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2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
햇빛에 공기들이 뽀송하게 메말라 있다. 따뜻한 볕으로 잠식된 강의실에선 세탁실 속 잘 마른 빨래의 숨 내음이 풍겨왔다. 혹은 온실 안 관엽식물의 풀 냄새. 메마른 잎사귀가 건조한 공기에 비벼질 때마다 뱉어내는 건한 향취가 교실 위를 웃돌고 있었다.
소리 없이 따뜻한 입김을 조용히 내뿜는 히터 옆에 안착한 가람은 두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형틀처럼 그 모양 그대로다. 팔 한번 저려 고개를 들 법도 한데 교차로 모양으로 틀어놓은 제 팔뚝을 수면 베개를 대신해 부둥켜안고 고개를 파묻은 채로 꾸벅꾸벅 잠을 잔다.
타래를 꼬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깨선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중 몇 가닥이 커튼처럼 뺨 위에 듬성듬성 드리워져 있다. 얼굴 위로 굵직한 머리칼을 따라 그림자 역시 기워져 있었다. 사진과 달리 가까이에서 본 가람의 머릿결은 부드러워 보였다. 뒤통수에 가지런히 붙어있는 갈색 머리칼은 부드러운 털천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건드려보고 싶을 정도로. 손은 닿지 않았다.
백묵 꺾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펜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벨소리 따위가 서로 엉키며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한데 뒤섞인다. 그 사이로 엷은 속눈썹이 흐트러진다. 엉겨 붙었다 떨어진다. 은찬은 그 속에 담긴 빨간 눈을 바라본다. 다시 눈이 감긴다.
*
가람의 눈꺼풀이 열린 건 그보다도 한참 더 시간이 흘러 뙤약빛 내리쬐는 한낮 정오에 이르면 교내 전역에 울려 퍼지는 점심시간 라디오 방송이 중반은 훌쩍 넘어갈 즈음이었다. 은찬은 그로부터 조금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입을 반쯤 벌리고선. 그의 입 가장자리에 언뜻 침이 들러붙어 있기도 했다.
제 몸 위로 겹치는 음악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무료한 낯빛으로 제게 들러붙어 있던 머리칼들을 한만히 여겼다. 정면을 가리던 머리칼은 무심한 손길로 귀 뒤편으로 쓸어넘기기도 했지만, 가지런히 정돈할 요량은 아닌 듯 보이는 손가락들이었다. 주름투성이 못난 아코디언처럼 찡그려진 미간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소 거칠은 그 몸동작이 의자가 앓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수선한 공기가 소곤거리며 자아내는 소음에 은찬의 눈이 반짝 떠졌다. 몸을 따라 비틀린 의자가 덜컹이는 소리를 내었다. 쇠를 비비는 의자의 요철소리가 요란하게 벽을 때리며 울려퍼졌다. 홀연히, 벽 위에 처박힌 소리를 따라 뒤틀린 가람의 고개가 설핏 은찬의 얼굴 위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맥없는 연기처럼 스쳐 가버린다. 어느샌가 가람은 문밖으로 몸을 비어 내밀고 있었고, 넋을 놓고 있던 은찬은 뒤이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녀의 발자국을 뒤따라 밟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식엔 검은 머리들이 빼곡하게 자라난다. 언제 어디서 이렇게나 많이 자라난 걸까, 싶을 정도로. 이 건물 저 건물 사이에 움트고 자라나던 머리카락들은 너나 할 세 없이 모두가 자그마한 지하 학식에 모여 검은 인해를 만들어낸다. 북새통을 방불케 하는 그곳에 늘상 남들보다 30분은 먼저 제 몸을 박아넣던 은찬이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편의점 한 칸 내벽을 차지하고 있는 유리 진열대만을 기웃거리고 있다. 갸웃거리는 빨간 머리칼 너머로 삼각김밥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은찬은 소리 죽여 발을 옮기며 그녀의 옆으로 몸을 옮긴다. 음료를 고르는 척 엷은 종이 곽에 담겨있는 우유를 실없이 눈대중하고 들었다 놓기를 별 뜻 없이 반복했다.
