읽어주는 남자보다는 영화를 보여주는 남자가 더 맞지 않나? 짐작에 기한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건은 우직이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대머리는 끝까지 다 피워 몽땅해진 담배필터를 비벼 끄며 웃는다. 영화를 보게, 그럼 이해가 될 거야. 건은 또 한 번 대답을 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곳곳에 얼룩진 도보를 걸으며 건은 집으로 돌아간다. 잠시 옆을 지켰을 뿐인데 머릿속에 담배 연기가 그득 들어찬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선 저도 모르게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켰다. 그 길로 영화를 다운받았다. 그렇지만 틀지는 않았다. 왜인지, 아직은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몇 번인가, 마우스만 달칵이던 건은 그대로 노트북을 접고선 잠이 들었다. 그 밤은 특히나 길게 느껴졌다.



5.

스크린의 햇빛이 비치기 전 눈을 떴다. 황급히 고개를 올려 시간을 보니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백야의 내리쬐는 태양 같은 스크린은 방안 구석에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걷어 내간다. 까맣게 탄 숯처럼 검은 글자들로 화면 군데군데가 타들어 간다. 건은 눈을 다시 한 번 세게 깜빡여본다. 삽시간에 화면 위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이 머무른다. 눈이 시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미동도 않고 모니터만을 응시하는, 어둠 속에 뭉그러진 얼굴선을 지닌 그가 보인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의 짖음과 제 오른편에 낡은 고철 덩어리의 포효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권태로운 방안에 기계들의 울음소리만이 차올랐다.

자막들은 오늘도 건의 눈을 세차게 찔러온다. 빨갛고 파랗게, 형형색색으로 변모해가는 스크린 화면 위의 글자들은 변함없이 첫눈처럼 새하얗다. 그 흰 글자들은 짧은 단어로 읽어나가기 숨이 가쁠 거센 동작으로 달려오다가도, 단어들의 모음, 뭉뚱그려진 활자로 절름절름 다가오곤 했다. 막연하게 가지를 쳐가는 대화들을 읽다 보면, 어느샌가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스크린의 화면은 기름때가 낀 웅덩이처럼 삽시간에 색을 잃어간다. 건은 눈을 부비며, 기계의 울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제 옆에 앉은 사내는 언어를 모르는 양,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둠에 젖은 방안에서 건은 제 옆에 앉은 사내의 옆얼굴을 곁눈으로 훔쳐본다. 무채색의 모호한 선들이 공기 중을 부유하며 하나의 면을 만든다. 그면은 사내의 뺨이다. 사내는 짙은 흑색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이 어두운 방 안에선 마치 그의 얼굴만이 존재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턱선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가다 끊기는 목선을 보며 건은 모니터의 불을 끈다. 사내는 깊은 밤을 닮아있었다.

문을 나서기 전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볼까 하는 작은 갈등이 일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인사를 꺼내진 않으며 건은 문을 닫고 나왔다. 제가 문을 여닫을 때까지도 그는 그대로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미동조차 않는 그 뒤통수가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려, 건은 손을 들어 제 뒷머리를 긁적여본다.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던 모양인지 긁은 자리에 생채기가 난 양 자꾸만 따끔거리고 있었다.

저녁 동안 소나기가 내렸던 모양인지, 도보 군데군데 물에 젖은 잔 얼룩들이 눈에 띄었다. 아스팔트 위로 패인 조그마한 웅덩이에 고인 물들을 피해 걷는다. 가끔 발을 잘못 놀려 찰박이는 물소리와 검은 얼룩이 건의 운동화에 튀곤 했다. 혀를 한번 차며 건은 계속해 걸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곧장 노트북을 켰다. 오랜 시간 컴퓨터에서 잠자고 있던 영화를 깨우며 건은 검게 물든 화면을 응시했다. 늙은 사내의 주름진 뺨을, 생기를 잃어 허물어진 옆얼굴을 눈에 담는다. 화면 속의 그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아침의 환한 정경과 다르게 뒤통수는 어둠에 적셔져 있다. 그의 출렁이는 눈동자를 따라, 전차는 비가 오는 도로를 매끄럽게 내달린다. 빗줄기로 얼룩진 창문 너머로 겁에 질려 새파랗게 부르튼 입술의 소년이 보였다. 젊지만 생기가 없어,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는 핏기 어린 사내를 내려다보며 건은 다시 한 번 눈을 세차게 비빈다. 눈 안쪽에 세찬 섬광이 맺혔다 사라졌다.



