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암전 ( 暗轉 : 箭 ) sample 2

 [은찬가람/찬가람] 암전 ( 暗轉 : 箭 ) 


sample 2




실 전체가 어두침침하고 창밖의 풍경 또한 탁한 회색빛이었기에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착각이 가람의 안에서 일고 있었다. 창가의 자리에서 가람은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매캐한 매연을 눈으로 들이마시기도 하면서.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과 달리 얼키설키 꼬인 뒷머리 밑으로 뻗어내려가는 목줄기는 빳빳하게 굳어 쉬이 누그러질 것 같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은 목줄기는 그럼에도 가냘파 보였다. 힘이 들어차기엔 얄팍한 몸덩이의 선을 가람은 지니고 있었다.

창밖의 잿빛이 몸을 비틀며 일렁이는가 싶더니 제 몸을 더 깊게 변모시키며 교실 전체를 삼켰다. 문틈 밑으로 고개를 내밀던 몇 안 되던 나뭇가지와 그 옆에 달려있던 낙엽들 위에는 짙은 그늘이 덧씌인다. 교실 안을 성긴 낙엽처럼 넘나들던 이들의 얼굴 위로도, 네모난 교실 속에 빼곡히 차오른 매끈한 나뭇결의 책상 위에도 얄팍한 잿빛이 덮였다.

홀연, 가람의 고개가 교실 뒷문을 향했다. 귀를 때려오는 둔탁한 목소리가 먼저였고, 그 뒤를 밟듯이 들려오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람의 고개를 이끌었다. 활짝 젖혀진 뒷문 새로 은찬이, 그 뒤를 줄줄이 소시지처럼 타인들이 몸을 들이밀며 교실로 차오르고 있었다.

교실 전체가 어둑한데 단 한곳만이 뚜렷이 하얀색으로 번뜩이는 웃음소리로 물들어간다. 퍼지는 그 빛, 열 여덟, 아직 미성숙한 소년의 영혼을 지닌 이들의 얼굴 위론 생생함과 싱싱함이 살아있었지만, 가람은 퍼석하고 메마른 눈길만을 그들에게 던질 뿐이었다.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면 퐁 하고 소리가 나듯이, 가람의 시선이 은찬의 몸에 던져졌고 꺾이었다. 뺨을 긁고 간지럽혀오는 그 생생한 목소리에 등 뒤로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가람은 은찬을 외면했다.

가시같던 시선이 제 몸에서 뽑혀나가던 순간을 은찬을 놓치지 않았다. 얇은 주름이 진 습자지처럼 매끄러운 입가가 구겨졌고, 그 선은 입술 가장자리를 따라 부드럽게 휘어들어갔다. 그가 웃었다. 웃으며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미진 그 등덜미를 바라본다.

허연 웃음 속의 그들은 저마다 제 빛을 뽐내듯 큰소리로 웃음을, 욕지거리를, 농담을 내두르기 바빴기에 은찬은 흔적없이 제 몸을 빼내올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철퍽이는 발소리가 점점 거리를 좁히며 가람의 귓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을 비비며 떨어지는 밑창 소리의 끝은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날이 선 듯 차가운 음성이었다.

청가람.”

반대로 손등을 덮는 손바닥은 부드러우며 다정해보였다. 그 맞닿은, 은찬의 손바닥에 먹혀 검게 변한 제 손등 위로부터 서서히 몸 전체를 비비며 엄습하기 시작하는 소름과 역겨움을 가람은 느꼈다. 아침처럼.



*


 

 

잤어?”

네모난 식탁에서 둘은 얼굴을 마주한 채로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국과 밥에선 아직도 뜨거운 김이 생생히 피어오르는데 따듯함은 없고 집안을 빼곡하게 매우는 건 차가운 금속의 냉랭함 뿐이었다.

