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Carol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캐롤, Carol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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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자 프랜켄버그 백화점 직원 식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다란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계산대 옆에 세워 놓은 나무 울타리 뒤로 직원들이 속속 도착하여 순서를 기다렸다. 이미 식판을 든 직원들은 비집고 앉을 자리를 찾거나 누가 다 먹고 일어나는지 두리번거렸지만, 한 자리도 없었다. 액자 하나 걸리지 않은 식당에서 접시가 부딪히고 의자가 끌리며 왁자지껄한 가운데 오가는 발걸음에 회전식 출입문이 삐거덕거렸다. 이 모든 게 단 하나의 초대형 기계가 내는 소음처럼 들렸다.
테레즈는 앞에 놓은 설탕동에 기댄 ‘프랜켄버그 백화점 사규집’을 들척이며 초조히 식사했다. 지난주 처음 연수 받으러 온 날 이미 이 두툼한 사규집을 훑어보았지만 달리 읽을거리가 없었다. 식사할 동안 집중할 데가 필요했기에 연휴 규정을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프랜켄버그에서 15년은 근속하면 3주간의 연휴가 주어진다. 오늘의 메뉴는 으깬 감자에 그레이비소스를 곁들인 회갈색 로스트비프, 옆에는 완두콩이 소복이 놓이고 홀스레디쉬가 종이 종이에 담겨 나왔다. 테레즈는 프랜켄버그 백화점에서 장장 15년을 근무하면 과연 어떨지 상상해보았지만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25년차가 되면 4주간 휴가를 갈 수 있다. 프랜켄버그 백화점은 직원용 여름 및 겨울 캠프를 운영했다. 아예 교회를 세워주지 그래, 직원 출산용 병원도 차리고, 테레즈는 생각했다. 백화점은 감옥처럼 체계적이었다. 테레즈는 이 사실이 소름 끼쳤다. 이제 자신도 여기 소속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사규집을 건성으로 넘기던 중 양쪽 면에 결처 큼지막이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도 프랜켄버그의 일원입니까?”
테레즈는 식당을 가로질러 보이는 창문을 쳐다보며 생각을 애써 돌리려 했다. 리처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삭스 백화점에서 봤던 스웨터를 사줘야겠어. 검붉은 노르웨이 스웨터였는데 30달러 선에서 괜찮은 지갑을 찾지 못하면 그걸로 사야지. 다음 주 일요일에는 켈리네와 함께 웨스트포인트에 하키나 보러 갈까. 식당 건너편 초대형 사각 유리창이 몬드리안 작품처럼 보였다. 한쪽 구석으로 열린 작은 정사각형 창문 사이로 희끗한 하늘이 보였다. 새 한 마리 오가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올리는 연극 무대라면 어떤 세트를 만드는 게 좋을까? 생각이 도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은 참 달라. 남들은 못해도 당신은 몇 주만 지나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아.” 리처드가 말했다. 리처드는 테레즈에게 내년 여름을 프랑스에서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아니 보내자고 했다. 그는 같이 가자고 했다. 사실 그를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리처드의 친구 필 맥엘로이가 편지를 보냈다. 다음 달에 테레즈에게 연극판에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필을 본 적은 없지만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말이 미덥지 않았다. 9월부터 뉴욕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몇 번이고 돌아다녔지만 한 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한겨울에 대체 누가 일자리를 주겠는가? 그것도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초짜 무대 디자이너 견습생에게. 내년 여름에 리처드를 따라 유럽에 간다 해도 그와 함께 노천카페에 앉아 있다가 프로방스 아를을 거닐며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찾아다닌 후 어느 마을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요 며칠 백화점에서 근무해보니 그런 꿈은 더욱 요원해 보였다.
백화점 근무가 짜증스러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테레즈는 그 이유를 리처드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한 싫어하는 것들이 죄다 이곳에 응집되어 있었다. 의미 없이 움직이고 쓸데없는 잡일을 하다 보니 하고픈 일에서 점점 멀어졌다. 시재 점검, 소지품 검가, 출퇴근 기록기 등의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없었다. 다들 누군가에게 영혼을 담보 잡힌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탄 듯 저마다 일생 동안 품어야 할 의미와 사명, 사랑까지도 이곳에서는 절대로 표출할 수 없었다. 테이블이나 소파에 앉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떠올랐다. 숨이 끊겨 미동조차 없는 사물 위를 떠돌 듯 대화는 겉돌았다. 타인의 심금은 울려보지 못한 사람들. 남의 심금을 울려보겠다고 작정해도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쓴 채 입으로 뻔하디 뻔한 말을 내뱉으니 누가 봐도 입발림이라고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백화점에서 매일 똑같은 얼굴만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외로움은 더해갔다. 말을 걸 만한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고, 걸 수도 없었다. 차라리 오다가다 버스에서 딱 한 번 보고 영영 스치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라도 할 것 같았다.
테레즈는 매일 아침 지하에 있는 출퇴근 기록기 앞에 줄을 선 채 정직원과 계약직 직원을 무심히 눈으로 골라냈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지? 당연히 공고 때문이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운명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무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그녀의 인생은 갈팡질팡의 연속이었다. 이제 열아홉, 조바심이 났다.
“남들을 믿어라, 테레즈. 꼭 명심해.” 얼리샤 수녀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꽤 자주 그랬다. 테레즈는 이 말을 애써 실천하려 했다.
“얼리샤 수녀님.” 테레즈는 치아 사이로 바람이 섞여 나오는 이 발음이 좋아서 나지막이 읊었다.
식당 청년이 그녀가 앉은 테이블을 훔치자 테레즈는 포크를 집어 들고 도로 일어났다.
