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happy bitrhday to me

[은찬+가람/찬가람]  happy bitrhday to me

 

* 이미 지나버렸지만, 가람이의 생일을 기념하며.

* 생일 축하합니다, 청가람.

* 찬가람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날조 설정 주의!

 

 

 

 

고소한 참기름 내가 온 집안에 진동이다. 잠에 취해있던 이들이 저마다 허기진 배로부터 끓어나오는 울음에 눈을 뜨고, 코를 킁킁대며 거실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 밥이 기다리는 모양새가 꼭 고기 삶는 냄새에 취해 집 앞에 옹기종기 모여드는 떠돌이 개들이 따로 없다.

무릇 다른 가정들도 그러하듯, 아침밥상은 으레 엊저녁에 먹었던 반찬들이 주를 이루는 게 보통이었다. 아무리 가람이 살림을 자처해 도맡고 있다 한들, 피로한 아침밥상은 초라한 게 사실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무장아찌나, 쉬이 상하지 않도록 간장에 절여놓은 메추라기 장조림이라던가, 고기줄기 하나라곤 눈을 씻고 찾아낼래야 찾아낼 수 없는 갈비찜과 물을 더해 뎁힌 것이 분명한 말간 국이 아침 반찬의 전부였다. 운이 좋다면 계란 후라이 서너 개쯤은 올라있을 수도 있으리라.

오늘 아침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무장아찌도, 메추라기 장조림도 그대로였지만, 국만큼은 아침에 새로이 끓인 것이 분명한 말간 미역국이었다. 큼지막한 소고기가 듬성듬성 미역 줄기 사이에 박혀있기도 했다.

“미역국? 오늘 무슨 날이야?

“꼭 무슨 날이어야 미역국을 먹습니까. 주작공자, 그런 단순한 뇌 구조는 버리시죠.

“야, 사람이 말을 하는데

얼굴 위로 떠올랐던 영문은 그릇에 코를 박고 음식을 해치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 사이로 매끄럽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가람은 그저 수저를 들어 국을 뜨는 시늉만을 해 보이고 있을 뿐으로, 몇 가닥의 미역 줄기가 젓가락 사이로 집히는가 싶더니 다시금 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 먹고 그릇이나 제대로 담가나.

말을 끝으로 가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밥상을 떠나버렸다. 밥알이 성한 그릇을 들어 무성의하게 개수대에 털고, 물속에 담가버린다. 찰랑거리는 물표면 사이로 맑고 고운 수저의 울음이 울려 퍼지고 이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쓸모없는 돼지들.

나지막한 음성으로 뱉은 말을 잘근잘근 밟듯 느린 걸음으로 가람은 거실을 떠나온다. 이윽고 혼자가 된 방안에서 그는 몸을 누여본다. 체온이 머물던 거실과 달리 방안은 쓸쓸했고, 허전했고, 적요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방 한쪽에 물기 어린 얼룩이 져 있다. 얼룩이 쉽게 게워지지 않아 힘을 주어 손등으로 눈두덩을 닦아내 보았지만, 여전히 시야가 희뿌옇다. 그의 주변을 겉도는 공기들은 비 오는 날 습기를 머금은 양 축축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공기를 떨궈내 보지만, 그럴수록 그를 향해 달려 들어왔다.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아침준비를 하느라 아직 제 몫을 채우지 못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또 이 축축한 잔상들을 게워내기 위해서. 다행스럽게도 얼룩은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지워졌다. 밖은 이토록 환한데 그만이 여즉 어둠 속이다.

 

 

 

오전은 잠으로 모조리 소비했다. 우선, 자꾸만 눈앞에 이는 잔상 때문에 눈이 시렸고, 두 번째로 깨어있다 한들 수련을 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 오전은 휴식을 취하기엔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역시나 세탁기를 돌리는 일이었다.

사내가 넉이나 모여사는 집이니 하루 지나면 빨랫감이 산처럼 쌓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두를 일이 아님에도 그는 분주한 몸짓으로 세탁기에서 몸을 떨어트리기 무섭게 개수대로 향했다.

역시나, 말라붙은 밥알이 역력한 그릇이 그를 반겼다. 찰랑거리는 물 위로 떠다니는 그릇 안에만 가뭄이 든 양, 삐쩍 하게 곯아 말라붙은 밥알들이 생생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가람은 뜨거운 물을 틀었고, 서두르는 통에 손등을 데고, 빨갛게 달아오른 손가락으로 설거지를 해내었다. 밥알이 뜯겨나가지 않아 몇 번이고 수세미가 걸렸다. 뜨거운 증기 속에서 그는 눈을 깜빡이며 묵묵히 설거지를 해내었다.

