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은찬가람/찬가람]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엘리스.aliceeli 2015. 2. 6. 01:14

제목의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문장은 장석남 시인의 '맨발로 걷기'에서 가져왔습니다. 




*



가람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한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한밤중이라는 표현으론 부족할 만큼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숫자 2와 3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던 가람은 고개를 돌려 텅 빈 방을 눈에 그려 넣었다. 하늘색 벽지가 달빛에 그을린 탓에 기묘한 색을 자아내고 있었다. 벽을 타고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잔뜩 솟아오른 곰팡내들을 눈에 품으며 가람은 천천히 방의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방 불을 올리면 조금 가라앉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곧 다시 스위치를 거칠게 내리며 가람은 눈을 감았다. 뵈지 않아도 가람의 눈엔 선했다.

불을 끄자 곰팡이들이 얼룩처럼 퍼져있던 벽지들도 가려져 어두운 방안은 그럭저럭 볼만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가람은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문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눈동자 안에 어두운 방안만이 서려있었다. 이어 다짐을 한 듯, 가람은 서서히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녀왔어, 피곤에 취한 몽롱한 목소리만이 텅 빈 방안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심해같이 고즈넉한 어둠에 적셔진 방이었다. 그러나 가람의 마음엔 쉼 없는 동요만이 물결치고 있었다. 출렁이는 마음을 담은 가람은 천천히 신발장에 널브러진 신발을 정리하며 또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치다 한참을, 또 넥타이를 푸르다 그렇게 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정신을 내팽개치고 온 사람 마냥 그렇게 넋을 놓고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눅눅한 곰팡내가 코를 찌를 듯이 풍기는 벽에 등을 붙이며 가람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닌 탓에 무릎이 시큰거렸다. 지난 사흘간 좀처럼 눈도 쉬이 붙이지 못 했다. 채 5분도 자리에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몸이 편해지기 무섭게 헛된 상념들과 감정이 제 가슴에 밀물지듯 덮쳐오는 바람에 가람은 제 몸을 편히 둘 수 없었다.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거 같다. 해골이 따로 없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지만 그랬기에 더없이 상냥한 말이었다. 백건은 그 자리서 소주 세 병을 거뜬히 해치우고선 사라졌다. 평정을 연기하고 있다는걸, 구두끈을 묶는 손가락의 떨림으로 가람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입을 떼 들출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가람은 그저 복도 끝으로 작아지는 뒷모습을 힐끔 쳐다봤을 뿐이었다.

쉬기가 무서웠다는 말이 더 옳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가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안쪽으로 은찬이 선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은 머리색에 자다 일어난 모양인지 뻗친 뒷머리 하며, 입술의 점까지 분명한 게 여지없이 '주은찬'이 맞았다. 주은찬은 더없이 상냥하게, 그러나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에 몽롱함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람아, 왔어? 코끝이 찡하니 시큰거리며 지독한 술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너 냄새나."

"머리……감았는데……"

"그 냄새 말고, 멍청아."

자신의 잔소리에 은찬은 제 소매에 코를 가져다 개마냥 킁킁 거렸다. 제 발에 덮인 운동화를 벗겨내며 가람은 대문을 닫았다.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던 걸까, 방 안에는 은은하니 텔레비전이 자아내는 소음이 깔려있었다. 가람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힐끔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은찬은 말했다. 텔레비전, 재미있어……하고. 말의 끝이 맥없이 허물어지는 탓에 실로 자신 없어 뵈는 목소리였다.

가람은 제 손에 들려있던 검은 봉투를 은찬에게 내밀며 부엌으로 향했다. 봉투 안을 슬쩍 바라보며 은찬은 기쁨에 허물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녁밥 해주는 거야?"

"어, 멍청아."

"기쁘다."

그렇게 말하며 은찬은 가람을 조심히 품에 안았다. 제 어깨에 둘린 은찬의 팔을 두 어번 가볍게 토닥이며 가람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으로 천천히 씽크대에 쌓인 술병의 개수를 세었다. 둘, 셋…… 그래, 이 정도면 양호하지. 이틀 전에 제가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깨끗했던 씽크대를 떠올리며 가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의 한숨소리에 대답하듯 은찬이 입을 열고 있었다.