수녀의 얼굴이 보였다. 퀭한 얼굴이 햇살을 받자 분홍 돌멩이처러 발그레해졌다. 푸르스름한 수녀복에 풀을 먹여 빳빳해진 가슴께가 일렁였다. 키 크고 마른 얼리샤 수녀가 하얀 테이블이 놓인 식당 한쪽 구석에서 돌아 나왔다. 수녀는 어디를 가든 작고 푸른 눈으로 여학생들 틈에서 테레즈를 쫓았다. 테레즈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녀의 남다른 시선을 눈치챘다. 얇은 입술을 늘 일자로 앙다문 얼리샤 수녀는 초록색 뜨개 장갑을 종이에 싸서 웃음기 가신 얼굴로 건넸다. 테레즈의 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아무 말 없이 불쑥 장감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자 입술로 산수 시험에 꼭 통과하라고 말했다. 테레즈가 산수 시험에 통과한들 누가 신경이나 쓸까? 테레즈는 수녀가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나서 몇 년이 지나도 그 장갑을 학교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 하얀 종이가 삭은 천처럼 흐물흐물해졌지만 장갑을 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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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쳤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는 회색으로 무채색이나 불꽃이 일 듯 강렬했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 여인은 딴데 정신이 팔린 표정으로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백화점에서 사야 할 물건이 머릿속 절반을 차지한 것 같았다. 주변에는 판매 여직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여인이 서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레즈의 심장은 멈춰 섰던 순간을 만회하려는 듯 쿵쾅거렸다. 여인이 점점 다가오자 테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인형 가방 좀 볼 수 있을까요?” 여인이 물으며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여인은 유리 진열장 상판 유리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망가진 인형 가방이 아래쪽에 보였다. 테레즈는 몸을 돌려서 잔뜩 쌓인 상자 중에서 맨 밑에서 미개봉 상자를 끄집어냈다. 테레즈가 일어서자 여인은 차분한 회색 눈동자를 그녀에게 맞추고 있었다. 테레즈는 표정을 감출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저게 마음에 드는데, 저건 없나요?” 여인은 테레즈 뒤편 쇼윈도에 전시된 갈색 인형 가방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눈썹까지 금발이었고 이마가 봉긋했다. 입매도 눈매만큼 야무지네, 테레즈는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입고 있는 모피 코트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비밀이 가득할 것 같았다.
“있습니다.” 테레즈가 말했다.
테레즈는 열쇠를 가지러 창고로 들어갔다. 열쇠는 문 안쪽에 박힌 못에 걸려 있지만 헨드릭슨 부인 말고는 아무도 건드리면 안 된다.
데이비스 양이 보고 놀라서 한마디 했지만, 테레즈는 “열쇠 좀 쓸게요.”라고 말한 후 도로 나갔다.
테레즈는 쇼윈도를 열고 인형 가방을 꺼내서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전시 상품으로 가져가야 하나요?” 여인은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양쪽 팔꿈치를 카운터에 세우고 편안히 말하며 인형 가방 안을 구경했다. “이걸 받고 화내진 않겠죠?”
“별 상관없을 겁니다.” 테레즈가 말했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배송 후 현금 결제로 하겠어요. 이 옷들은 뭐죠? 이것도 같이 딸려 오는 건가요?”
비닐 포장지에 싸여 가격표가 달린 옷이 인형 가방 안쪽에 들어 있었다. 테레즈는 설명했다. “아니요, 그건 별도입니다. 인형 옷을 사시려면 차라리 저쪽 건너편 인형 코너로 가세요. 이건 그것보다 별로예요.”
“그렇군요! 그럼 크리스마스 전에 뉴저지로 배달되는 거죠?”
“그럼요, 월요일에 들어갑니다.” 만약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테레즈는 직접 배달 갈 생각을 했다.
“제 이름은 H. F. 에어드 부인이에요.” 여인은 부드럽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즈는 녹색 배송 접수증에 이름을 꾹꾹 눌러 적었다.
이름, 주소, 동네명이 연필심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절대로 잊지 못할 비밀처럼 테레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아로 새겨졌다.
“착오가 있으면 안 돼요, 아셨죠?”
테레즈는 여인의 향수를 처음으로 느꼈다. 테레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즈는 배송 접수증을 내려다보았다. 필요한 숫자를 열심히 적으며 여인이 말미에 이렇게 말해주기를 간절히 애원했다. “나 만나니 정말 좋죠? 그럼 우리 언제 다시 만날까요? 오늘 점심 어때요?”라고. 여인의 목소리가 상당히 쾌활해서 이렇게 툭 말을 건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인은 ‘아셨죠?’라는 말 뒤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테레즈는 자신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고용된 미숙하고 실수 잘하는 신입 판매 사원으로 비추었을 생각을 하니 그 무엇으로도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종이를 내밀어 서명을 받았다.
이제 여인은 카운터에서 장갑을 집어 들더니 몸을 돌려 천천히 사라졌다. 테레즈는 점점 멀어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모피 코트 아래로 드러난 발목은 하얗고 가늘었다. 굽이 높고 무늬 없는 검은 스웨이드 구두를 신었다.
“후불 현금 결제 건입니까?”
테레즈는 헨드릭슨 부인의 추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부인.”
“맨 윗장을 손님한테 드려야 하는 거 몰랐어요? 이게 없으면 배송 받을 때 손님이 뭘로 구입을 증명하겠어요? 손님 어디 계시죠? 따라가서 잡을 수 있어요?”
“네.” 여인은 3미터 떨어진 복도 건너편 인형 옷 카운터에 있었다. 테레즈는 녹색 용지를 손에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카운터를 돌아 나와 힘차게 걸어갔다. 순간, 테레즈는 자신의 행색이 부끄러웠다. 낡은 남색 스커트에 면 블라우스를 입고 남 보기 민망한 플랫 슈즈를 신었다. 남들 다 입는 녹색 유니폼조차 지급 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충 두른 추한 거즈 바깥으로 피가 다시 배어 나왔을 것이다.
“이거 가져가셔야 합니다, 손님.” 테레즈는 카운터 한쪽 끝에 손을 대고 그 옆에 옹색하게 용지를 내려놓은 다음 몸을 돌렸다.
테레즈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와 재고 상자를 쳐다보다가 뭔가를 찾는 듯 정신없이 상자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여인이 저쪽 카운터에서 볼일을 다 보고 이제는 가버렸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시간을 때웠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흘러가는 순간순간을 의식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행복감. 마지막 순간 다시 못 볼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릴 수도 있었다. 그때 희미하게나마 또다시 느껴지는 게 있었다. 뭔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카운터 앞에 선 나이 든 손님들이 집요하게 응대를 요구하며 테레즈를 불러 대고 있었다. 작은 기차가 낮게 신음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렇게 폭풍처럼 밀려드는 소리가 그녀를 가두고 여인에게서 갈라놓았다.
마침내 테레즈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여인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여인은 다시 카운터에 몸을 가볍게 기댄 채 인형을 가리키며 보여 달라고 했다.
테레즈는 인형을 집어서 유리 카운터 위에 앉혔다. 딸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여인이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깨지지는 않겠네요.”
테레즈가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주세요.” 여인은 조용하고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순간 시끄러운 소용돌이 한복판에 침묵이 고였다. 여인은 다시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테레즈는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소리를 받아 적었다. 아직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는 듯이. “크리스마스 전에 배송되는 거 확실하죠?”
“아무리 늦어도 월요일에는 들어갈 겁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까지는요.”
“좋아요. 귀찮게 하려고 또 물어본 건 아니에요.”