청소기를 돌리며 장애물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누워있는 현우를 향해 욕지거리를 던지고, 제대로 개켜놓았을 리 만무한 방안의 이불들을 모조리 마당으로 던지고, 빨랫줄에 널며 그는 바쁘게, 바쁘게 몸을 놀렸다. 성급한 그의 뒤꿈치를 따라 자꾸만 잔 얼룩이, 먼지가 인다. 이불에서 튿어진 먼지들이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 풀처럼, 샛별처럼, 번뜩거리며 소멸했다. 이따금 빨간 실 가닥이 반짝하고 땅을 향해 주저 없이 추락하기도 했다.

담 귀퉁이에 해가 어느샌가 몸을 눕혔다. 정오를 넘긴 그 시각까지 뭣 하나 제대로 된 찬을 제 위에 넣지 않은 그에게 돌연 허기가 찾아왔다. 미역국에 찬밥 한 덩이 말아 먹으면 달래질 허기였다. 아침에 차린 찬 그대로 먹다 남은 국이나 데워 요기를 하려던 가람의 등 뒤로 훼방꾼이 나타났다. 훼방꾼은 나지막하고, 무덤덤한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자로 무던히 뻗어와 등을 두드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백건이었다. 성한 혹덩이, 현우까지 제 뒤에 매단 채로 ‘밥 줘’라는 두 음절을 뱉었다. 방금까지 낮잠을 잘 요량이었는지, 하얀 적삼을 걸쳐 입은 현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건은 그 앞에서 ‘밥’이라는 한 음절로 대화를 단절시키곤 식탁 앞에 앉았다. 가람은 늘 그랬듯, 눈살을 찌푸리며 뜨신 밥을 퍼내었다.

“다른 반찬은?

“주는 대로 처먹어라.

“오늘따라 왜 이리 까칠해.

“그날인가 봅니다.

“그날?

대꾸할 가치도 없어, 가람은 묵묵히 냉장고에서 차가운 반찬 통을 꺼내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식탁에 내던지듯 놓았다. 투명한 유리 군데군데에 서리가 하얗게 오르며 얼음꽃이 피었다. 이어지는 투정을 무시한 채 가람은 마당으로 빠져나왔다. 허기도 도로 가신 터였기에 밥술 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묵직한 솜이불을 눈에 담고 있는 가람에게 돌연, 낯설고 적막한 삐걱거림이 귓불을 쓰다듬어왔다. 소리의 진원은 대문이었다. 나무문이 얄팍한 바람에 흔들리며 한쪽 모서리를 움츠렸고, 그에 따라 가람의 왼쪽 볼이 쪼그라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지만, 이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 틈으로 삐걱이는 나무문의 소리, 퀴퀴한 내를 따라 이질적인 사내의 면 낯이 가람의 눈앞에 드러났다. 택배기사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품에는 갈색의 상자를 안고 있었다. 사내는 조용히 가람의 이름을 부르고, 가람은 상자를 받았다. 상자에선 울적하고 침침한 곰팡이가 스며든 듯 축축하고 이질적인 냄새가 났다. 그 위에 쓰여있는 제 이름조차도. 동글동글하게 어디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살가움이 배 있는 그 글자, 청가람.

 

 

 

 

상자는 마치 풍경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거실 외벽에 놓여졌다. 수년에 걸쳐 쌓아 올려진 하얀 내벽의 갈색 얼룩과도 맞물려, 한 폭의 그림처럼 얼룩과 상자는 제법 잘 어울렸다. 진한 호기가 건과 현우의 얼굴에 세워졌지만, 상자 위에 쓰여있는 정확하고 또렷한 ‘청가람’ 세 글자에 잘려나갔다.

“뭘까요.

“옷 아냐?

“오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제 겨울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막 이렇게 둬도 돼?

“그러게나 말입니다.

