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암전 ( 暗轉 : 箭 ) 외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

 

E u n c h a n X G a r a m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전 외전

 


엘리스

 

 

 

 

이 움츠린 밤엔 벽지에 남빛 물이 든다. 그런 밤이면, 밤은 새까만 연탄 가루를 잘게 개운 듯한 검은 색을 방안 곳곳에 펴 바른다. 옅은 서리가 낀 창문 유리에도, 머리맡에 놓인 침대 머리에도, 한 잔의 유리컵에도, 새하얀 이불과 가람이 눈두덩과 그 뺨까지도. 검은 물이 풀어진 방에서 가람은 눈을 뜬다.

잠을 깨운 건 밤의 붓질 탓이 아니었다. 문득, 문틈으로 찬바람이 기어들어 와 제 뺨을 더듬는 바람에 그는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가운 숨이 어루만진 건 제 뺨만이 아니었기에. 목젖과 그 아래로 내려가 등줄기까지, 마침내 이불 속까지 스며들어와 제 온몸에 오한을 불어넣고 있었기에 가람은 눈을 떴다.

창문은 닫혀 있다. 방문은 열려 있었다. 문에도 검은 물이 칠해져 있었다. 그 어두운 문을 향해 가람은 묻는다.

거기서 뭐 해?”

은찬이 문지방을 밟고 서 있었다. 그에게도 검은 물이 칠해져 있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가람은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이불 속에서 빼낸 어깨를 움츠리며.

잠이 안 와서

머뭇거리는 은찬이 거리를 좁혀온다.

그래?”

불을 키지 않아 방은 어둡다. 모든 사물이 잿빛이다. 혹은 검거나. 은찬의 머리도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은찬이 침대맡까지 바싹 다가왔기에, 그제야 가람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시선을 제 발끝에 꽂아 넣은 그는 입술 또한 단단히 붙이고 있었다. 마치 입술 사이에 립밤 대신 딱풀을 발라낸 양. 흔들림 없이 맞붙어 있다. 그 입술로, 그 눈으로 그는 침대 옆으로 당겨온 몸을 바닥에 붙여낸다. 그가 침대 옆에 앉는다. 가람은 벽에 등을 붙여 기댄다. 좁혀온 만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진다.

두 사람은 침묵을 나눈다. 나눌 것이 침묵밖에 없었다. 밤에 나눌 것이라곤. 은찬은 침대 위에 올려낸 손으로 시트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린다. 가람은 그 시트를 몸에 덮고 있었다.

홀연, 손이 만져졌다. 은찬의 손톱이 가람의 손등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그시 손끝으로 만져오다가도 가람과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손을 떨쳐내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라 눈두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눈초리 끝에 얇은 떨림이 인다.

마지막으로 눈을 제대로 본 게 언제였을까, 눈이 오던 날? 오고 난 후? 저를 데리러 왔을 때였던가? 어렴풋하다. 눈꺼풀을 들여다보는 일들은 지루하기만 하다. 그래서 가람은,

나 이제 잘 거야.”

하고 말하고, 시트 위를 더듬던 은찬은 소리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문을 닫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람은 다시 침대에 몸을 누인다. 단단히 물리는 자물쇠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과 손이 이어져있다. 손가닥 하나하나 사이를 세밀하고 파고들어 간 다섯 개의 손가락들이 두 개의 손을 하나로 만들어낸다. 손을 쥔 채로 은찬이 머리맡에 고개를 누인 채 잠들어 있었다. 가람은 눈을 뜬다. 이어 망막에 들어차는 빨간 빛에 놀라지 않는다. 그저, 출렁이는 머리칼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 깜빡거렸을 뿐이다.