테레즈는 인형 상자를 끈으로 묶고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듭이 풀렸다. “어머나.” 테레즈는 부끄러운 나머지 변명할 거리가 없어서 여인이 보는 앞에서 다시금 매듭을 묶었다.
“힘든 일 하시네요.”
“네.” 테레즈는 후불 현금 결제 용지를 접어선 하얀 끈사이에 끼워 넣고 핀으로 고정시켰다.
“자꾸 확인해서 미안했어요.”
테레즈는 그녀를 응시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감각이 되살아났다. 여인이 말하려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 웃음이 터졌다. 테레즈는 다 이해했다.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확실히 배송될 거예요.” 테레즈는 좀 전까지 여인이 서 있던 복도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저쪽 카운터 위에 작은 녹색 용지가 그대로 있었다. “저 용지 잘 보관하셔야 하는데요.”
여인의 눈이 미소로 바뀌면서 무채색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테레즈는 누구의 눈인지 거의, 아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것 없이도 전에 물건 잘 받았어요. 난 저거 안 챙겨요.”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두 번째 배송 용지에 서명했다.
테레즈는 여인이 이리로 다가올 때처럼 서서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가다 말고 다른 카운터 쪽을 바라보며 검은 장갑을 두세 번 손바닥에 대고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이제 테레즈는 다음 손님을 응대했다. 꿋꿋하게 인내심을 발휘하며 일했다.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잡고 주소를 눌러 쓴 탓에 그다음 배송 용지까지 자국이 흐릿하게 남았다. 테레즈는 로건 씨의 사무실로 갔다. 몇 시간 지난 줄 알았는데 시계를 보니 고작 15분이 흘렀다. 이제 손을 씻고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회전식 타월 기계 앞에 손을 닦으며 뻣뻣이 서 있었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기분이었다. 로건 씨는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계속 근무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래층 화장품 코너에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테레즈는 거절했다.
오후 늦게 테레즈는 1층으로 내려가 백화점 카드 코너에서 카드를 샀다. 아주 예쁘진 않았지만 파란색과 금색이 섞여 깔끔했다. 테레즈는 카드 위에 펜을 든 채 침착히 서 있었다. 뭐라고 적을까. “정말 멋지신 분이에요.” 라거나 “사랑해요.” 라고 적을까. 결국 뻔하고 사무적인 문구를 적어 내려갔다.
프랜켄버그 백화점에서 감사 인사드립니다.
서명란에 서명 대신 사번을 적었다. 645-A. 그다음, 지하 우체국으로 내려가서 카드를 들고 우체통 앞에서 멍하니 머뭇거렸다. 투입구에 절반쯤 카드를 밀어 넣다 말고 정신이 확 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무튼 며칠 후면 백화점을 그만둔다. H. F. 에어드 부인이 신경이나 쓰겠어? 금발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잠시 카드를 본 다음 잊어버리겠지. 테레즈는 우체통에 카드를 떨구었다.
100p.
테레즈는 한쪽 팔꿈치로 몸을 세웠다. 우유가 너무 뜨거워서 처음엔 입술을 대지도 못했다. 간신히 한 모금 마시니 입 안에 우유가 퍼지면서 이것저것 뒤섞인 자연의 맛이 느껴졌다. 우유에서는 뼈와 피 맛도 나고, 따스한 살과 털 맛도 났다. 분필처럼 소금기는 전혀 없지만 점점 자라는 복중 태아처럼 생동감 넘치는 맛이 났다. 우유가 얼마나 뜨겁던지 컵 바닥까지 뜨끈했다. 동화 속 사람들은 변신을 위해 묘약을 들이켜고, 전사는 경계를 풀고 독이 든 잔을 들이켠다. 그렇게 테레즈도 우유를 끝까지 비웠다. 캐롤이 다가와 컵을 받아들었다. 테레즈는 졸려서 정신이 몽롱했지만 캐롤이 세가지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행복과 관련된 질문이었고, 또 하나는 백화점과 관련된 질문, 마지막 하나는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테레즈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갑자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붙들 수 없는 용수철처럼 목소리가 튕겨져 나오더니 눈물범벅이 되었다. 테레즈는 캐롤에게 자신이 뭘 두려워하고 뭘 싫어하는지 털어놓았다. 외로움과 리처드에 대해, 그리고 어마어마한 상실감에 대해 쏟아냈다. 부모님 얘기도 했다. 모친은 아직 생존해 계시나 열네 살 이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캐롤이 물으면 테레즈는 대답했다. 어머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조차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요했다. 아버지는 참 많이 달랐다. 아버지는 테레즈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체코슬로바키아계 변호사였으나 평생 화가를 꿈꾸었다. 특별한 분이었다. 자상하면서 타인과 공감할 줄 알았다. 잘 버는 변호사도, 잘 그리는 화가도 아니라며 어머니가 잔소리를 해대도 아버지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몸이 늘 좋지 않았는데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테레즈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캐롤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테레즈가 여덟 살 때, 어머니는 자신을 몽클레어에 있는 기숙학교에 집어넣어 놓고 그 후론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피아니스트였는데 최정상급은 아니었다. 그래도 늘 열정적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테레즈가 열 살 무렵, 어머니는 재혼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롱아일랜드에 있는 어머니 집을 방문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테레즈에게 같이 살자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테레즈는 새아버지 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은 부류였기 때문이다. 목청도 크고 덩치도 크고 머리색이 짙은 새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과격했다. 테레즈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당시 임신 중이었고, 그후 이부동생을 둘이나 낳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후 테레즈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후 어머니는 서너 번 정도 학교를 찾아갔다. 올 때 마다 선물을 들고 왔다. 블라우스나 책도 사오고, 한번은 화장품 키트를 사 온 적이 있었다. 테레즈는 몹시 못마땅했다. 화장품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마스카라 발린 푸석푸석한 속눈썹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런 선물을 가져오다니 민망했다. 어머니는 화해를 가장해 그걸 들고 왔다. 한번은 이부동생인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그 순간 테레즈는 자신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음을 실감했다. 아버지와의 애정이 식자 여덟 살 딸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 어머니. 이제 와 굳이 학교로 찾아와 챙기려는 이유는 뭘까? 학교의 절반을 차지하던 다른 고아 소녀들처럼 차라리 나도 고아였다면 오히려 행복했을 텐데. 결국 테레즈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민망해 하며 분노하던 표정, 갈색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 내던 모습, 비꼬는 듯 비웃다가 침묵하던 얼굴. 그게 테레즈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이 되었다. 학교 친구들은 테레즈가 어머니에게서 편지조차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대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긴 했다. 그러나 테레즈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일곱 살, 졸업식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어머니에게 200달러를 송금하라고 요청했다. 테레즈는 어머니한테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도 한 푼도 보내지 않으리라 믿었다. 어머니는 돈을 보냈고, 테레즈는 그것을 받았다.