상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상자는 지구, 두 사람은 달이다. 호기심이 인력이 되어 둘을 당긴다. 단단히 중심축을 지탱하는 상자를 어느샌가 거실 중앙으로 끌고 온 두 사람은 주변을 빙글빙글 공전한다. 궤도가 일그러지며 모서리에 현우의 무릎이 닿았다. 그 충돌을 시발점으로 두 사람은 결국 호기를 이기지 못한 채로 택배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상자 위로 단단히 덮여있던 테이프가 찢기는 고통에 성난 목소리로 공기를 찢었다. 테이프의 세찬 갈퀴질 뒤로 또 한 번의 갈퀴 질이 연달아 이어지는 새 상자는 입을 헤 벌려 내용물을 내보이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겨울옷이었다. 옷과 옷, 천 더미로 이루어진 산을 만들며 두 사람은 기어코 상자의 밑바닥까지 보고서야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보통 이럴 땐 간식이라도 하나 넣어주지 않던가요?

“그러게. 쌩 옷뿐이야.

지루함이 그 둘을 덮쳐왔다. 이윽고 아주 약간의 겁이 덜컥 돌았다. 말하자면, 가람이 두려워서가 아닌 양심의 가책이라고 할 물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은 허겁지겁 상자 안으로 옷을 쑤셔 넣었고, 그러던 통에 옷 틈에서 잠들어있던 카드를 깨웠고, 바닥에 떨궈진 그것이 미처 상자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새를 주지 못하고 상자를 닫았다.

“여기서 뭐 해?

별안간 낯선 음이 두 사람의 뒤통수를 때렸다. 화들짝 놀라 온몸을 상자에서 떨어트리며 건과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안도감에 가슴이 사르르 가라앉았다.

“뭐야, 너 벌써 왔냐.

“너야말로 학교 땡땡이치고선.

“주작공자, 앞으로 기척 좀 내고 다니십쇼. 도둑입니까?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선.

“누구보고 도둑이래, 도둑질은 니들이 하고 있으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람이 아닌 은찬이었다. 현우는 핀잔을 던지고, 다시 상자를 싸기에 여념이 없었고, 은찬은 물끄러미 어깨너머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상자 윗면에 생경한 세 글자가 보였다.

“멋대로 뜯어본 거야? 화낼 텐데

“티 안 나게 다시 붙여놓으면 될 일이지요.

악력에 뜯겨나간 테이프가 상자의 살점을 얼기설기 물어뜯어 놓았기에, 상자는 생채기가 그득했다. 아무리 테이프를 반듯하게 붙여놓는다 한들, 한번 뜯어낸 감촉을 지워내기엔 무리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청룡공자 성격을 몰라서 그럽니까?

“상자에 물을 뿌려볼까? 망가졌다고 하면 되지.

“오, 위장술입니까? 그거 좋네요.

“정말 큰일 나기 전에 그만둬.

빗발치는 말소리 틈으로 아연히 한줄기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그에 따라 모두의 입이 다물렸고, 은찬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가람이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이건

현우도 건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덫에 걸린 쥐꼴이 따로 없었다. 은찬은 황급히 저가 한 일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지만, 물증은 명백했고, 심증도 갖춰줬고, 그의 결백함이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람의 안면이 굳어있다.

“왜 남의 것을 멋대로 열어 봐?

“아니, 그러니까 억울하네.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정말 나 아냐.”

됐어.”

내 말 좀 들어봐.

“뭘 들어보는데?

그가 고개를 숙인다. 가람은 제 발끝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테이프를 짓이기고 있다.

“멋대로 뜯어본 건애들 대신에 내가 사과할게.

테이프가 제멋대로 가람에게 달려든다. 하나하나 일일이 제 손안으로 넣어, 그러쥐고, 짓이기며 그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냥애들이 너 대신 뜯어봤다고 생각해.

가람의 손이 멎었다. 은찬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 본다. 음절, 한 음절이 가람의 귓바퀴를 타고 흐를 때마다 얼굴이 흐려졌다. 얼굴 곳곳에 잔물결이 인다. 뺨 위에 내려앉은 물 주름을 은찬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냥 네 수고 하나 덜어줬다고 생각하고…, 말 나온 김에 내가 다시 뜯어줄까? 정돈도 해줄게.

은찬이 상자의 문을 튿는다. 실밥이 뜯기듯, 상자가 맞비비며 내는 소리 위로 은찬의 허울 좋은 말들이 얹혀지고, 또 그 위로 얹혀지고. 가람의 얼굴 위엔 주름이 박혔다

“와, 겨울옷이네. 겨울이라고 보내주셨나 보다! 예쁘다, 그지?

일인극이 따로 없었다. 은찬은 옷을 꺼냈고, 제법 밝은 척, 지금의 위기를 수월하게 넘기기 위해 한껏 웃으며 가람을 돌아보았다. 가람의 안면은 딱딱하게 주름져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축축한 질감으로 물렁거리고 있었다.