가람은 이어진 손을 바라본다. 제 손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손가락들을,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잠든 그의 눈꺼풀을. 얼굴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손을 빼내고, 몸을 빼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제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그의 가지런한 옆얼굴을 보다가. 이마 옆으로 삐친 빨간 머리카락을 눈에 담다가. 가람은 거실로 향한다. 공기는 한적했고 가람이 소파에 앉는 가죽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으로 돌아온 후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가장 처음으로 가람의 눈에 차오르는 건 은찬의 빨간빛이었다. 그리고 감은 눈, 더듬거릴 듯 벌어진 입술과 그 아래의 점. 잠을 자고 있는 이의 평온한 낯이. 아침의 가람을 반겼다.

열흘에 이르는 시간 동안 가람은 매일 아침 은찬의 잠든 낯을 마주했다. 낯선 방에서 매일밤 잠을 이루었다. 손과 손이 이어진 채로. 목덜미에 뺨이 붙여진 채로, 등줄기에 무거운 손이 얹혀진 채로.

간간히 콧잔등을 빨간 머리카락이 간지럽혀왔다. 눈을 뜬 가람은 조심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소리 없이 손가락을 풀고, 이불을 빠져나와 방을 떠났다. 그의 목덜미까지 단단히 이불을 여며준 채로 저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방에 있다 보면 금세 문을 열고 은찬이 나타났다. 그는 제일 먼저 가람의 얼굴을, 그리고 바닥을, 눈을 들어 창문을, 그 창문을 단단히 막고 있는 쇠가닥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숨.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나누는 건 오직 침묵뿐. 오늘로 정확히 십일 일째.

아리는 무릎이 우는 소리도 잠잠히 멎어가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는 이제 보기 좋게 교정되어 있었고, 통원치료도 슬슬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군데군데 기어져있던 마른가지의 잔금들, 그 빨간 실밥들도 모조리 빠져나간 가람의 몸엔 콩알만 한 멍울 몇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는 왼쪽 무릎에 손을 얹는다. 가볍게 주물러본다. 쓰리지 않았다. 종아리를 더듬어본다. 아리던 통증도 사라져있다. 거실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은찬이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발소리로. 멈칫거리는 다리로.

거실에 있는 그를 보곤 조용히 부엌으로 몸을 틀어버린다. 냉장고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작은 물소리. 가람은 손을 더듬어 텔레비전을 튼다. 입을 다문 두 사람을 대신해 텔레비전이 어색한 고요에 잘긴 생채기를 내기 시작한다.

배 안 고파?”

문뜩 은찬이 물어온다. 손에는 물 한잔을 들고 서 있었다. 따뜻한 손에 쥐어진 차가운 유리컵 입가엔 흰 입김이 끼어 있다.

죽 있는데먹을래?”

가람이 몸을 일으켜 소파가 삐걱댄다. 앉아있던 자리에 눌린 솜들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식탁으로 다가가 가람이 앉는다. 은찬은 싱크대 앞에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가스렌지의 불이 타오르면서 색색 소리를 낸다. 그 등을 바라보던 가람은,

학교에 안 가?”

하고 물었고 은찬은 대답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끄는 걸 잊었기에 거실에선 말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얼굴의 두 사람과 달리 정적엔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아직 방학이니까

은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소리를 따라 멀건한 죽 위로 뜨근한 김이 퍼져 오른다. 식탁 위엔 제대로 된 밥그릇이 놓여있다.

 



날 오후에 가람은 버스를 타고 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에 창밖 너머로 교복 입은 사내 여럿을 보았다. 유리창엔 서리가 짙게 끼어 있었다. 풍경들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똑같은 교복이 가람의 옷장 속에 걸려있다.

가람의 옆엔 은찬이 앉아있다. 졸린 건지 조는 시늉을 하는 건지, 버스의 덜컹거림을 따라 감긴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 요령 피우는 아이처럼 머리를 비스듬히 가람의 어깨에 놓은 채로 숨소리만 내뱉는다. 어깨가 무거운 가람의 이마엔 작은 선이 그어진다. 그 찌푸려진 미간으로 가람은 은찬의 머리칼을 내려다본다.