“유감스럽지만 그 돈을 받았어요. 이 얘긴 여기서 처음 하는 거예요. 언젠간 돌려 들여야죠.”
“말도 안 돼.” 캐롤이 다정하게 말했다.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시선은 테레즈에게 맞춘 채 웃고 있었다. “넌 아직도 애구나. 어머니한테 그 돈을 갚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그때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야.”
테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다시 뵐 생각은 있어? 앞으로 몇 년 후에라도?”
테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웃었지만 눈물이 계속 흘렀다. “이 얘기 그만하고 싶어요.”
“리처드도 이거 다 알아?”
“아뇨. 그냥 살아 계시다는 것만 알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테레즈는 울 만큼 울어서 모조리 쏟아낸 것 같았다. 노곤함과 외로움, 실망감까지. 눈물 안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으리라. 그냥 울게 내버려 둔 캐롤이 고마웠다. 캐롤은 화장대 옆에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테레즈는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침대에서 뻣뻣이 누운 채 흐느낌을 억지로 짓이겼다.
“다시는 안 울게요.”
“그럼 그래야지.” 캐롤이 성냥을 그었다.
184 p.
길 건너편에 앞쪽에서 대니 맥엘로이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코트도 입지 않은 채 손에 우유를 들고 걷고 있었다.
“대니!” 테레즈가 외쳤다.
대니는 몸을 돌려 테레즈 쪽으로 걸어왔다. “잠깐 시간 낼 수 있죠?”
테레즈는 안 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그가 다가오자 그의 팔을붙들었다. “딱 1분만요. 점심을 너무 오래 먹어서요.”
대니는 테레즈를 내려 보며 웃었다. “지금 몇 시죠? 눈이 침침할 때까지 공부하느라.”
“2시가 넘었어요.” 테레즈는 대니의 팔이 추위에 움츠러들어 단단해진 것을 느꼈다. 검은 터럭이 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코트도 안 입고 돌아다니면 다들 미쳤다고 해요.”
“이러면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그는 철문을 열고 연이어 방문도 열어주었다. “필은 나가고 없어요.”
방에서는 파이프 담배 냄새가 났다. 핫초코를 끓이는 냄새 같았다. 아파트는 반지하라서 대체로 어두웠다. 어지러운 책상 위에 놓인 램프는 포근한 불빛 웅덩이를 만들었다. 테레즈는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알아볼 수 없는 기호로 가득했다. 그래도 그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기호가 의미하는 건 전부 다 사실로 증명된 것들이다. 기호는 말보다 더 강하고 정확했다. 테레즈는 대니가 머릿속에서 그네를 타듯 하나의 기호에서 다른 기호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밧줄을 타듯 손을 바꿔가며 우주를 헤쳐 갔을 것이다. 대니가 부엌 식탁에 서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흰 셔츠를 걸친 어깨는 딱 벌어지고 근육이 탄탄히 붙어 있었다. 살라미와 치즈 슬라이스를 커다란 호밀 빵에 넣는 동안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주 놀러 와요, 테레즈. 수요일 점심때만 내가 집에 없어요. 여기 와서 점심 먹어도 필한테 방해가 되지 않아요. 필이 자고 있어도 상관없고요.”
“그럴게요.” 테레즈는 반쯤 돌려진 그의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점심 때 한 번, 퇴근 후에 한 번 이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테레즈도 대니를 찾아오는 게 좋았다. 그와는 수다를 떨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방 한쪽 구석에 정리 되지 않은 필의 소파 베드가 보였다. 이불과 시트가 뒤엉켜 있었다. 전에 두 번 왔었는데 한 번은 침대가 엉망이었고, 또 한 번은 필이 자고 있었다. 긴 책장을 소파와 직각으로 끌어다 놓아 한쪽 구석에 필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곳은 늘 엉망진창이었다. 정신없고 ㅏ증 날 정도로 어지러운 것이 대니가 일하느라 어지른 책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대니가 맥주를 따자 캔이 쉬 소리를 냈다. 그는 맥주와 샌드위치를 들고 벽에 몸을 기댔다. 테레즈가 여기에 있는 게 좋은지 씩 웃었다. “전에 당신이 물리학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네, 대충.”
“그건 틀린 말인 것 같아요.” 그는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우정을 예로 들어볼게요. 공통점이 전혀 없는데 서로 친구인 경우가 주변에 흔하잖아요. 그건 우정에도 저마다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특정 원자끼리는 결합하지만 어떤 원자는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과 비슷하죠. 한쪽에 결여된 요소가 다른 쪽에 있는 거죠. 우정이란 것도 양쪽이 서로 완벽하게 감추거나, 때론 영영 숨기는 특정 욕구에 의한 결과물인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저도 그런 케이스 몇 명 알아요.”리처드와 테레즈가 그랬다. 리처드는 사람들과 잘 지낸다. 테레즈와는 달리 그는 이 세상을 잘 헤쳐 나간다. 테레즈는 리처드처럼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게 늘 끌렸다. “그럼 당신의 약점은 뭐예요? 대니?”
“나요? 왜, 나하고 친구하려고요?”
“네, 당신은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 단점을 죽 늘어놓아야겠군요.”
테레즈는 그를 보며 웃엇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 대니는 열네 살 때부터 인생의 향방을 설계하고 모든 에너지를 단 한 곳에 퍼붓고 있다. 리처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요리사가 있었으면 해요. 댄스 강사도 있었으면 좋겠고, 세탁소나 미용실에 같은 소소한 일거리를 알려줄 사람도 필요해요.”
“맞다, 나도 세탁소 가야 하는데 깜빡했네요.”
“이런.” 대니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건 제외. 사실 난 희망을 갖고 있어요. 운명도 믿고요. 친밀함이라는 건 친구 사이는 물론 거리를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에게도 적용이 되거든요. 어디든 그럴 만한 명확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시인들도 내 말에 동의할 겁니다.”
테레즈는 미소를 지었다. “시인들도요?” 테레즈는 캐롤이 떠올랐다. 애비도 떠올랐다. 그리고 둘이 점심을 먹으며 나눈 대화도 떠올랐다. 두 사람의 만남은 스쳐지나가는 경우 이상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일이었다. 점심을 같이 한 후 불거진 여러 감정으로 인해 테레즈는 속이 시끄러웠고 그 때문에 우울했다. “그렇다면 남들이 괴팍하게 굴어도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좀 말이 안 돼요.”
“괴팍함이요? 그건 변명일 뿐입니다. 시인들이나 쓰는 단어죠.”
