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ㅁㅈ으로 고생하는 은찬이 이야기 6
가람의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저의 흔적은 굳이 들춰내 보지 않아도 은찬의 눈엔 선했다. 목 뒷덜미부터 시작해서 저 얄팍한 천 안쪽에 자리 잡고 있을 새빨간 흔적들이. 외면이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은찬은 가람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말을 피해, 눈에서 도망치기를 거듭해 저를 붙잡는 손길도 뿌리쳤다. 마음은 비 오는 날 오후처럼 꺼림칙해져만 갔고 개운해지기는커녕 되려 생채기가 날 뿐이었다. 저를 쳐다보는 가람의 눈매가 은찬은 무거웠다.
그러나 행위만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은찬은 다시금 밤이면 가람을 마주했다.
고백은 낙장이었다. 애초에 상정해둔 결과도 아니었다. 진실을 계속된 회피로서 은폐해온 은찬은 그저 밤의 유흥으로서 가람을 받아들이기로 재차 마음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꿈에 불과해, 그러니 괜찮았다. 언젠가 꾸지 않게 될 테니까, 거짓말처럼 꿈이 멈추는 때가 올 것이니 그때까지 그저 자신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 꿈에 질리는 시점이 반드시 올 거야, 그때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면 될 테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평범을 꿈꾸면서 은찬은 매일 밤 가람을 안았다. 결국, 다시금 지독한 악몽의 그림자를 밟고 있을 뿐이었다.
어둠에 잠긴 가람의 눈을 볼 때면 은찬은 다짐했다. 정말로 마지막이야,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이런 꿈에 놀아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제 속으로 파고드는 가람의 손을 따라가다 보면 다짐은 언제나 흔적도 없이 제 밖으로 말끔하게 게워내질 뿐이었다.
그 밤 역시도 가람은 은찬을 찾아왔다. 제 이름 외엔 아무런 말도 담지 않은 채 부드럽게 자신의 뺨을 매만져온다. 두 사람은 거듭해 몇 번의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롯이 침묵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몸을 매만졌다.
제 가슴에 올려진 가람의 손이 무거워 버텨내기가 버거웠다. 몇 번이고 이 손을 뿌리쳐야 한다고, 그러겠노라고 은찬은 다짐했었다. 그러나 가람이 제 이름을 부를 때면 은찬은 속절없이 가람을 탐하게 되었다. 가슴을 맞댄 채로 드문드문 제 뺨에 부딪기는 숨을 느끼며 은찬은 다시금 가람을 제 안에 새겨넣을 뿐이었다.
사실 가람이 저를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은찬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람이 없는 밤은 수마도 저를 방문하지 않았다. 이불 위에 누운 채로 천장만을 눈으로 아로새기며 동이 틀 녘까지 뒤척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나 가람이 저를 찾아오는 날이면 거짓말처럼 단잠을 잤다.
아침이면 눈을 뜨고 모든 것을 꿈이라 치부하며 은찬은 간밤의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불면에 떠넘기고 있었다. 그래, 잠을 자지 못해서 간밤에 이상한 꿈을 또 꿔버린 거야. 그렇게 은찬은 명백한 구실과 그럴듯한 변명을 손에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뭣보다 꿈의 다음 날이면 말끔한 안색으로 제 방문을 열어 소리치는 가람을 보며 은찬은 다시금 이 모든 일이 꿈에 불과하다며, 죄책감을 떨쳐내곤 했다. 누구라도 그런 꿈을 꾸면, 그렇게 할 거야. 자신은 그저 꿈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라며 궁여지책으로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곤 했다.
고개를 숙인 탓에 드러난 목덜미에서 간밤의 흔적들을 눈으로 발견할 때면 은찬은 고개를 돌려 가람을 외면했다. 걷어진 팔뚝 위로, 팔꿈치 근처에 애처롭게 매달려있는 붉은 멍울이 눈에 밟힐 때면 은찬은 제 이불 속으로 도망치곤 했다. 끈덕지게 가람의 발꿈치를 따라 들러붙으려는 제 시선을 의식적으로 헤쳐놓으며, 끊임없이 가람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그렇게. 도피가 최선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가람에 대한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달라붙는 상념들에 은찬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의식은 날이 갈수록 확장되어 은찬은 가람을 밤낮없이 떠올리게 되었다.
그날 역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가람을 생각했다. 한동안 방문이 잠잠했지, 연이여 일주일 가깝게 불면과 싸우다 겨우 새우잠을 이루곤 했었다. 오늘이야말로 편히 잠을 이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뒤척이는 새로 손끝부터 천천히 감각이 마비되고 있었다.
찰나에 깃드는 몽롱함 사이로 드디어 눈을 붙일 수 있겠구나, 싶던 그 순간 가람이 제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청가람? 하고 이름을 부르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해온다. 눈을 마주친 채로 침묵을 유지하며 은찬은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런 은찬을 보고 가람은 살풋, 웃었다. 뺨 사이에 보조개가 패여 있다.