집으로 돌아온 가람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엔 은찬만이 남는다. 방에서 가람은 이불을 덮는다. 가슴 끝까지 단단히 이불을 덮은 채로 눈꺼풀을 감는다.

 



이 갑갑해 가람은 눈을 뜬다. 머리 위로는 검은 밤이 펼쳐지고, 눈앞으로는 은찬의 잠든 얼굴이 들여다보인다. 새빨간 머리칼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맺혀있는 검은 그늘을 보며 가람은 눈을 깜빡인다.

검은 밤이 물러나고 하얀 아침이 떠올랐다. 유리를 뚫고 들어온 볕이 가람의 이마를 어루만진다. 잠에서 깬 가람이 눈을 깜빡인다. 은찬은 보이지 않는다. 가람은 침대를 빠져나와 방문을 잡는다. 문고리를 쥔 손바닥 안으로도, 바닥에 디딘 발에서도 한기가 느껴졌다. 그 차가운 발로 가람은 은찬의 문가를 기웃거려본다.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얼핏, 문앞을 서성이는 가람의 등을 누군가 두드렸다. 손끝이 닿은 몸은 화들짝 놀라며 비틀어진다. 놀란 가람의 눈앞엔 물에 젖은 은찬이 서 있었다. 빨간 머리칼이 들러붙은 축축한 목덜미로. 손을 움츠리고 있다.

미안

하는 목소리에,

놀랐잖아.”

가람은 짜증을 낸다. 머뭇거리던 손을 내리며 은찬은,

여기서 뭐 해?”

묻는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빨간 물은 바닥에 닿으면 투명하게 변한다. 물방울이 반짝인다.

학교에 가?”

씻은 모양이었으니까, 그가 어딘가 나갈 거라고 가람은 생각한다.

아니. 방학이잖아. 학교에 왜 가.”

그는 말한다. 가람은 어제 교복 입은 이들을 보았다. 그랬기에 가람의 입이 열렸다.

방학 아니잖아.”

그의 말에 은찬의 입은 다물어진다. 물방울이 이번엔 그의 뺨에 들러붙어 턱선을 훑고 떨어진다. 어깨 언저리에 얼룩덜룩하게 젖은 흰 티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 떨어지는 물방울, 바닥으로 내려깐 눈꺼풀, 서로 들러붙은 속눈썹을 보다 가람은,

학교 가.”

하고 말한다. 은찬은 소리 없이 답한다. 고개가 까닥이고 있었다.

 



관 앞에 선 은찬은 말이 없다. 입술을 깨문 채로 운동화 끈을 풀어냈다가 다시 묶기를 수어번, 깊은 한숨을 쉰다. 일어서기를 주저하는 그의 등 뒤로 홀연히,

안 가?”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은찬은 몸을 일으켜 세운다. 가야지, 한음 한음을 지그시 눌러 뱉는 목소리였다.

그럼 얼른 나가.”

시선을 피한 채로 운동화 앞코로 현관 바닥을 툭툭 두드린다. 망설이는 톡톡 소리에 가람의 미간이 쪼그라든다. 이번엔 은찬의 등을 가람의 손이 두드린다. 아니, 밀친다.

밀쳐진 은찬이 문 열기를 주저하는 새로 이번엔 가람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은찬은 알지 못한다. 문고리를 잡고 석상처럼 굳어있기 바빴기에, 그는 문고리만 매만지는 채로 저가 떠난 뒤에 홀로 남을 가람을 걱정한다. 그런 그의 손을 대신해 가람이 문고리를 돌렸다. 스스럼없이 문밖으로 제 몸을 빼내며.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목덜미에 추위가 둘려지고,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넥타이를 둘러메지 않았기에 휑한 가람의 매끈한 목줄기가 들여다보였다.

지금 가면 점심은 먹을걸.”