“전 심리학자들이 쓰는 용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아량을 베푼다…… 그건 무의미한 용어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로 정밀과학이며, 의미를 찾아 그것을 정의하는 문제일 뿐이에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란 게 대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별것도 아닌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까 점심을 먹은 후 길을 걷던 때처럼 테레즈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게 뭔데요?” 대니가 집요하게 물었다.
“좀 전에 점심 먹은 일이요.”
“누구랑 먹었는데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했다면 고민했겠죠. 그냥 낭비란 생각이 들어요. 뭘 잃어버린 것처럼요. 어쩌면 아예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녀도 캐롤처럼 애비를 좋아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신 마음속에는 존재하잖아요? 그렇다면 여태 낭비하는 겁니다.”
“네…… 사람에게서든, 사람이 하는 일에서든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마음이 전혀 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 테레즈는 이게 아닌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애비도 캐롤도 아닌 더욱 근원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 마음이 완벽히 통해서 완전히 말이 되는 상황, 테레즈는 캐롤을 사랑한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니는 테레즈를 잠시 응시하다가 벽에서 몸을 떼었다. 스토브 쪽으로 돌아선 채 셔츠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테레즈는 대화가 엉켜버린 것 같았다. 계속 엉켜서 무슨 말을 한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애비와 나눈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대니에게 옮긴다면, 대니라면 이런 변명을 한마디로 정리해줄 것만 같았다. 대기 중에 화학 약품을 뿌리면 김이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것처럼 그라면 가능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논리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늘 존재하는 것일까? 애비와의 대화 속에 담긴 질투와 의심, 적대감 이면에 뭔가 비논리적인 것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애비 혼자만의 것이었을까?
“세상사는 온갖 화학 결합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테레즈가 덧붙였다.
“결합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모든 건 살아 있어요.” 그는 활ᄍᆞᆨ 웃으며 뒤돌아섰다. 마치 또 다른 생각의 고리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타고 있는 성냥을 들고 있었다. “이 성냥하고 비슷해요. 지금 물리학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파괴할 수 없는 연기의 형질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니 오늘 시상이 넘치는군요.”
“성냥에 대한 시상인가요?”
“연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라는 것 같아요. 식물처럼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식물과 같은 질감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면 때때로 시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 테이블조차 내 살갗처럼 느껴지네요.” 그는 손바닥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쓸었다. “이걸 만지니 예전에 말을 타고 언덕을 오르던 느낌이 되살아나네요. 펠실베이니아에서였죠. 사실 그때는 말을 잘 탈 줄 몰랐어요. 그때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말이 고개를 돌려 언덕을 바라보더니 스스로 언덕을 오르겠다고 마음먹고 뒷다리를 박차고 튀어나갓어요. 말과 난 바람을 칼로 가르듯 질주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그 순간, 말과땅과의 나와의 완벽한 합일을 느꼈죠. 우리가 나무 한 그루가 되어 바람에 나뭇가지만 흔들려도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다른 때라면 결국 두려움에 떨었겠지만요. 그러고 나니 행복해지더군요. 두려운 마음에 물건을 쌓아두고 몸까지 사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죄다 떠올랐습니다. 내가 언덕을 오를 때 느낀 그 기분을 세상 사람들도 깨닫는다면 제대로 아끼고 사는 법을 터득하지 않을까요? 물건을 쓰고 쓰다 끝까지 쓰는 법이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하겠어요?” 대니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초롱초롱한 두 눈은 그냥 웃어넘기려는 듯했다. “유달리 좋아해서 입고 또 입다가 결국 낡아서 버린 스웨터 있어요?”
테레즈는 얼리사 수녀에게 선물로 받은 녹색 모직 장갑을 떠올랐다. 한 번도 끼지 않은 장갑, 낡아서 버린 건 아니었다. “있어요.”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사람들이 스웨터를 만들겠다고 양털을 깎으면 양들은 자기 털이 얼마나 깎여 나가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털이 더 많이 자라요. 아주 간단한 이치죠.” 대니는 커피포트로 몸을 돌렸다. 다시 데우는 중이었는데 벌써 끓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테레즈는 깨달았다. 연을 하나 더 만들면 된다던 리처으와 그 연도 비슷한 이치였다. 점심 식사는 까맣게 잊은 듯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던 애비가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 테레즈는 생각이 차고 넘쳐 멍한 상태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니가 다가와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그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테레즈는 그의 손길이 불편했다. 불편함이 구체적으로 체감됐다.
“가야겠어요. 너무 늦었어요.”
그가 양손으로 팔을 훑어내려 테레즈의 팔꿈치를 쥐더니 옆에 붙이고 입을 맞췄다. 대니의 입술이 테레즈의 입술을 세게 눌렀다. 윗입술에서 그의 포근한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 그가 붙들었던 손을 풀었다.
“당신은…….” 대니가 테레즈를 보며 말했다.
“왜 그랬어요?” 테레즈는 말을 하다 말았다. 그의 키스는 부드럽고도 거칠었다. 이걸 어찌 받아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왜라뇨, 테레즈?” 그는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싫었어요?”
“아니요.”
“리처드는 싫어하겠죠?”
“아마도요.” 테레즈는 코트 단추를 채웠다. “가야겠거요.” 테레즈는 문으로 걸어갔다.
대니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도 올래요? 점심 먹으러 와요.”
테레즈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거예요. 이번 주 내내 바빠서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은 어때요?”
“좋아요.” 테레즈도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대니는 테레즈의 손을 딱 한 번 정중히 잡았다.
테레즈는 블랙캣 극단까지 두 블록을 뛰어갔다. 망아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완벽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대니가 말한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204 p.
"넌 신세대잖아. 뭐라고 말해주겠어?“ 캐롤이 그네 의자로 와서 앉았다.
“무엇보다 두려워하면 안 돼요.” 테레즈는 몸을 돌려 캐롤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지금 웃는 건가요?”
“넌 이 성냥만큼 연약해.” 캐롤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도 성냥을 끄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만 제대로 맞아 떨어지면 성냥개비 하나가 이 집을 홀랑 태울 수도 있어.”
“도시도 가능해요.”
“그런데 넌 나랑 여행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잖아. 돈이 모자라서.”
“그건 아니에요.”
“넌 굉장히 독특한 가치관을 지녔어, 테레즈. 내가 같이 가자고 한 건 같이 너와 가면 좋을 것 겉아서였어. 네게도 좋고, 네 일에도 좋고. 그런데 돈에 대한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바람에 그걸 망쳤어. 네가 선물해준 핸드백을 생각해 봐. 그건 네 분수에 어긋나는 거였어. 그렇다면 돈이 필요하니 그걸 도로 가져가면 되잖아? 나 그 핸드백 없어도 돼. 그래도 넌 내게 그걸 선물해서 좋았잖아. 같은 얘기야. 난 되고, 넌 안 되는 것뿐이라고.” 캐롤은 테레즈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한쪽 발을 내밀고 고개는 위로 든 채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금발 머리가 조각상의 머리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넌 이런 상황이 재밌니?”