제 가슴에 파고드는 가람을 보며 은찬은 그 어떤 무게감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싶어 눈을 감았다가 뜨자 제 앞엔 컴컴하고 어둑한 습기를 머금은 천장만이 들어왔고, 그 사이로 가람의 잔상만이 눈꺼풀 안쪽으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시각을 보자 그 잠깐의 틈 사이로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 어떤 일도 저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꿈이었다. 은찬은 텅 비어버린 제 손만 바라보며 그렇게 밤을 보내었다.
그 후로 거짓말처럼 불면은 끊기고 은찬은 잠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종종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 꿈 이후로 끊겨버린 가람의 방문을 은찬은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꿈의 단절이 이루어졌는데, 마음이 개운해지기는커녕 착잡해져만 갔다.
가람의 목 뒤에 있던 제 입맞춤의 잔상도, 팔꿈치 안쪽으로 멍울져 있던 붉은 흔적까지, 모든 것이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가시적인 흔적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와 다르게 제 안에 머물렀던 가람의 감촉만큼은 은찬에게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제 등에 둘리던 팔의 무게와 제게 달라붙던 살의 감촉만큼은 이미 저와 한 몸이었다.
어쩌면 저는 못내 가람이 저를 찾아오기를 매일 밤 기대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며 은찬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들썩거리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은찬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숨을 토할 때마다 저를 향한 어둠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진다. 제게 드리워진 어둠을 느끼며 은찬이 다시 한 번 숨을 토해내던 그때였다. 뺨 위로 따듯한 온기가 덮이고 있었다. 그 감촉에 끌려 눈을 뜨자 새까만 어둠 사이로 가람의 붉은 눈동자가 말갛게 떠오르고 있었다. 제 눈앞에 분명한 청가람이 있었다.
세차게 눈을 깜박이며 은찬은 제 앞에 자리한 가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조심히 손을 들어 그 뺨을 어루만지자 숨이 더해진 웃음소리가 났다. 먼저 숨이 제 콧등에 닿았고 그다음이 작은 웃음소리였다. 손안에 선명하게 가람이 만져지고 있었다.
"이건…꿈이야?"
"뭐?"
황망히 소리를 입에 담으며 은찬은 가람의 팔을 잡았다. 손바닥에 분명하게 촉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틀림없는 청가람이다. 그 감촉에 취한 나머지 은찬은 가람의 말을 듣지 못했다.
"꿈이 아니야…."
가람의 얼굴에 팍삭한 웃음이 스쳐 간다. 허무하게 중얼거리는 은찬을 보며 가람은 낯빛을 달리하며 황급히 몸을 떼어내고 있었다. 가람의 얼굴 곳곳이 메마른 듯 금이 가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일그러져가는 가람의 얼굴을 보며 은찬은 입을 다물었다. 성난 듯 보이던 가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무너지더니 이어 눈동자엔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아줄 요량으로 손을 내밀자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손을 뻗지도 못한 채로 작게 들썩이는 어깨를 눈에 담으며 은찬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람에게서 떨어져나온 자잘한 방울들이 은찬의 가슴팍에 얼룩지고 있었다. 은찬은 하염없이 흔들리는 가람의 어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더해진 원망들이 가람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태까지 얼마나 내가 우스웠을까."
"그런 거 아니야."
"즐거웠어? 재미있었어?"
"내 말 좀 들어봐, 가람아."
몇 가닥의 눈물들이 가람의 뺨에 큰 줄기를 새겨놓았다. 몸을 일으키며 서서히 제게서 멀어지려는 가람의 팔을 붙잡으며 은찬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가람은 몸을 비틀며 은찬의 위로를 향해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당연히 즐거웠겠지. 재미있었겠지."
"청가람."
"얼마나 날 비웃고 있었을까. 내가. 내가."
"내 말 좀 들어! 청가람!"
진정시킬 요량으로 손을 뻗은 그때, 거친 주먹질이 제 뺨에 둔탁하게 치고 지나갔다. 눈앞에 번쩍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마치 세찬 정전이 한바탕 저를 후들긴 듯했다. 저를 덮친 서리 탓에 눈앞이 희부옇다.
"네 밑에서 계집애처럼 구니까. 내가 만만했어?"
목구멍이 콱 막혔다. 가슴이 불에 데인 양 저미고 쓰려, 은찬은 제가 뱉을 수 있는 최대한의 뜨겁고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에 날카로운 날이 세워졌다.
너야말로 잠든 날 보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파란이 공기 중으로 흩뿌려진다. 서슬 퍼런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었다. 불투명한 장지문 너머로 허옇게 동이 터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즉 말이 없었다. 굳게 닫힌 입술로 다짐한 듯 가람은 문을 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자 문뜩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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