은찬의 눈동자가 가람의 얼굴을 더듬는다. 부는 바람이 거세 어쩌면 그저 눈동자도 따라 펄럭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늘상 그래왔듯이 이어왔던 손도 떨어트린 채로 두 사람은 걸었다. 손이 이어져있지 않았기에 신호등 앞에서도 풀 손가락이 없었다. 빈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 가닥만이 몇 잡혔을 뿐이다. 손이 시려 가람은 몸을 떤다. 은찬은 몸을 움츠린다. 가람이 앞서고 은찬이 그 뒤를 밟고 있었다. 나란히 이어지는 발소리만이 차곡차곡 겹쳐댈 뿐이었다.

3교시가 끝나기 직전에 두 사람은 교문에 닿았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에 맞춰 뒷문을 열고 들어선다. 쉬는 시간의 북적스러움이 언뜻 가람의 얼굴을 지날 때마다 입을 다물며 침묵하곤 했지만, 가람은 개의치 않는다. 뒤에서 따라오는 은찬은 여즉 입을 다문 채다.

! 눈길에서 미끄러졌는데 기절한 청가람씨!”

그렇게 부르지 마.”

교실로 들어서자 백건이 반색을 표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은찬은 말없이 자리에 앉고, 가람 역시 은찬의 옆, 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실이잖아.”

기분 나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왜 그래. 안 그러냐, 주은찬?”

은찬의 고개가 황급히 들린다. 입술이 달싹거렸는데 그는 머뭇거리며 웃음만을 얼굴에 띄어낼 뿐이었다. 대답하는 말이 없었다. 허무하게 웃음을 날리는 그를 보며 건은,

대답을 해.”

말한다. 은찬은 조용히 웃는다. 가람의 미간은 구겨진다.

이제 몸은 괜찮고?”

.”

무슨 눈길에서 미끄러졌는데 기절해.”

머리를 부딪치면 기절하지. 한 번 기절하나 안 하나 시험해볼래?”

예의 백건이 말하던 가자미 눈을 만들며 가람이 평온히 말한다. 건은 피식이며 웃었는데, 은찬만이 웃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다. 단단히 굳은 뺨이 피로에 젖어 파리했다.

아팠던 건 청가람인데 왜 니가 이렇게 빌빌거리냐.”

그런 은찬을 보며 건은 말한다. 은찬은 고개를 들어 살짝 웃어 보였는데, 그때 가람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눈에서 미끄러질 때 손 못 잡아줘서.”

퉁명한 목소리가 입술 틈을 섬세히 헤치고 흘러나온다. 은찬의 뺨이 굳는다. 가람의 얼굴 역시 건조하다.

손 안 잡아줘서?”

건의 얼굴에 황당함이 출렁인다. 쪼그라진 미간으로 되묻듯 물어본다. 가람은 그 말에,

.”

하고 퉁명하고 단단하게 말한다. 은찬의 단단하게 굳어버린 옆얼굴을 주시하며. 땅속으로 파고들 듯 바닥에 단단히 박혀가는 시선을 바라보며.

그게 왜 니 탓이야. 혼자 자빠진 얘 탓이지.”

그러게.”

은찬은 엷게 웃는다. 입꼬리를 작게 끌어당기고 미소를 그려보지만, 땅에 들러붙은 시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람은 침을 삼킨다. 목울대가 얕게 위아래로 흔들린다. 홀연히,

그리고 이번에 미안하면 다음에 잘 잡아주면 되지.”

백건이 말한다. 문뜩, 또 그렇게. 가람은 건의 얼굴을 바라본다. 태연자약하고 천진하게 떠오르는 그 낯과 뱉어지는 그 말에,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덤덤한 목소리에 가람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하고.