“내뱉는다고 다 말이 되는 게 아니야.

가람은 그 한마디를 내뱉은 채로 뒤돌아 문을 빠져나갔다. 아연.

 

 

 

무기력한 다리로 운동화 뒤축을 끌며 걸었다. 바람이 제법 차가와 볼살에 오소소 소름이 올랐다. 스산한 바람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옷깃을 휘어트리며 가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갈등에 이끌려 돌아갈 방향으로 몸을 틀었지만, 마음은 아직 완전히 귀로의 길목에 들어서지 않고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로 가람의 왼쪽 발은 단단히 땅에 붙어있었고, 오른쪽 발은 걸음을 옮기듯 발코만으로 땅을 짓누르는 채였다.

망설임을 곱씹고, 양발의 앞코로 갈등의 구덩이를 몇 개나 판 후에야 가람은 비척이는 걸음으로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휘어지는 무릎은 삐걱거리는 둔한 기계처럼 더뎠고 발목과 발은 망설임으로 걸음을 빚어내었다. 눈에 익어 친숙한 풍경과 길목이 눈에 비벼졌다. 가람의 눈에 선하게 꽂히는 그 길목, 땅을 뚫고 돋아난 짙푸른 풀과 얼기설기 꼬인 갈색 나무줄기, 정교한 돌들이 맞물린 반듯한 담, 그 잿빛 담벼락을 타고 그어지는 평행선 끝에 은찬이 있었다.

가람이 그를 발견하기보단, 그가 가람을 찾아낸 것이 더 빨랐으므로, 그는 가람의 안면을 살피며 느긋한 발로, 그러나 초조한 낯빛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가람아. 사근사근한 음성이 가람의 몸을 감싸 안았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탈을 뒤집어쓴 채로 은찬은 가람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가람은 주머니에 단단히 손주먹을 꽂아넣은 채로 입에 지퍼를 채웠다. 함구로만 응하는 그를 보며 은찬이 나직이 청가람하고 이름을 토했고, 그 음성 끝에 달려온 언어가, 그 말의 바늘, 은찬의 혀 끝에 걸린 단어가 가람의 마음을 끌어냈다.

그런 건 줄도 모르고…미안해.”

가슴이 따끔거리는 통증에 가람은 눈살을 찌푸렸고, 다시 한 번 손주먹을 꽉 쥐었다. 제 모든 응어리를 그러 잡아, 그 안에 욱여넣어, 손주름 안으로 감추듯이.

그런 거? 그런 게 뭔데.”

손바닥을 펴낸 건 은찬이었다. 은찬의 손바닥 안에 가람의 질척한 기저가 놓여있었다. 단단히 압축된 사각의 면으로. 하늘색 카드의 표면이 윤기 좋게 반질거렸다. 그 낱장의 가벼운 종이가 납처럼 무겁게 가람의 손바닥을 짓눌러오기 시작한다. 납은 제멋대로 손주름을 타고 깊이 스며들어, 손등의 솟아난 힘줄을 타고, 자꾸만 가슴으로 올라온다. 은찬은 가람의 손바닥을 제멋대로 펼쳐내고 움켜쥐고 있었다.

이건 내가 열어봤어, 멋대로 열어봐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가람아.”

은찬은 가람의 뒷말을 기다린다. 입술이 작게 빠끔거리고, 달싹이는 그 사이로 숨과 스며질 그 말을 기다렸다.

니가 뭔데.”

?”

니가, 니가 뭔데 나한테 그딴 말을 해?“

아니, 나는

니가 뭔데 나한테 그딴 말을 하냐고! 왜 니가!”

가람의 성난 목소리가 은찬의 귀로 튀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가 은찬의 가슴팍에 번뜩이며 충돌하더니 이윽고 새까맣게 번졌고, 하얀 섬광으로 변해갔다. 은찬의 눈 앞이 번뜩거리다 깜깜해졌다. 고요처럼 어둠이 찾아왔다.

 

 

 

생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 뒷말이 웅얼거리면서 혀 안에서 자꾸만 씹혀간다. 저마다의 높낮이를 지닌 음성들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가람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앞에 나선 이들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었지만, 가람만은 고운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였다.