테레즈는 웃고 있었다. “돈 때문이 아니에요.”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테레즈가 말했다. “여행 갈 돈은 있어요. 갈게요.”
캐롤이 테레즈를 응시했다. 캐롤의 얼굴에서 뾰로통한 기운이 사라지더니 웃기 시작했다. 놀라면서도 못 믿겠다는 미소였다.
“그럼 됐어. 정말 좋다.” 캐롤이 말했다.
“나도 좋아요.”
“왜 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거야?”
정말 모르나, 테레즈는 생각했다. “내가 가든 말든 당신이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요.” 테레즈는 짤막하게 말했다.
“당연히 신경 쓰이니까 내가 물어본 거잖아?” 캐롤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돌려 테레즈에게 등을 보이며 녹색 방으로 걸어갔다.
테레즈는 캐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카신을 바닥에 천천히 끌며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텅 빈 복도를 쳐다보았다. 테레즈가 안 가겠다고 거절했어도 캐롤은 저렇게 저기로 걸어 나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테레즈는 반쯤 남은 커피 잔을 들었다 도로 내려놓았다.
211 p.
“좀 애매해서요.” 테레즈가 말했다.
“뭐가?”
“점심 먹은 거 전부가요.”
캐롤이 잔을 건넸다. “어떤 일들은 늘 애매한 법이야, 자기.”
처음으로 캐롤이 테레즈를 자기라고 불렀다. “어떤 일이 그렇죠?” 테레즈가 캐물었다. 대답, 확실한 답을 원했다.
캐롤이 한숨ㅇ르 내쉬었다. “많은 이들이 그래. 가장 중요한 일들이. 마셔봐.”
테레즈는 입을 다셨다. 달콤하고 커피처럼 짙은 갈색 액체가 톡 쏘는 알코올의 풍미를 지녔다. “맛있어요.”
“좋아할 줄 알았어.”
“안 좋아하면 술을 왜 마시겠어요?”
“다르니까 마시지. 우리 여행 갈 때 가져갈 거니 당연히 달라야지.” 캐롤은 인상을 쓰며 남은 잔을 마저 비웠다.
램프 불빛을 비추자 캐롤의 얼굴 한쪽에 퍼진 주근깨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하얘 보이는 눈썹이 봉긋한 이마를 감싸며 날개처럼 휘어져 있었다. 테레즈는 갑자기 황홀경을 느낄 정도로 행복했다. “아까 틀었던 곡 뭐예요? 보컬과 피아노만 나오던 노래요?”
219 p
2부
12.
1월.
이것은 만물의 시작이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1월의 추위는 회색 캡슐 안에 도시를 가두었다. 1월은 순간인 동시에 한 해이다. 1월은 순간순간을 비로 씻어 내려 그녀의 기억 속에 동결시켰다. 컴컴한 복도에서 성냥불을 켜고 명단을 초초히 들여다보는 여자. 메모를 끼적여서 헤어지기 직전에 친구에게 주고 돌아서는 남자. 한 블록을 뛰어와 버스를 잡아타는 남자. 모든 인간의 행동은 마법을 빚어내는 것 같았다. 1월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 달이다. 어릿광대의 벨처럼 시끄럽고, 얼어붙은 눈처럼 바스락거리고, 여느 시작처럼 순수하며, 노인네처럼 칙칙하고, 신기할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알 수 없으며,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와 같았다.
레드 멀론이라는 젊은 남자와 대머리 목수가 「스몰 레인」 세트 작업을 테레즈와 같이 하게 되었다. 도노휴 감독은 이 사실에 흡족해 했다. 그는 발틴 씨에게 테레즈가 작업한 것을 와서 봐 달라고 부탁했다. 발틴 씨는 러시아 아카데미의 대학원생으로 뉴욕에서 상연된 몇몇 연극 무대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했다. 테레즈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도노휴 감독이 미론 블랜차드나 아이버 하커비와 만나도록 주선하려 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았다. 테레즈가 보아하니 그는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242 p.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 진짜로 정신 나간 건 당신이야.”
“너야 말로 정신이 나가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잖아! 그 여자에 대해 뭘 알아?”
“그럼 당신은 뭘 아는데?”
“그 여자가 너한테 꼬리 치디?”
“세상에!” 테레즈는 말했다. 테레즈는 이 말을 십수 번도 더 내뱉은 기분이 들었다. 이 말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었다. 지금, 이곳이 아직도 테레즈를 구속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해 못해.” 사실, 리처드가 이해했기에 이토록 화내는 것이다. 그런데 캐롤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해도 테레즈가 같은 마음일 거라는 걸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백화점에서 인형 가방을 사려고 잠깐 얘기한 후 캐롤이 말을 걸지 않았더라도 테레즈는 지금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캐롤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더라도 심정은 똑같았을 것이다. 캐롤이 매장 한가운데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을 테레즈가 느낀 순간,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날 만남 이후 있었던 수많은 일들로 인해 테레즈는 굉장한 행운아가 된 것 같았다. 남녀가 자기 짝을 알아보기란 너무 쉽다. 테레즈는 캐롤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이 날 아는 것보다 내가 당신을 더 잘 알아. 당신은 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달라졌다고 당신이 그랬지? 우리가 계속 만나면 당신은 점점 그렇게 미쳐버릴거야.”
“좀 전에 사랑해달라고 한 거, 그 말은 잊어줘.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잊고. 그건 당신이 사람으로서 좋다는 말이야. 난 네가 좋아. 난 말이야……”
“당신이 왜 날 좋아하는지, 아니 좋아했는지 가끔은 궁금했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도 네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아니, 알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 당신은 언젠가 붓을 놓을 사람이야. 그리고 나도 같이 놓아버릴 거야. 그동안 손댔다가 도중에 죄다 그만둔 것처럼. 내가 아는 당신은 그랬어. 드라이클리닝도, 중고차도……”
“그렇지 않아.” 리처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날 왜 좋아해? 나도 그림을 좀 그리니 우리 둘이 대화가 통해서? 당신한텐 그림 그리는 게 쓸데없는 짓이듯 나도 여자 친구로서 쓸모없어.” 테레즈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마저 내뱉었다. “당신은 예술이 뭔지 잘 알아. 그래서 스스로 좋은 화가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뭘 해야 하는지 다 알면서 꾀를 부릴 대로 부리는 아이 같아. 결국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일할 거면서.”