그러니까 말야

한숨이 차오른다. 가슴이 답답해 가람은 숨을 뱉는다. 나지막하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은찬에게 닿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여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이 입술 새를 더듬는다. 잠든 가람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휘감으며 사이사이로 파고든다. 한기가 실린 밤바람에 목덜미가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빠끔거리며 숨을 토하는가 싶더니 열린 입술을 따라 매끄럽게 눈꺼풀이 벌려졌다. 빨간 눈에 창살 그림자가 닿았다. 가람의 몸 위로 굵은 회색 빗금이 내려 있었다. 달이 떠 있었기에 차가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눈처럼 하얀 빛가지들 언뜻언뜻 내려앉은 이불 속에서 가람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칼이 반짝였다.

하얀 달이 밤 속으로 섞여 들어갔기에 남빛으로 물든 방 속에서도 음영이 생긴다. 어느 곳은 조금 희검고, 어느 부분은 좀 더 묽은 밤빛이고, 어느 곳은 그저 남빛에 불과하다. 남빛 그림자가 끝나는 경계에 검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가람은,

거기서 뭐 해.”

말한다. 끝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로. 은찬은 대답이 없다.

추우니까 문 닫아.”

창틀에 앉은 달이 반짝거린다. 그림자 드리워진 방 안에 스며들어온 달빛 덕에 가람의 머리칼이 빛나고, 그 덕에 얼굴에 칠해졌던 밤이 조금은 걷혔기에, 은찬은 가람의 얼굴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지만 쳐다보지 않는다. 문고리가 삐걱이는 소리가 난다. 작게 사각거리는 손톱질 소리가.

나 이제 잘 거야.”

손톱질 소리가 멎는다. 가람은 침대 위로 몸을 눕힌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가나 싶던 손이 공중으로 들린다. 허공을 할퀴기라도 하는 셈일까, 밤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달빛이 따가워 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람은,

안 자?”

하고 묻는다. 손을 든 채로. 그 손바닥엔 시트 끝자락이 들려있어 마치 옷깃을 열어 품을 내보이는 이 마냥, 제 옆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은찬은, 말없이 서 있는다. 눈동자로 제 발밑만을 더듬기 바빠 어쩌면 제 품을 보지 못하고 있으리란 생각에 가람은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주은찬.”

하고 이름을 부르고,

어두워서 네가 잘 안 보여.”

하고 목소리를 붙인다. 은찬은 머뭇거린다. 한 번 가람을 바라보고, 한번 시선을 피해 어둠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다가오지도 뒷걸음질 쳐 달아나지도 않는다. 얇은 숨소리가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가람은 손을 내린다.

이리와.”

누였던 몸을 다시 세우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등 뒤로 내리쬐는 달을 받아낸 갈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얼굴은 어둡고 머리칼은 밝다. 그 얼굴로 가람은,

주은찬.”

이름을 불렀다. 한기에 창백한 솜털이 바싹바싹 오른 몸으로. 손을 들었다. 내민다. 내민 손바닥 사이로 새하얗게 달빛이 떠오른다. 그 흰 불빛을 따라 은찬의 입술이 달싹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가는 가람의 손금 위를 더듬는 손가락이 있었다. 가냘픈 선을 긁어대는 손톱, 그 손끝을 가람은 약하게 움켜쥔다. 그러나 단단하게. 손을 잡았다. 머뭇거리는 무게감이 침대 위를 눌러온다. 이어 묵직한 따뜻함으로 가람의 옆자리에 차오르고 있었다. 손을 인 채로 두 사람은 잠이 든다.

 



음 날 아침에도 눈을 뜬 가람의 앞엔 은찬이 머리칼이, 잠든 눈꺼풀이, 살짝 벌려진 입술이, 그 틈 사이로 잇새가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가람은, 그 평온한 낯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손을 뻗는다. 손끝으로 조심히 빨간 머리카락을, 그 뺨을,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민 단정한 귀를, 입술 밑에 점을 쓸어보았다. 주은찬은 따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엘리스

2016. 01.

 

 

 

 

Thanks to. 주은찬, 청가람

E u n c h a n X G a r a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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