한가닥 빛줄기가 갈색 바닥 위에 스며들었다. 캬라멜빛으로 반짝이던 장판은 곧내 밀려온 탁한 구름에 의해 빛을 잃고 퇴색한다. 창백하고 파리한 안색의 거실은 오밀조밀 차오른 가구 탓에 아늑해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살풍경하다못해 쌀쌀한 향기가 풍겼다. 폭신한 질감에 아늑해보이는 진회색 소파와 얼룩하나 진 곳 없이 청량해보이는 베이지색 커튼, 적당한 사각지대에 놓여 눈요기가 될 싱싱한 관엽식물들도, 그 이파리와 이따금 피어난 꽃줄기도, 커다란 티비 외벽에 들러붙은 네 명의 가족사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거실은 쓸쓸했다. 아니, 되려 거실의 아늑한 정경을 헤치는 것은 저 커다란 액자가 주는 위압감과 이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차가운 거실 속의 액자에서 방금 빼낸 듯한 세 사람이 있었다. 한껏 다정함을 취한 사진속의 그들은 이질적이기 그지없다. 싱크대 앞을 서성거리며 분주한 척 국의 간을 보았다가 물을 마시기도 하던 그녀가 초조한 낯빛으로 가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제 단단한 침묵의 낯을 두드려오는 여인의 눈동자를 느꼈지만, 가람은 고개 한 번 드는 일도, 딱딱한 낯을 펴내는 일도 없이 묵묵히 밥알을 입 안으로 떠넘기고 있었다.

가람의 침묵을 두드린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은찬 역시 가람의 단단한 안면이 빼꼼하게 갈라질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 틈은, 생각 외로 쉽게 도렷하게 가람의 수심 위로 튀어올랐다.

기분은 좋았어?”

유리 자기와 금속성이 맞물리며 맑은 소리가 정적 위로 선연히 퍼지고, 동시에 가람의 얼굴 위가 퍼석하게 갈라졌다. 입술을 깨문다. 그 위로도 주름이 갈라졌다. 주름은 입술 산을 타고 올라가 콧등을 짚고, 이마를 한껏 쪼그라들게 만든다.

좋은 꿈 꿨냐고.”

금세라도 손끝으로 건드리면 터질 듯 부풀며 농익은 연시처럼 가람의 귀가 주홍빛으로 열을 냈다. 그 열은 수치심이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탓에 은찬의 볼 한가운데 어둡고 습한 물구덩이같은 보조개가 패여 있었다. 그 낯이다. 간밤에도 은찬은 저러한 낯빛으로 가람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달로 곱게 접힌 눈과 그늘진 구덩이를 팬 보조개로.

쓰레기.”

식탁의 유리가 삐걱이며 차가운 얼음같은 소리를 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가람이 냉랭한 눈으로 은찬을, 그리고 뒤로 뻗어 씽크대 근처 땅위로 단단히 제 발을 뿌리처럼 박아 넣은 여인에게 찔러댄다. 잔뜩 날을 갈아 서슬퍼런 시선은 여즉 칼 같았지만, 귀는 봉숭아물을 들인 양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네가 좋은 꿈을 꿨길 바래.”

이죽이며 은찬은 웃었다. 입술이 걷히고 드러난 이의 표면이 매끄런 건반처럼 빛을 받아 반짝였다. 거친 끓음을 그려내며 의자가 뒤로 밀렸다. 자리를 박찬 가람이 성큼성큼 문으로 걸음을 향했다.

같이 가.”

웃음기가 녹아든 목소리를 능청맞게 던지며 은찬은 가람의 자취를 밟아 걸음을 놀렸다.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질 듯 넓혀졌다가도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그 거리가 줄어든 것은 굳게 다물린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입 앞이었다. 그 닫힌 양철입처럼 가람의 입은 딱딱하게 맞물려있었다.

뭘 그렇게 열을 내.”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듯이 가람의 옆얼굴을 기웃거리며 그가 말한다.

좋은 꿈 꿨다고 말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꾸게 해줬잖아.”