6.

이 작은 방안에서 건이 할 일이라곤 화면을 보고, 화면을 보며, 또 화면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게 주어진 업무, 전부였다. 무색의 영화들을 바라보며 건은 제 옆에 자리한 사내의 얼굴을 훔쳐본다. 밝은 빛과 어두운 흑색이 한데 뒤엉킨 무채색의 면을. 권태에 휩싸인 이곳에서 적적함을 달랠만한 요깃거리기도 한 그 일을, 추가업무라 이름 붙여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며.

현미경 속을 들여다보듯,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의 옆얼굴을 탐했다.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닮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의 소년은 금빛 태양을 잘 쬐어 여물은 보리빛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우'라는 남자에겐 색이 없었다. 오랜 어둠 속에 갇힌 탓에 생기를 잃어 여윈 뺨이 부옇게 바래있고, 뭉뚱그려진 한줄기 외곽선으로만 건은 그를 판단할 수 있었다. 훤칠한 인상인지, 굴곡진 광대뼈를 지니고 있는지, 그의 코가 과연 앞에서 보았을 때도 오뚝한지 알 방도가 없었다. 영화 속의 소년처럼 그가 미성숙한 허벅지를 지니고 있는지, 강직한 근육의 팔을 지녔는지도.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천천히 눈으로 쓸어본다. 그의 뺨 위로 얼룩진 그늘을 눈 안으로 퍼담아본다. 오래된 무성 영화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소리도, 빛도 없이, 그늘과 얼룩으로만 이루어진 낡은 필름 같은 사람이었다. 색도, 감정도 없는 무채색의 실선들로만 이루어진.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삽시간에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눈꺼풀 안쪽에서 한데 뒤엉키던 안개를 걷어낸 건의 눈앞에 사랑스러운 눈망울의 여배우가 서 있었다. 순진한 강아지를 닮은 커다란 눈동자와 오똑한 코, 끝이 하늘로 말아 올려진 입꼬리도. 몽롱함에 취해 화면을 들어보던 건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시계를 바라본다. 자정을 훨씬 뛰어넘은 새벽 2시의 시간이었다. 그 늦은 시간까지도 사내는 홀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기계들만이 달싹이는 고요 사이로 그의 한숨이 맺힌다. 그 순간이었다.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커다란 스크린 위로 손바닥 모양의 그림자가 생겼다. 마치 화면 속으로 파고들 듯한 동작으로 그는 색을 움켜쥐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쥐었다 피면서 한참이나 그는 화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얼 하는 거냐 묻고 싶었지만, 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을 뿐이었다.

색을 감싸던 사내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 뒤에 있던 낡은 플레터의 침묵을 끝으로 사방이 적요해진다. 사내는 손바닥으로 이마와 눈두덩이를 감싼다. 건은 스스로 눈치를 본다거나, 배려가 있는 성격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만의 잔잔한 고요를 깨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천천히 내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깨어났습니까."

매 순간 그는 말이 없다며 불평을 한 주제에, 그가 입을 떼어 말을 뱉자 벙어리가 되어버린 건 되려 제 쪽이었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막혔지만, 건은 대답 대신 모니터를 끄고, 의자를 덜컹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느릿한 동작으로 모니터의 불을 내린다.

매일 밤 이렇게 홀로 남아 그는 영화를 보고 있던 것일까. 영화를 눈으로, 또 손으로 바라보며 만지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모를, 그만의 커다란 비밀을 어쩌면 방금 자신은 목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건은 다시 한 번 숨을 삼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새벽의 복도는 어두웠다. 손끝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그렇게 두 사람은 극장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두 사람을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밤거리를 적셔가는 얄팍한 빗소리를 들으며 건은 그제야 빛 속에서 그의 민낯을 마주한다. 푸르스름한 가로등 불에 단단히 달궈진 강직한 얼굴선과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오지도, 그렇다고 밋밋하게 파이지도 않았으며, 눈이 옴폭 패여 있지도 않았다. 여전히 생기는 없었지만 그게 그의 타고난 피부 때문인지, 파란 가로등 불 때문인지 분간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빛 속에서 마주한 그의 낯빛은 생각보다 까무잡잡해, 하얗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참으로 검었다.

뭣보다도 그는 발을 끌거나 절뚝거리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바닥과 부딪길 때마다 딱딱하고 세차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까지 내어가며 정확한 동작으로 걸었다. 문득 입술을 타고 소리가 새어 나온다.