리처드의 푸른 눈동자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입술을 단호히 오므리자 윗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지금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음…… 맞아. 당신은 희망이 없는 줄 알면서 질척거려. 결국에는 다 놓아 버릴 거면서.”
“난 안 그래!”
“리처드, 있잖아…….”
“네 마음은 바뀔 거야.”
테레즈는 다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칭얼대는 타령처럼 들렸다.
일주일 후, 리처드가 불쾌한 표정으로 테레즈의 방에 서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후 3시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잠깐 봐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테레즈는 주말에 캐롤의 집에서 지낼 짐을 싸는 중이었다. 만일 테레즈가 짐을 싸지 않았더라면 리처드는 기분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지난주에 리처드를 세 번 만났는데, 그때 그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테레즈에게 더없이 다정했다.
“나한테 네 인생에서 빠지라는 일방적인 통보는 있을 수 없어.” 그는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목소리는 외로움에 젖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길로 접어든 것 같았다. “진짜로 가슴 아픈 건 나 따윈 아무런 가치 없는 듯 대하는 네 모습 때문이야. 날 완전히 쓸모없는 놈 취급하잖아. 이건 불공평해. 난 경쟁조차 할 수 없어.”
맞다. 리처드는 경쟁조차 되지 않는 존재였다. “더는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캐롤 얘기를 꺼내서 싸움을 건 건 당신이야. 캐롤은 당신한테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어. 왜냐고? 당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갖지 않았으니까. 이제 나를 못 만나겠다면…….” 테레즈는 말을 끊엇다. 아마 리처드는 테레즈를 계속 보겠다고 우길 테니까.
“무슨 논리가 그래?” 리처드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테레즈는 리처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서 진실을 깨달았다. 며칠 전 극장에 갔다가 그땐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이번 주 내내 그가 보여준 수백 가지의 동작과 말, 시선을 제대로 봤더라면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극장에 갔던 날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리처드는 테레즈가 정말 보고 싶어 하던 연극표를 내밀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날 리처드가 어떻게 손을 잡았는지 생생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목소리는 어디에서 보자고 통보하는 대신, 혹시 만날 수 있는지 굉장히 다정히 물었다. 테레즈는 예전에 통보하던 방식이 못마땅했었다. 다정히 묻는 게 사랑의 증표라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테레즈의 환심을 사기엔 충분했다. 리처드는 그런 식으로 길을 닦아서 그날 밤 기습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 여자가 좋다는 게 무슨 의미야? 같이 자고 싶다는 말인가?” 테레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설마 그렇다 해도 내가 대답할 것 같아?” 여러 감정이 정신없이 훅훅 스쳐 지나갔다. 모욕감, 분노, 혐오, 이 모든 감정이 휘몰아치자 테레즈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그의 곁을 걸을 수 없었다. 테레즈는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리처드의 미소가 푸근하고도 다정해 보였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잔인하고 더러웠다. 리처드가 ‘테레즈,넌 더러워’라는 느낌을 노골적으로 심어줄 심산이 아니었다면 그의 미소가 추악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야 했다.
테레즈는 돌아 서서 가방에 칫솔과 빗을 던져 넣다가 캐롤 집에 칫솔을 두고 온 것을 기억했다.
“그 여자한테서 대체 뭘 원하는 거야, 테레즈.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리처드는 테레즈를 노려보았다. 테레즈는 분노 밑에 깔린 호기심이 보였다. 전에도 그는 열쇠 구멍으로 구경거리를 염탐하듯 호기심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까지 초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집착을 보인 적이 없었다. 테레즈를 포기하지 않겠다며 이렇게까지 단호했던 적이 없었다. 테레즈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단호함이 증오로, 그리고 폭력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는 한숨을 쉬더니 손에 들고 있는 신문지를 비틀었다. “난 오로지 너한테만 관심이 있어. 다른 사람 찾으란 말 하지 마. 널 남 대하듯 대한 적도 없고, 널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테레즈는 입을 다물었다.
“젠장!” 리처드는 신문을 책장으로 집어던지고 테레즈에게서 등을 돌렸다.
신문이 성모상을 때렸다. 성모상이 벽에 맞고 뒤집어지더니 놀란 듯 쓰러지면서 데굴데굴 굴러 선반에서 떨어졌다. 리처드는 온몸을 날려 두 손으로 성모상을 받아들었다. 테레즈를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고마워.” 테레즈는 성모상을 리처드에게서 건네받았다. 성모상을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았다가 도로 양손으로 쥐고 바닥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테레즈!”
성모상이 서너 조각으로 박살났다.
“신경 쓰지 마.” 테레즈가 말했다. 심장이 화가 난 듯 싸울 때처럼 쿵쾅거렸다.
“그래도…….”
“될 대로 되라지!” 테레즈는 구둣발로 성모상 조각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잠시 후 리처드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대체 뭐지, 안드로니치 때문일까, 리처드 때문일까. 안드로니치의 비서가 한 시간 전 전화했다.안드로니치 씨가 테레즈 말고 필라델피아 출신을 조수로 고용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제 캐롤과 여행에서 돌아와도 일할 자리가 없다. 테레즈는 조각난 성모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속살이 꽤 고왔다. 나뭇결을 따라 깔끔히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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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이 입을 열었다. “‘난 경쟁조차 할 수 없어.’ 이런 말 말이야.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대사가 바로 거전이지. 백 명이 똑같은 대사를 읊는 게 바로 고전이야. 엄마가 하는 대사와 딸이 하는 대사가 같고, 남편이 하는 대사와 정부가 하는 대사가 같지. 이를테면 ‘차라리 내 발 밑에서 네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나아.’(래드클리프 홀이 쓴 영미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 『고독의 우물』에 나오는 대사. 주인공 스테픈 고든의 어머니가 딸이 유부녀와 사귀는 것을 알고 내뱉은 대사다―옮긴이)라는 대사라든가. 같은 작품이 다른 배우들에 의해 계속 무대에 오르는 게 바로 고전이지. 그럼 하나의 연극이 고전으로 등극하기 위해 사람들이 꼽는 조건이 뭘까, 테레즈?”
“고전이란…….” 테레즈의 목소리는 긴장해서 숨이 막힐 듯 했다.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다루는 거죠.”
테레즈가 눈을 뜨자 방에는 태양이 가득했다. 그녀는 잠시 누워서 연두색 천장에 물결치는 물기 어린 햇살을 구경했다. 집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블라우스가 책상 모서리에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캐롤의 집에 오면 왜 이렇게 너저분해지는 걸까? 캐롤이 싫어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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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외 연극이 훨씬 많아으면 좋겠어요.” 테레즈가 말했다.