눈길을 아래로 내보내고 있어 내리깐 눈두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숨길한 속눈썹들이 푸르르 떨렸다. 봄 입김에 바들대는 가는 이파리처럼. 숨을 따라 찰랑인다.
그는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뺨을 살펴본다. 그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여즉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 채로 빼곡한 삼각김밥 하나하나를 꼼꼼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뒤적거리며 서 있다. 신중한 그녀와 달리 그는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하얀 뚜껑의 하늘색 음료를 고른다. 계산대로 향하기 전 중간 크기 컵라면 하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그가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챙겨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김밥들 앞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가 문을 열고 나서기 전, 그래서 작은 쇠종이 미처 울지 못했을 때, 그녀의 손이 삼각김밥을 지나쳐 오른편에 있던 음료수 하나에 내려앉는다. 그녀의 점심식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
오후의 하늘엔 구름이 짙게 끼었다. 해는 구름 뒤로 숨었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그 바람에 볕이 문턱 닳도록 강의실 너머를 드나들었다. 이따금 환해졌다가 일렁이는 그늘들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바닥으로 드리워졌다. 잿가루 뒤집어쓴 듯 모두의 얼굴이 어둡다. 그 속에서 가람은 또다시 잠을 자고 있다. 꺾여진 손목이 금방이라도 바닥을 향해 고꾸라질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십자모양으로 교체해 꼬아놓은 그녀의 종아리, 선을 따라가다 보면 닿게 되는 왼쪽 발목. 그 옆에 빈 음료수병이 놓여있다. 그녀가 몸을 뒤치락거린다. 병은 쓰러진다. 은찬은 하품을 한다. 다시 그늘에 휩싸인다.
*
오후 네 시가 되자 구름 걷힌 하늘이 비로소 파란 안색을 내비쳐 보였다. 청명히 맑았다. 여름 소나기 후에 펼쳐지는 하늘처럼 새 푸르다.
가람이 연이어 눈을 붙이던 강의실이 위치한 1공학관은 뒤편 쪽문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작은 샛길을 가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열 발자국도 채 되지 않아 포장되지 않은 진흙길이 나오는데 띄엄띄엄 징검돌처럼 보도블록 조각들이 박혀있다. 조각을 디뎌 걸음을 옮기면 작은 돌계단이 나오는데 그 돌계단 끝에 서면 체육관으로 들어서는 쪽문이 보인다.
잘못하면 운동화 밑창 무늬를 따라 촘촘히 진흙이 들러붙는 그 길은, 정면에서 나오면 다섯 개의 벤치를, 여름이면 포도송이 같은 연자줏빛 꽃들을 피워내는 건강한 등나무가 꽈리를 튼 천막 하나를, 그리고 세 개의 건물을 지나 펼쳐지는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도착할 수 있는 체육관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가람은 그 길을 알았고, 은찬은 그 길을 몰랐다. 지금 그녀는 질퍽한 뒷길을 통해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고, 그는 지금 정문에 서 있다.
은찬은 가람의 모습이 보이길 기다렸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참이나 머리를 긁적거리며 부산스러운 인파 속에 그는 홀로 놓여 있다. 다양한 발소리가 그의 곁을 스쳐 갔다. 또각이는 높은 하이힐이 내는 날카로운 소리, 딱딱한 돌계단을 찍는 발굽 소리, 계단 가장자리에 박힌 쇠 코를 지나가는 운동화의 저벅임들이 그를 스쳐 간다. 움직이는 발소리 사이에서 그는 홀로 서성거리고만 있다.
소리들이 떠나간 정문에서 그는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본다. 어두운 낭하 구석끄트머리에서 떠오를 이를 기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다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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