"잘 걷네요."

그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자신에게 쏘아온다. 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회피한 채 뒷말을 준비한다. 목 안에 박혀있던 가시를 빼어낼 차례였다.

"좀 전에 생각한 건데."

뭐 하고 있었냐고 물을 생각이었는데 쉽사리 말문이 트이지가 않았다. 그가 감추려 했다고 생각진 않았다만, 딱히 제게 보여주려 한 행위는 아니었으리라. 단지 저는 우연한 목격자에 불과했다. 한참을 곰곰이 가시를 곱씹던 건은, 물었다.

"사람도 없는데, 왜 거기서 봐요?"

기왕이면 큰 화면으로 보는 게 더 좋지 않나. 혼자 중얼거리듯 뒷말을 덧붙이며 건은 저도 모르게 다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손톱 끝에 딱지가 걸린다. 그 울퉁불퉁한 면을 더듬으며 건은 막연히 검은 도보를, 가로등 불을, 하늘을 번갈아가며 올려다본다. 돌연 그의 대답이 건의 귓가에 걸렸다.

"어차피 보이지 않아서."

무슨 뜻이냐 미처 물을 새도 없이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린다. 침 흘리는 밤하늘 속으로 서서히 먹혀들어간다. 검은 그를 바라보던 건 역시도 반대편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제 발을 비추는 가로등불이 밝았다. 밝게만 느껴졌다.



7.

커다란 화면들을 장식하는 영화들은 주로 흑색이었다. 눈을 찔러오는 강렬한 색의 영화들도 종종 존재했지만, 언제나 화면에 걸리는 주류들은 무색영화였다. 오늘 돌려진 영화들 역시도 모두 흑색이었다.

그 밤 이후에도 여타랄 진전도 없이 오늘도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건 역시도 괜한 인사치레로 말을 건네진 않았다. 그저 그 다음 날도 변함없이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 묵묵히 영화표를 뜯어고치고, 유리창을 바라보다 졸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제 한 편의 영화만 상영을 끝마치면 퇴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틀의 긴 휴일이 주어질 터였다. 그 자유의 시간에 뭘 하며 지낼지, 어떻게 즐길지를 고민하며 건은 유리창 너머를 내려다보다. 마지막 영화라 그런지 사람의 수는 적었다. 곳곳이 휑하게 비어, 대머리 위에 남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 혹은 벌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루터기같은 사람들의 뒤통수가 내려다보였다.

흑백영화가 재미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건은 다시 마우스를 달칵였다. 순탄히 흘러가던 시간 속에 아연, 제 뒤에서 기계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른편의 스위치에서 빨간 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건은 황급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빨간 불이 들어왔어요."

그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건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작지만 정확한 음성으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고요."

짧은 동요가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러나 아주 찰나의 포착에 불과했기에, 그것이 실상 그의 감정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아주 잠깐의 뜸 뒤에 평정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몇 번째 버튼인가요."

건은 숫자를 센다. 좌로부터 정확히 세 번째 버튼이었다.

"세 번째 버튼이요."

"알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 제 곁으로 다가온다. 기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기계를 달래기 시작한다. 숫자를 세어 초록 불과 붉은 불의 개수를 확인하며 노란 선을 매만졌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빨간 버튼이 그의 손가락 밑에서 맥없이 빛을 잃었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옆선에서, 건은 영화 속 여인의 그늘을 발견한다. 제 이름조차 쓸 줄 모르던 여인. 드센 눈썹 산에 날카로운 콧대, 그리고 굳건하다 못해 오만하던 자존심을 제 속에 품고 있던 여인의 옆얼굴이 그에게 맺혀있었다.

"보라색 불이 들어와요."

그 순간, 왜 그런 말을 뱉었을까. 건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째 불인가요."

제 앞에 불을 놓고도 그는 굳이 건을 향해 묻는다. 꺼졌어요. 건은 말한다. 그는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제 안에서 막연하게 피어오른 '혹시'에 대한 추측이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이 방의 기계에 대해 잘 알 터였다. 애초에 보라색 버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불은 오직 파랑과 빨강, 그리고 초록색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의 말을 믿었다.

영화 속 여인을 상기했다. 듣는 편이 더 좋다 회유하며, 사랑하는 이에게까지 자신의 무지를 속이던 여인보다야, 차피 보이지 않는다고 솔직히 인정한 그가 더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 무지로 인해 파멸에 내쳐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 증거로 색을 보는 저보다야 그가 더 정확히 기계를 손보지 않았던가. 더 정확히 파고들자면, 그가 감춰봐야 저와 그는 뭣도 아닌 사이였기에 비밀에 대해 고백할 의무도, 속임에 대한 잘잘못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도리어 거짓말로 그를 속여 재본 제가 나쁘다면 나쁠 일이었다.