엇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가람 양옆으로 늘어져있었고, 너나할 것 없이 상기된 뺨으로 즐거이 입을 오물거리며 노래를 뱉어내고 있었지만, 가람만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혀 안에서 말을 씹어 삼키기 바빴다. 노래의 주인공은 저만이 아니었기에, 부러 소리 내 공들여 부를 수고 따위를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녹색 칠판에는 글자들이 박혀있다. 11, 축생일, 읽기도 쓰기도 어려울 그 한자 밑에 일렬로 줄지어진 이름들 가운데 또렷하게 청가람이라는 제 명칭이 박혀있다. 앞뒤로 빽빽한 이름순서에 따라 서다 보니 가람은 한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모두가 가람을 부러워하며 생일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람은 볼을 부풀려 바람을 불고 싶지 않았다. 촛불을 끄고 싶지 않았다. 침을 뱉듯, 가람은 숨을 뱉었다.

폭죽이 터졌다. 눈 앞에 노랗고 빨갛고, 파란 끈 따위가 나풀거리며 시야를 찢었다. 뒤 이어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가 자꾸만 세차게 가람의 고막을 찢어온다. 생일 따위. 가람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묵묵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저마다 선물을 주고받기 바빴다. 가람의 책상만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날은 가람의-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13살이 되는 열세 번째-생일이었고, 그에 맞물려 상술에 넘어간 이들이 마음을 고백하는 축하스런 날이었지만, 가람에겐 그렇지 못했다. 생일 따위. 가람은 다시 한 번 입을 비죽거리며 가방을 들춰 메었다.

별 시답잖은 생일잔치 따위를 하는 바람에 쓸모없이 길어진 종례시간은 늘어진 테이프와도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일 따위로 소비한 이 시간들이 가람에겐 너무도 의미가 없었다. 검은 혓바닥은 꼬여버려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이제는 듣지 않을 무가치한 테이프처럼 딱히 있으나 마나 신경조차 쓰이지 않고, 실수로 내다 버려도 존재마저 잊혀진 채로 지내게 될, 운이 좋다면 한참 뒤에나마 떠올리게 될 그런 물건과도 같은 날. 부러 찾아 듣지도 기억하지도 않지만, 억지로 들춰 꺼내면 망가진 꼴이 역력한 모양새인 테이프처럼, 치우자니 번거롭고 그대로 내다버리자니 적잖게 마음을 콕콕 쑤셔오는 네 개의 1로 이루어진 그 날, 가람의 생일은 그러했다.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수련 시간이 줄어들었다, 가람은 매끄럽게 뒷문을 빠져나온다. 가람이 사라진 교실에서 삼삼오오 모여앉은 아이들이 저마다의 생일선물을 내어보고 자랑하기 바쁘다. 있다가 우리 집에 같이 가, ?, 엄마가 생일파티 해주기로 했어. 매끄럽게 제 귓바퀴를 긁고 스쳐가는 그 잔음을, 가람은 앞으로 드리워진 자신의 검은 그림자 밑으로 넣어 짓밟고 뭉개내며 걸음을 걷는다.

그 어느 숫자로 날이 바뀌어도 가람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네 개의 평행으로 그려졌던 날이 꼬이고 휘어짐에 따라 하늘은 시시각각 낯을 바꾸었다. 어느 날은 침을 흘리고 이따금 울상을 지으며 회색 구름으로 주름을 그려냈지만, 가람의 시간은 변함없이 정적이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가람은 집과 학교-수련장, 세 개의 빗살로 이루어진 쳇바퀴를 돌려댄다. 다람쥐와 청가람의 차이점이 있다면, 유희로 쳇바퀴를 돌리는 쥐와 달림 가람은 절박으로 바퀴를 돌려댄다는 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급히 그의 소원을 이루어줄 그 날을 당겨대야만 했다. 제자리를 구르는 쳇바퀴라 할지라도 언젠간 앞으로 나아갈테니, 그가 원하는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쳇바퀴를 돌렸다. 절박을 연료삼아 가람은 쉴 새 없이 제 뼈마디를 돌려댄다.

욱신거리는 팔 마디와 무릎을 쥔 채로 가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11월의 마지막 날이었고, 겨울에 접어든 하늘이 희뿌연 분을 바르고 제 뒤로 해를 감추던 날이었다. 무릎에 힘이 빠져 몇 번이나 아스팔트 바닥에 운동화 밑창을 갈아내었는지 모른다. 가람의 앞으로 늘어트려진 그림자마저 지쳐 보였다.