시발.”

다음에 또 꾸게 해줄게.”

움츠러든 작은 목소리로 귀를 파고들어오며,

손으로.”

호흡하듯 속삭인다.

미친 새끼야!”

미쳤다니. 너무 심하네. 기분 좋게 해준 사람한테.”

거리가 좁혀졌다. 어깨를 움츠리며 찡그린 미간과 경멸이 뒤범벅된 눈으로 가람이 은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차례 더 거리가 좁혀져 어깨와 어깨 사이의 거리가 줄어졌다. 금방이라도 들러붙어 맞비벼질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손대기만 해봐

손대면?”

은찬의 손끝이, 지문이 서서히 다가와 가람의 어깨에 낮았다. 가볍게 두드린다.

미친 새끼야.”

주은찬이.”

앞의 소리는 컸지만, 뒷말은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공기 중에 녹아 사그라질 듯 가벼워, 바람에 꺽여버린 풀벌레 소리처럼 자그마했다.

내 좆을 만져줬어요.”

속삭여진다. 은찬은.

변태새끼. 죽어버려.”

손바닥을 들어 가람의 앞에 흔든다. 손바닥 안 촘촘한 손금이, 손길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콧등이 지문에 닿을 정도로, 가람의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직도 간밤의 수음의 향이 풍겨내듯 콧등을 간지럽히는 은찬의 손바닥이, 손가락이.

시발.”

그가 웃는다.

선연히 퍼지는 웃음소리가 가람과 주변 사이에 어렸다. 간밤의 괴여있던 잔흔이 가람의 얼굴 위로 서서히 붉게 엉기는 풍경을 보며 은찬은,

안 타?”

하고 웃었다. 웃음소리에 맞춰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었고, 거대한 함문이 서서히 벌려졌다. 양철상자 속으로 먼저 발을 들이 밀은 건 은찬이었다. 회색의 딱딱한 상자, 그 속에 은찬이 웃으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가람은 그 속에 속하기를, 발을 넣어 들어서기를 주저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문 사이로 빠져나온 하나의 팔줄기에 붙들려 그 속으로 가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

 

벼운 솜털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듯, 은찬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람의 손등을 문질렀다. 주름 하나하나가 지문이 되어, 가람의 지문을 제 지문으로 스며들게 하려듯 지긋하게 끈적한 손놀림이었다.

가람은 우두커니 있었다. 입술을 얕게 물고, 속으로 이를 드러세우며, 잇새 사이로 침을 내뱉기를 망설이는 새, 은찬의 손가락이, 손톱이 가람의 손등을 세차게 휘갈기며 새빨간 줄을 그리며 지나갔다.

있다 밤에 봐?”

웃음기가 절어든 탓에 달큰한 음성이 아롱거리며 고막에 달라붙었다. 미처 들러붙지 못한 잔음이 메아리를 불러일으키며 귓속에 퍼져간다. 그 소리 아득했다.

가람의 마음 안 쪽에 성긴 유리조각이 박힌 듯 쿡쿡 아려왔다. 그 고통에 이를 세워 입술을 짓물러 으깨듯 깨물며 책상으로 고개를 박았다.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종일 힘껏 짓누른 탓에 자줏빛 멍울이 맺힌 입술로 가람은 문을 잠그고 있다. 거듭 잠금쇠를 확인하며 잠긴 문고리를 거세게 당기었다 놓아보기도 한다. 힘을 얼마나 준 걸까, 방문 손잡이를 당기느라 팽팽해진 가람의 팔줄기가 가냘픈 진동에도 끊길 듯 떨리는 현처럼 보였다. 팔의 연주는 그 후로도 서너번씩 다시금 반복되어졌다.