건은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의 스크린을 응시한다. 여지없는 흑과 백, 두 개의 색채로만 이루어진 세계였다. 흑과 백의 교차점을 바라보며, 건은 '영화의 주인공을 닮았다.'는 그 말을 떠올린다. 처음부터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었다. 대머리가 말한 '주인공'은 '그'가 아닌 '그녀'였던 것이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색을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색을 만지던 손짓과, '어차피 보이지 않아서.'란 말을 내뱉는 물기를 상실한 건조하고 파삭한 음성이.



8.

휴일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 얄팍한 빗방울 몇 줄기 맞은 것만으로도 건은 곤혹스러운 열병을 치러야 했다. 부드러운 솜이불에 쌓여서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며 내리 이틀을 보냈다. 더불어 머릿속엔 영사기 하나가 끊임없이 필름을 돌려대는 통에 그녀와 그에 대한 잔상만이 가득했다. 눈을 뜨면 얼룩의 파도가 잔물결 치는 천장이,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가 보였다. 머릿속엔 덜덜거리는 영사기 하나가 쉼 없이 굴러가고, 더불어 머리통 전체가 둔탁하게 흔들린다. 머리가 아팠다.

비몽사몽한 와중에 건은 자꾸만 꿈을 꾼다. 권태로운 방에 대한 꿈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화면은 새까맣다. 재가 쌓여 더럽혀진 새하얀 눈밭에 관한 영화다. 건은 그 속에서 반짝이는 푸른 봄 잎을 찾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드넓은 화면 구석, 모퉁이, 눈밭이 잘려나간 여백에서조차.

마스크를 끼고 출근한 건을 보면서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잔열이 남아있는 이마에서는 자꾸만 미끄러운 땀이 흐른다. 그는 그저 방문을 들어오는 건을, 이어 닫히는 문을, 문틈 사이로 사라지는 잔 빛을 그렇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또한, 제 옆에 자리잡은 기계의 가냘픈 발광만을 눈에 담은 채 다시 빳빳하게 목을 세우고 모니터만을 바라본다.

"아팠어요."

퉁명스레 말을 뱉어본다. 한참의 뜸 뒤에, 한 편의 영화가 끝났을 즈음 그가 대답을 주었다.

"그렇군요."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 위론 끊임없이 영화들이 재생된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막들을 눈으로 훑으며 건은 마른기침을 토해내었다. 콜록이는 작은 소리가 벽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더욱더 잘게 쪼개져 갔다.

"이제 괜찮나요."

검은 암막 커튼이 쳐진 듯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을 보며 일순, 그가 물어왔다. 건은 대답 대신 기침을 한번 토해내었다.



9.

그는 습관적으로 눈두덩을 어루만지곤 했다. 근래 들어서 그 횟수가 부쩍 증가했다. 자꾸 그렇게 만지면 눈에 나쁘지 않나요. 건은 묻는다. 그는 거듭하여 제 눈가를 지긋이 손바닥으로 덮어 문지른다.

"눈이 피로해서요."

"내려가서 큰 화면으로 보면 나을지도 몰라요."

화면은 네모난 유리창 안에 걸려있는 작은 액자였다. 그 액자의 그림엔 다채로운 색이 즐비했다. 각각의 화려한 색상들은 저마다 뽐내기 바빠, 이글거리는 빛에 달궈진 외곽선들이 부옇게 번져있었다.

"작은 화면은 눈 아프니까."

건은 덧붙이듯 말한다. 부디 그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보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눈은 덜 피로할 거 아니에요."

그가 모르길 바랐다. 그의 세계는 오직 두 가지의 빛과 어둠뿐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는 자신을.

그는 다시 한 번 눈가를 문지른다. 건의 말을 곱씹으며 유리창 너머의 화면을 바라본다. 안개가 낀 그 액자를 바라보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이는 의자의 쇳소리, 방문이 열리는 삐걱 소리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틈 사이로 새는 빛을 건은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하얀빛 위로 그의 까만 얼룩이 졌다, 깨끗하게 빠져나간다.