피로가 온종일 가람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등에 업힌 피로가 어깨를 눌러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팔과 등이 덩달아 허리를 구겨버렸다. 구부정한 등허리를 주먹으로 부수듯 내리치며 가람은 계단을 오른다. 한 발자국씩 더디고 더디게. 축 늘어진 발바닥이 땅에 눌어붙은 양 떼어내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걷는다.

집으로 돌아가 곧장 그 누구와도 눈 한번, 입 한번 속아내지 않은 채로 죽은 잠을 잘 것이다. 문고리를 돌리기 전까지 가람의 몸은 피로감이 장악하고 있었다. 차갑고 시립 쇠붙이를 손바닥에 넣고 돌릴 때까지도, 그리고 틈 사이로 새며 나오는 얄팍한 형광등의 조명을 쬘 때까지도 변함없었다.

신발을 벗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제 발에서 조금 앞서나간 곳에 놓여있던 한 쌍의 신발을 보지 못했더라면, 조금 더 시간을 돌려 집으로 오지 않고 밤거리를 서성거리며 헤맸더라면, 그래서 가람이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가 가람을 보지 않았더라면.

말을 자르고 잘라, 잘게 씹어내 목구멍 뒤로 넘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소리가 꽤 거칠게 났는데도 불구하고 반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미의 것도, 제 것도 아닌 낯설고 이질적인 신발이 가람의 눈에 들어왔다. 흐린 얼굴이 개이며 맑아진 얼굴 위로 봄 햇살이 앉았다. 가람의 입안에 자꾸만 침이 고였다. 서둘러 신발을 내팽개치며 벗었지만, 뒤꿈치로 바르게 정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대로 곧장 고개를 들어 거실로 향하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가람은 괜시리 엎드린 채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심호흡을 해봐도 심장의 세찬 방망이질이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온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가람에겐 없었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이 가람의 얼굴에 화색을 그려내었다. 긴장을 주먹 안에 넣었다 펼치며 걸음을 서서히 옮겨내었다.

거실에는 그와 그녀가 있었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어머니와 그녀를 향해 짙은 연정을 내보이는 다정한 얼굴이 보였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뱉어내야 했지만, 가람은 다시금 입안으로만 말을 곱씹어 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 주변만이 환했다. 달뜬 마음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가슴의 방망이질도 멈춘 지 오래였다. 길가에 떠돌이 개가 그렇듯, 찬 길바닥을 서성거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의미 없이 시선을 던질 때처럼 가람은 두 사람을 텅 빈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입안의 침이 말라 목이 탔다. 나오지 않는 침을 끌어올려 삼키며, 가람은 이불 위로 몸을 누였다. 문밖에선 세찬 말소리가 쉼 없이 두 사람에게 빗발치는데, 방은 가람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은 채로 저 홀로 침묵하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온 화색을 느끼며 가람은 눈을 감았다.

문뜩, 방 밖에서 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이가 돌아왔었나 봐요, 그래? 면숙한 앞의 음성에는 미동조차 않던 가슴이 돌연, 뒤따라온 목소리에 서둘러 쿵쾅대고 있었다. 기쁨에 개가 헉헉대듯, 그래서 침이 늘어질 때처럼, 가람의 입안에 다시 침이 돌았다.

그토록 오래 침묵하고 있던 방이 문을 열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가람은 황급히 이불을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빠…”

사뭇, 새삼스럽고도 간질거릴 정도로 상냥한 얼굴로 저를 굽어보는 아비의 낯이 눈앞에 있었다. 가람은 침을 삼켰다. 그는 방안을 감상하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이편저편에 시선을 내려보내다 서서히 가람의 말간 얼굴을 눈에 담아주었다. 긴장감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가람을 향해.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

일상을 물어봐 주기도 했다.

그냥, …”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음성이었는데, 말이 매끄럽게 터져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가람은 입안에서 말을 씹고 씹다 뱉어내었지만, 그마저도 말더듬이가 따로 없었다. 더듬거리는 음성이 그와 가람 주변에 툭툭 떨어져 나뒹군다. 달뜬 가람의 얼굴과 달리 그의 낯은 시간이 더할수록 흙빛으로 변해간다.

기대가 머릿속에서 자라난다. 그의 안면을 미처 살필 주의가 없었기에, 가람은 제 안에 곱씹던 말들로 기대를 키워내 가고 있었다. 문득, 기대가 뾰족이 봉오리를 움터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가람은 손을 움켜쥐며, 손가락으로 제 손금을 어루만지며 더듬더듬 말을 읊었다.

