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착란

[은찬가람/찬가람] 착란

au 설정 / 가람이가 게이샤?기녀? 그런 느낌. 은찬이는 그 홍등가의 종?관리인?아무튼 하수인.


밖은 한창 겨울이요, 바람이 세차게 문풍지를 두드려대는 통에 가람은 좀체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뒤뜰엔 자줏빛 별들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촘촘히 메워져 시야를 간질이는 저 별들의 정체를 가람은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여느 때도 지지 않을 열띤 욕망의 충실한 개들이 드러내는 혓바닥이다. 그들의 눈동자가 내뿜는 불꽃과 침을 양분 삼아 저택의 꽃들은 고개를 쳐들었고, 더불어 이 저택 역시도 제 몸덩이를 불리고 있었다.

그중 몇 개의 불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제 쪽으로 향하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가람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뒤척이느라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매무시를 정돈하면서 가람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늘어진 옷자락이 자꾸만 발치에 얽혀든다. 빛들이 웅성거리며 안채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도 저택은 고요를 삼킨 듯했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은찬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가람이 슬쩍 비척이는 소리를 내자 눈을 번쩍 뜬다. 말간 눈동자 밑에 피곤이 고여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주시한 채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휑한 바람 소리 만이 두 사람을 매듭짓고 있었다.

가람은 소맷자락에 손을 집어넣어 연초를 찾는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양 은찬은 몸을 일으켜 세워 가람에게 다가갔다. 연초를 꺼내 입에 문 채로 가람이 슬쩍 눈짓하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은찬이 성냥에 불을 붙여 내밀었다. 손끝에서 입 끝으로 불이 화륵 옮겨붙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엔 흐릿한 연기가 매워진다.

두어 번 천장을 바라보며 연기를 뿜어내던 가람이 시답잖다는 듯 말을 툭 하니 뱉었다.

“벚꽃이 폈던가?”

은찬은 고개를 젓는다. 그래?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 가람의 대답이 영 시원찮다.

“아직 3월이니까요.”

그리 대답하는 은찬의 얼굴에 피로가 스치는 것을 가람은 놓치지 않았다. 가람은 그의 얼굴을 향해 보란 듯이 숨을 내뱉었다. 그 독한 연기에 얼굴 한 번 구길법한데, 여전히 구김살 없는 말간 얼굴로 은찬은 그저 눈을 한번 크게 동그랗게 떴다 감는 게 반응의 전부였다.

“시시하네.”

그렇게 말하며 가람은 앞에 선 은찬의 팔을 휘어잡는다. 이어 소매를 슬슬 걷어 드러난 팔뚝을 부드럽게 쓸어보며 몇 번인가 더 세차게 연초를 빨았다. 연초의 잿더미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며 은찬의 손목 근처로 떨어진다. 팔이라도 빼내 그 재를 털어내면 좀 좋으련만, 가람은 당최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가람은 한껏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초가 붉게 타들어 간다. 이어 무신경하게 은찬의 팔뚝에 연초를 비벼끄며 가람은 말했다.

“가서 전해.”

데인 것만 같이 팔뚝이 따끔거려온다.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는 은찬을 보며 가람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첫 손님을 정했다고.”

붙잡혀있던 손이 그제야 내팽개쳐지며 자유를 맞이한다. 동시에 저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끌리는 옷이 거추장스러워 가람은 뒷자락을 걷어내었다. 드러난 복사뼈가 현묘하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가람의 대답을 전해 듣고 뛸 듯이 기뻐한 건 역시나 현오였다. 앓던 이가 빠진 양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완연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다. 좀체 진정하지 못하며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여간 기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한차례 호들갑을 떨다 불현듯, 그의 낯빛에 불안한 기색이 스치운다. 그 역력한 불안에 은찬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그, 아니."

별거 아니라는 듯 그는 손사래를 친다. 공중을 나부끼듯 정처 없이 손바닥이 그의 이마를, 콧잔등을 타고 흐르다 가슴께에 내려앉는다. 이미 한차례, 아니 수어차례는 매만졌을 것이 분명한 가지런한 매무시를 다시 한 번 정돈하며 현오는 미소를 띠었다.

"그 아이의 변덕이 걱정이라."

"그 점은 심려치 마십쇼."

"그래도 될까?"

불안한 기색이 뚜렷이 패여 있는 이마였다. 살짝 찌푸려진 그 미간을 주시하며 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리 내 대답해봤자 그의 귓가엔 들리지 않을 것이라, 은찬은 오롯이 침묵을 유지했다. 고심되는지 현오는 손을 들어 제 입가에 갖다 대며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어 제 앞에 높여있던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웃는다.

"그래, 걱정해야 무엇 하겠느냐."

제 입에서 뿜어진 연기가 흔들거리며 퍼지는 걸 눈으로 즐기던 현오가 드문 은찬을 향해 문을 던졌다.

"그래서 가람이의 첫 손님은?""네?"

"정하였다면서. 누구지?"

그러고 보니 누구인지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은찬은 뺨을 물며 슬쩍 웃음을 흘렸다. 척이면 척이랬다고, 현오는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간에 날을 정해야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장부를 펼쳐 보며 현오는 뻐끔뻐끔, 연신 연기를 내뿜는다. 읽고는 있는 걸까, 종이 위에 놓인 손의 움직임이 둔하다 못해 종이에 못이 박힌 것처럼 굳어있다.

"길일이 좋겠지?"

현오의 질문에 은찬은 말없이 고갯짓만 하였다. 창밖에 달이 밝았다. 그 빛만큼이나 현오의 얼굴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일은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어가는 듯했다. 은찬이 구태여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람의 방에는 초야를 맞이하기 위한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되려 자신의 손이 닿았다 일이 망치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준비들에 은찬은 가람의 일을 멀리하고 있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은찬은 영문도 모른 채로 이 방에 끌려와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가람과 눈씨름 중이였다. 가람은 제 앞에서 뻑뻑 대면서 연신 담배를 피워 헤치우고 있었다. 무릎을 오랫동안 꿇어앉은 탓에 발등이 시큰거렸고, 종아리가 쥐가 날 듯 아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은찬은 소매를 들어 이마를 작게 훔치며, 또 미간을 매만지며 입술을 핥았다.

"또 뭐가 불만이신겁니까."

제 대답에 요지부동도 하지 않는다.

"못 들었어?"

"무얼 말입니까?"

내가 정한 첫 손님. 그렇게 말하며 가람의 고개가, 혀가, 은찬의 목덜미에 닿는다. 섬찟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다. 코끝에 와 닿는 가람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며 몽롱하게 취하는 감각이 인다. 감각이 마비된 듯 서서히 굳어가는 손끝과 달리 아래가 끈적히 젖어가기 시작한다. 맞닿은 입술이, 제 입안에 들어온 혀가 달디 달다. 제 안에 꿈틀거리는 갈등을 내팽개치며 은찬은 천천히 가람을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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