문고리와의 한바탕 씨름 후, 가람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아른거렸다. 온 방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기에 그 얼굴이 더욱 더 그렇게 빛을 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눈꺼풀 위, 살짝 누그러진 뺨, 그 뺨을 에워싸며 그려지는 턱선에도 안도감이 들어차 앉은 듯 보였지만, 작게 꿈틀거리는 어깨와 저릿한 듯 흔들리는 팔줄기가 미약한 불안을 표하고 있었다.

창문은 어느새 해가 잠들어버린 짙은 남빛이었다. 남색 물감을 풀어 저며놓은 듯 구름 한 조각 그려있지 않아 여백없이 검은 색으로 칠해진 하늘은 확실한 밤이었다. 백열등 훤하니 방안만 땡볕이 내리쬔다. 침대 구석에서 등을 대나무처럼 단단히 곧추세운 채 가람은 문만을 노려보고 있다. 쉬이 부러지지 않을, 뻣뻣한 모양의 가람은 그 자리에 돋아난 죽순처럼 흔들림이 없다. 간밤처럼 불시에 습격해올 소리에 숨을 죽이고 움츠러들어 겁을 먹은 듯 보이기도 했다.

얇은 한가닥 실과 같이 작은 숨을 내뱉으며 문밖에서 빈틈을 노려 엄습해올 발소리를 기다렸다. 제 숨소리에도 놀라 넘어지듯 가람은 아릿한 허리를 편히 만들기 위해 몸을 비틀다 억눌린 매트리스가 내는 삐그덕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등줄기를 튕겨대었다. 황급히 눈동자를 끌어올려 문고리에 걸었다. 닫힌 문의 잠금쇠는 단단히 고정된 상태로 편안한 듯도 보였다. 그 동작은 창문 사이로 해가 바짝 고개를 들이밀며 가람의 얼굴을 따갑게 쏘아볼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언뜻, 가람은 선잠을 졸았던 듯도 하다. 해가 볕 한줄기를 가람의 입술 사이를 헤집기 위해 비벼댄다. 햇볕이 더듬는 손길따라 가람의 고개가 피었다. 볕이 따가운 손길로 제 뺨 이곳저곳을 매만지는 통에 얼굴이 불덩이 같았다. 그 볕에서 몸을 비켜나, 손길에서 달아나며 필름을 덧씌운 듯 어둡게 드리워진 그늘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한기를 느끼는 양 몸을 움츠리며 등줄기를 얇게 떤다.

오전 아홉시가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간밤엔 제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안도감이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얄팍하고 가냘픈 기름막은, 거품같은 안도감이 굳게 닫힌 문을 열자 마주한 얼굴에 퍽하고,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채로 맥없이 터져버렸다.

잘 잤어?”

햇볕을 고아 모은 양 화사하게 발하는 은찬의 낮을 마주한 가람의 얼굴이 가뭄든 밭처럼 메마르더니 주름을 그리며 갈라졌다. 가뭄은 이마에 깊고 진하게 박혀 있었다.

나 안 기다렸어?”

꺼져라.”

어제 문도 잠겨있던데내가 무서웠어?”

징그럽다고 말을 붙이는 편이 더 어울렸다. 그 얼굴은.

너 따위를? 내가?”

그럼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 잘난 얼굴 아작내버리기 전에.”

활기찬 곡선이 은찬의 얼굴 위로 떠올려졌다. 그것은 입술이었다. 배처럼 곱게 휜 아랫입술을 내리며, 입술을 벌려 그가 말한다.

무서워라.”

음성은 흔적도 없이 정적 중에 휘날리었고, 대화는 말끔히 지워졌다. 가람은 다시 문을 굳게 잠그며 이불 안으로, 햇볕과 은찬에게서 보호해줄 단단한 방공호, 제 방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속은 포근했기에, 거듭 눈을 부르뜨며 정신을 지키기 위해 제 볼을 꼬집던 가람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궈졌다. 눈꺼풀이 감겨있다. 얕은 숨을 내쉴 때마다 애처로운 속눈썹이 바르르, 입김에 떨리었다. 가람은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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