사실은 며칠 전이 제생일

그의 나긋한 음성이 가람의 입을 닫는다. 매끄럽고 다정하게 내뱉어진 말이 가람의 말을 칼같이 잘라내었다.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 말고 조금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구나.”

“…”

요즘 수련은 어떻지? 듣자하니 열심히 한다고는 들었다만.”

한 음 한 음이 가람의 귓바퀴를 휘감고 고막을 뚫어대었다. 온통 수련에 관한 이야기다. 어차피 그가 가람에게 던지는 관심이란, 떡밥에 불과한 거였고, 가람은 늘상 깨달으면서도 매번 멍청하게 그 떡밥을 문다. 어항 속 금붕어는 3초마다 기억을 깜박깜박 잊어버리고 토해낸다던데, 빨갛고 노란, 주황색 물고기가 뻐금거리는 입술로 기억을 토해내듯 가람은 입술을 곱씹으며 빠금거렸다.

그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잡생각들이 많아 보이는군. 쓸모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수련에 열중해. 어차피 지상에서의 일들은 나중이 되면 다 필요 없어질 거야.”

기대가 잘려나간 머릿속에는 어떠한 생각도 움트지 않는다. 가람은 손을 펴내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럴 거지?”

.”

나긋한 음성과 나지막한 대답이 고요처럼 방안에 찾아왔다.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으며 가람은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7시도 채 되지 못한 이른 아침이었고, 자꾸만 등으로 날이 선 시선이 꽂혀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돌려 눈을 직선으로 마주할 자신도 없어, 가람은 시선을 피해 멀찍이 사선으로 몸을 피했다. 얼핏, 곁눈질로 살펴본 그의 얼굴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환멸로 깎아낸 설화석고처럼 단단히 굳어있는 옆얼굴, 입술이 설핏 열리더니 말이 새어 나왔다.

왜 아직도 수련을 안 갔지?”

그 길로 곧장 가람은 고개를 숙였고, 운동화를 짓이겨 밟으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집에서부터 몸을 멀어트렸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내가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오늘 아침에 늦장을 부려서 그런 걸 거야.다시 머릿속에 기대가 돋았다. 자라난다. 점점 기대는 크기를 부풀리고, 가람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고, 입안에 침을 넣어주었다.

열심히 하면. 분명 그도 기뻐하리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아니, 머릿속에 기생하는 기대가 가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왔다. 실수로 두 번이나 죽도를 놓치는 바람에 대련 상대에게서 손등을 얻어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배, 세배로 갚아주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등을 무심하게 어루만지며 가람은 제 얼굴에 화색을 집어넣고, 미소를 내보였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기대를 잘라내는 사람이었지.

돌아온 가람을 반기는 건 텅 빈 그의 부재였다. 섭섭함일까, 그도 아니면 서운함일까. 잘린 기대가 내는 사각임을 들으며 가람은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이불 속에 웅크리고 들어가 죽은 듯이 잠이 들고 싶었다.

가람아.”

왜요.”

, 휴일인데도 훈련하고 온 거니?”

보면 몰라요?”

볼멘소리가 자꾸만 목을 타고 뿜어졌다. 거실 한복판에 서 있는 그녀의 뒤로 닫힌 방문이, 그 안에 놓여있을 이불이 아른거렸다.

아버지가 방금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런데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들춰낼 필요는 없다.

얼굴이라도 좀 보고 가라니까, 나이를 먹으니까 쑥스러움을 타나 봐.”

돌로 쳐 깨보려 해도 단단히 부서지지 않을 그 얼굴의 굳은 낯이 어떻게 구겨진단 말인가. 가람은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이 다시금 목 위로 올라탔다. 자기도 모르게 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가람을 주춤거리듯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무릎을 꺾어내진 않았다.

그녀의 재잘거리는 음성이 귀에 들끓는다. 몇 달 뒤에 다시 올 수 있다고 했으니까. 시선이 한줄기로 곧게 뻗어져, 가람의 목을 스치고, 벽에 붙어있는 달력에 닿았다. 어머. 아연스런 목소리 뒤에.

가람이 생일…”

뒷말을 발소리로 잘라내고, 지우며 가람은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걸어 잠궜다. 곧장 이불로 기어들어갔다.이불은 따뜻하고 포근했고, 들춰내는 이도 없었다. 문밖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음성에도 이불은 단단히 가람을 지켜주었다.