홀로 남은 방안에서 건은 유리창을, 너머의 액자를 주시한다.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외곽선을 뜨겁게 지지는 붉은 색을, 봄의 초목을 닮은 짙은 초록색을, 검불이 한데 뒤엉킨 듯 얽혀있는 여배우의 갈색 머리카락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색들이 한바탕 뒤섞이며 연소한 탓에 검은 숯처럼 변해버린 화면을 바라보며 건은 그가 방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을 확인하고 모니터를 껐다. 어두운 방 안엔 여전히 열린 문틈 사이로 얇은 줄기의 빛이 들어오고 있기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문이 다시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 그가 돌아오는 소리다. 건은 짐짓 그를 기다리지 않은 척, 무신경을 연기한다.

"어땠나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이지 않아도,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좋네요."

그는 또다시 눈을 문지르고 있었다.



10.

그 뒤로 종종 건은 그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는 유리창 너머의 액자 앞에 앉곤 하였다. 건은 그런 그의 새까만 뒷머리와 환한 화면을 번갈아 눈에 품곤 하였다.

그가 언제나 문을 반쯤 열어두고 나갔기에, 어두운 그가 사라진 방안은 언제나 환한 빛이 기어들어 오곤 했다. 빛과 어둠이 섞인 회색 방안에서 건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회귀한 그의 말은 언제나 같다.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좋네요. 건은 고개만 까닥일 뿐이었다.

그렇게 총 여섯 번, 건은 그를 아래로 내려 보내었다. 그사이 싸늘한 가을바람이 한차례 극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가을은 더욱 외롭고 수척하게 변했다. 겨울의 차가운 냉기가 땅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극장은 긴 동면을 결심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두 사람에겐 길고 긴 휴일이 시작될 터였다.

오전부터 사람이 없어 한적한 극장에서 건과 현우는 무의미한 소등과 점화를 반복했다. 화면 위로 겹쳐지는 빛과 어둠을 보던 건은 운을 떼었다.

"영사 기계 어떻게 돌려요?"

질문에 질문을 내던진다.

"이제야 흥미가 생겼나요?"

"뭐 비슷해요. 마지막이니까 한 번 돌려나 보죠."

건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덧붙인다. 내려가서 봐요, 여기는 눈이 아프니까. 그는 의자를 끌며 건의 옆으로 다가왔다. 침묵만을 간직한 그는 숙달된 손놀림으로 기계를 어루만졌다. 숫자를 세어가며 버튼을 누르고, 선을 꼽는다. 능숙한 솜씨로 기계를 어루만지는 그는 말이 없었다. 영사기의 커다란 입을 통해 쏘아진 빛이 유리창을 관통한다. 작은 액자 위로 빛바랜 영상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불쑥 말을 뱉었다.

"같이 보죠."

무색의 영화에선 소리가 흘러나온다. 시작을 알리는 클래식 음악 선율과 그의 음색이 한데 뒤엉켰다.

"화면은 크고, 극장은 넓으니까요."

방문을 나서는 그를 따라 건은 발을 옮긴다. 오늘 그는 문을 굳건히 닫았다. 사람이 빠져나간 텅 빈 방안에는 오직 외로운 어둠만이 가득할 터였다. 극장도 외롭긴 마찬가지로, 그 속에 존재하는 이라고는 건과 현우, 두 사람이 전부였다. 둘은 나란히 앉아 흑백의 영화를 본다. 그림자와 빛, 그리고 그와 건만이 섞여 있는 조용한 화폭이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커다란 화면을 들여다본다. 팔걸이에 손을 놓다 실수로 손이 겹치었지만, 둘 중 누구 하나도 손을 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자에 놓인 내 검은 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손이 한데 뭉쳐 검게 변해있었다.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다가 어두운 관내를 빠져나왔다. 조용히 손을 풀어낸 두 사람은 그렇게 극장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밤과 달리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짙은 남색이었다. 작별을 고하는 악수를 한다거나, 하다못해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뒤로 돌아 서로 각자의 방향으로 갈라섰을 뿐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었다. 그 밤은 그것이 전부일 예정이었다.

어두운 남빛 하늘 위로 거센 눈발이 휘날린다. 건은 불현듯 발을 멈추고는 뒤로 돌아섰다. 색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세상 속에 그가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고 있었다. 생기로 부푼 뺨을 보며 건 역시, 조용히 웃었다. 이것이 그 밤의 전부였다. 두 사람의 발등 위로 하얀 눈이, 그 위론 다시 조용한 밤하늘이 쌓이고 있었다. 그의 소리가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당신은 참, 하얗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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