“무대 만들 때 제일 먼저 뭐부터 떠올려?” 캐롤이 물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지?”
“연극의 분위기부터 살피죠, 그게 무슨 뜻이죠?”
“연극이 무슨 장르인지 생각해? 네가 뭘 보여주고 싶은지도?”
도노휴 씨가 했던 말 하나가 언뜩 불쾌함을 남기며 테레즈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캐롤은 오늘 아침 까칠하게 굴었다. “날 아마추어 취급하는군요.”
“내가 보기에 넌 주관적이야. 그게 바로 아마추어 같은 거고.”
“늘 그런 건 아니에요.” 테레즈는 캐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지극히 주관적이려면 대단히 많이 알아야 해. 네가 작업한 걸 보니 지나치게 주관적이더라.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테레즈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캐롤이 자신의 작품을 무작정 좋아해주었으면. 테레즈가 세트 몇 개를 보여주었지만 캐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테레즈는 그게 너무 씁쓸했다. 캐롤은 이론적으로 하나도 몰라도 말 한마디로 무대를 깨부술 사람이었다.
“서부로 여행 가서 구경하면 꽤 도움이 될 거야. 언제까지 돌아와야 한다고 했더라? 2월 중순?”
“그게…… 모르겠어요. 어제 통보받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일이 어그러졌어? 필라델피아 일이?”
“전화가 왔더라고요. 필라델피아에서 다른 사람을 구했대요.”
“세상에, 속상해라.”
“뭐, 비즈니스니까요.” 테레즈는 말했다. 캐롤이 뒷덜미에 손을 대고 강아지를 쓰다듬듯 귀 뒤를 엄지로 쓸었다.
“말 안 하려고 했구나.”
“하려고 했어요.”
“언제?”
“여행 가서 아무 때나요.”
“많이 실망했지?”
“아니요.” 테레즈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남은 커피를 데워서 정원에 있는 흰 의자로 가서 나눠 마셨다.
“우리 점심은 나가서 먹을까? 클럽에 가자. 그다음엔 뉴와크에 가서 쇼핑하자. 재킷 어때? 트위드 재킷 한번 입어보지 그래?”
테레즈는 연못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추워서 한쪽 귀를 손으로 가렸다. “그게 딱히 필요하지 않아요.”
“네가 입은 걸 내가 특별히보고 싶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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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워싱턴 주라고 그랬죠?”
“워싱턴 주에서 태어났고 친가 식구들이 아직도 거기에 사셔. 아버지한텐 어쩌면 들를지도 모른다고 편지 드렸어. 혹시 거기까지 가게 되면.”
“아버지 닮았어요?”
“내가 아버지를 닮았나. 그러네, 어머니보단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지.”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다고 상상하니 좀 어색해요.”
“그게 왜?”
“나한테 당신은 그냥 당신이거든요. 누구와도 얽히지 않은 독자적인 존재.”
캐롤이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더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자, 출발.”
“형제자매는요?”
“언니 하나. 이제 우리 언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겠구나. 이름은 일레인이고 아이가 셋이야. 버지니아에서 살아. 네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언니를 보면 따분해 할지도 모르겠다.”
테레즈는 캐롤의 언니를 상상했다. 캐롤의 실루엣을 그렸다. 거기에 캐롤이 지닌 모든 특징을 약하고 흐리게 희석시켜 그려 넣었다.
그날 늦은 오후, 길가 레스토랑에 차를 세웠다. 가게 정면 유리 안쪽에 네덜란드 모형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테레즈는 옆에 있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모형 마을을 구경했다. 한쪽 끝에 있는 수도에서 흘러나온 물이 타원형 시내를 채우고 풍차도 돌렸다. 네덜란드 의상을 입은 작은 인형이 마을 여기저기, 잔디 위에도 서 있었다. 프랜켄버그 장난감 코너의 장난감 기차가 떠올랐다. 여기에 있는 타원형 시내만한 레일을 맴돌며 분노의 질주를 하던 그 기차.
“프랜켄버그 백화점에 있던 기차 얘기, 내가 한 적 없죠?” 테레즈가 캐롤에게 말했다. “그 기차가요…….”
“전기 기차 말이지?” 캐롤이 말을 잘랐다.
테레즈는 웃고 있었지만 가슴이 콱 막혔다. 깊이 파고들기엔 너무 복잡한 얘기였기에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캐롤이 수프 두 접시를 주문했다. 차 안에 있는 동안 추워서 몸이 굳었다.
“네가 진심으로 이번 여행을 즐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넌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 세상의 온갖 사물에 대해 제 마음대로 생각하고, 저 풍차만해도 말이야, 네덜란드에 직접 가는 거나 여기서 저걸 구경하는 거나 너한텐 하나도 다르지 않을 걸. 네가 진짜 산을 구경하고 진짜 사람들을 만날 수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구나.”
테레즈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거짓말했다고 캐롤에게 추궁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캐롤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했다. 테레즈가 캐롤을 마음대로 짐작해서 그 때문에 캐롤이 화가 났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진짜 사람들을 만날 수나 있을지’라니? 갑자기 로비체크 부인이 생각났다. 테레즈는 로비체크 부인이 흉측스레 생겨서 도망쳐 나왔다.
“이렇게 간접 경험만 해서 무슨 창작을 하겠다는 거지?” 캐롤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차분했지만 매정했다.
캐롤 때문에 테레즈는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 줄기 연기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기분이 들었다. 캐롤은 인간답게 살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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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둘이서 뭘 할지 정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테레즈는 창가에 서서 은은히 밝혀진 미시간 호를 내다보았다. 회색 하늘을 뒤로 하고 낯선 고층 빌딩이 삐죽빼죽 솟아 있었다. 테레즈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없고 단조로운 것이 피사로(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옮긴이)의 그림을 닮았다. 캐롤은 이해하지 못할 비유일 것이다. 테레즈는 창틀에 기대어 서서 시카고를 조망했다. 저 멀리 비추는 자동차 불빛이 나무 뒤로 지나가면서 점과 선으로 쪼개졌다. 행복했다.
297 p.
“캐롤, 사랑해요.”
캐롤이 고개를 들었다. 테레즈는 졸리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캐롤을 바라보았다. 캐롤은 여행 가방에서 잠옷을 마저 꺼낸 다음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테레즈에게 다가와 두 손을 어꺠 위에 올리더니 어깨를 꽉 쥐었다. 약속을 받아내려는 것 같았다. 방금 한 말이 진심인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테레즈에게 입을 맞추었다. 천 번도 더 입을 맞춘 사이처럼.
“내가 사랑하는지 몰랐어?” 캐롤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