단단히 제 몸을 감싸고 지켜주는 따스한 이불을 가람은 한밤중에 제 손을 거둬내었다. 황급히 상체만을 일으킨 채로 몇 번이나 허덕이며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잘려나간 기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기대가 잘리는 소리와 뒤척이는 제 이불 소리만이 연달아 가람의 귓전을 쿵쿵 울리고, 가슴을 꼬집고, 목을 조른다.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열고, 문을 열고, 그런데도 숨통이 트이지 않아서 주린 배를 움켜잡듯이 가슴을 쥐어짜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작정 밤 속을 걸었다. 바람이 부는 통에 세차게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눈앞에서 뒤엉키며 몇 번이고 시야를 흔들었다. 어지러운 눈앞과 달리 머릿속은 정갈하다. 더욱이 점점 추위에 딱딱하게 굳어가며 세찬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망가지지 않았다.

문뜩 길에 멈춰 섰다. 종아리에, 팔뚝에, 목덜미에 바람이 들붙었다. 가람의 얼굴엔 빗방울이 튀었다. 한줄기의 빗방울이 얼굴선을 흐트러트렸다.

 

 

 

가람은 눈물을, 은찬은 코피를 흘렸다. 마주 본 상태로 가람은 곱씹듯 너 따위가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환멸을 세차게 곱씹으며 뒤엉킨 울음소리에 은찬은 묵묵히 소매를 들어 제 코를 훔쳐냈다. 하늘빛 종이가 가람의 손바닥으로부터 은찬의 뺨을 날카롭게 베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질척이는 땅 위에서 한 번도 팔랑거리지 못한다.

은찬은 습관적으로 막힌 코를 들이마시려나 헛기침을 뿜고, 소매로 코를 막아본다. 어느샌가 턱도 붉은빛으로 흥건했다. 앞섶에 빨간 덩어리가 두어 개 물들어있다.

비가 오지도 않는데 천둥이 친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듯, 하늘이 우중충해지나 싶더니 습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을 흘려보내며 하늘은 어두운 낯으로 두 사람을 내려보고 있었다. 하늘 대신 가람의 눈두덩으로부터 비가 쏟아졌다. 우산이 필요친 않았다.

다시 한 번 콧등을 훔치며 은찬은 말없이 가람의 뺨을 닦아낸다. 애석하게도, 가람의 뺨이 닦이긴커녕, 은찬의 손으로부터 엷은 피가 묻어나온다.

 

 

 

다음날에는 비가 내렸다. 물기가 가람의 온몸 곳곳에 한몸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와, 가람은 상자를 정리했다. 어제 은찬이 꺼내둔 채 그대로 곱게 포개어져 있던 외투를 살피며, 상자 속에 켭켭이 쌓여있던 니트와 제 츄리닝을 다시 접어내었다. 상자를 버리려다 아연, 제가 어제 내팽개쳤던 카드가 생각났다.

그 속에 무슨 말이 들어있었을까.

안 봐도 뻔하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제 이름이 전부였겠지. 그 후로 매년 빠짐없이 그녀는 근 5년에 걸쳐 카드를 쓰고 선물을 해주었지만, 가람은 매번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이제 와 마음에 걸리는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찢어내지 못해서겠지. 상자를 거침없이 내다 버리며 가람은 잔 비를 비해 총총걸음으로 마루에 들어왔다.

어깨에 앉아있던 빗방울을 떨쳐내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카드를 찢어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말끔하게 게워질 테니까.

어젯밤 한차례 은찬과 입씨름을 하던 길목 근처를 어슬렁거려보았지만, 카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가 앉았다. 눈을 깜빡이며 쉴 새 없이 땅을 더듬어봐도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손엔 질척한 흙만이 집혔다.

어차피 버릴 거였으니까상관없다. 가람은 축축한 갈색 손을 엉거주춤 든 채로 중앙으로 돌아왔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개수대가 주방에 있었기에, 공들여 천천히 손을 닦아내었다. 손을 닦자, 쌓인 그릇이 보여서 설거지를 했고, 반찬 통을 집어넣기 위해서 냉장고의 문을 열었고, 그래서.

그 안에서 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로. 두 개로 증식한 카드는 커다란 카스테라 상자를 아래에 깔고 있었다. 천천히 카드를 집어 들었다. 두 개의 축하해와 두 개의 이름, 하나의 미안해가 그 속에 들어있었다. 가람은 말없이 카드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냉장고의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주머니에 양손을 꼭 넣은 채로 손안에서 구겨지는 카드를 쥐었다. 입꼬리가 샐쭉하니 자꾸만 올라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그날 저녁엔 꽃게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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