"미안……"

실로 미약한, 곧 끊어질 것 마냥 맥없는 목소리라고 가람은 생각했다. 제 귀에 닿았다 금세 스르르 녹아 사라진,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사과를 제 가슴 한편에 또렷하게 새기며 가람은 은찬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은찬의 팔에 비누 향과 더불어 아주 엷은 곰팡내가 배어 있었다.

저녁식사 후, 가람과 은찬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티비를 바라봤다. 쇼프로 따위는 챙겨보지 않는 가람을 위해 은찬은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가람아, 하고 저건 말이야, 가람아, 이건…… 번갈아가며 제 귀를 적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가람은 조용히 제 목과 어깨에 둘려진 따스한 팔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은찬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가람이 잠에 들었다고 여긴 모양인지 쇼프로를 읊던 그 입으로 가냘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사는 몽땅 사라져서 멜로디만 흥얼거리는 형편없는 노래였지만 더없이 자상한 자장가였다.

한참을 흥얼거리던 목소리가 멎어들었을 때 가람은 눈을 떴다. 어느샌가 동이 튼 모양인지 창밖이 훤했다.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람은 제 몸에 덮인 이불을 들춰냈다. 막힘없이 이불을 들춰낸 것과 달리, 제 어깨에, 몸에 둘린 은찬의 팔을 떼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잠든 은찬의 눈꺼풀과 이마, 그리고 콧잔등을 제 눈으로 밀어 넣던 가람은 다짐한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맥 없이 제 몸에서 흘러내리는 은찬의 팔까지 꼭꼭 이불로 덮어 여미며 가람은 조용히 은찬의 곁을 떠나왔다.

거침없이 제 뺨을 감싸온 새벽의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쨍한 코와 뺨을 잔뜩 세운 외투 깃에 부비며 가람은 텅 빈 거리를 걸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은찬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방에 도착했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밤……? 가람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선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피로에 찌든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창밖으로 어둠이 선명한 밤이었다. 정신은 몽롱하니 잠에 취했지만 시야만은 또렷했다. 제 눈에 더 깊숙이 파고들며 새겨지는 은찬의 잔상을 떠올리며 가람은 눈을 감았다.

벽을 타고 제 코를 적시는 곰팡내 때문에 마치 은찬이 뒤에서 저를 껴안아주는 착각이 자꾸만 일었다. 그 잔상에 가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아 꿈으로 파고들던, 잠에 취하던 뭐든 좋았다. 주은찬을 또 눈에 그렸다. 은찬의 품에 파고드는 것 외엔 가람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코 끝에 쨍하니 퍼지는 비누 향에 눈을 떴을 땐 은찬의 품속이었다. 그 날도 여전히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은찬과 가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비 프로를 열심히 설명해주던 은찬의 목소리를 듣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깼어?"

미약한 목소리로 은찬은 홀로 중얼거리듯 가람에게 말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할까 싶었지만 가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당겼다. 더 자자는 암묵의 표시였다. 텔레비전에선 쉴 새 없이 하늘을 쏘다니는 새를 비춰주고 있었다. 노을이 이고 있는 하늘, 새벽의 어스름한 푸른 하늘을 부유하는 새를 은찬은 바라보고 있었다. 가람은 문뜩,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떼었다.

"뭘 보고 있어?"

"새……?"

"새?"

"응, 새……"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두 사람은 티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가람은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티비를 바라보았다. 다시 이어, 대답을 정정하기라도 할 모양새인지 은찬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을 타고나온 언어는 터무니없기 그지없었다.

"가람아."

나랑 결혼할래?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침대의 스프링이 거칠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은찬의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가람은 뭐라 말했던가. 싫어. 은찬은 웃었다. 그래, 나도 좋아……라고.

"멍청이."

"고마워."

뒤 이어 은찬은 긴 숨을 뱉었다. 은찬의 한숨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주 시큼하다 못해 토기가 오르는 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조금 추운 거 같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찬은 어리광이 한껏 깃든 목소리로 가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 칭얼거림에 대답 대신 가람은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제 가슴을 파고드는 그 몸짓에 가람은 자꾸만 눈물이 나고 있었다.

신경쇠약이었다. 의사는 재활원에서의 치료를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선고였다. 언제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줄어들었나 싶던 술병은 어느샌가 씽크대 한 켠에 셀 수도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람은 비닐봉투 속을 향해 병들을 그야말로 거침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미안해."

제 뒤로 퍼지는 은찬의 사과에도 가람은 말없이 봉투 속으로 병들만 쏟아부었다. 마치 그것이 제 대답이라는 양, 거침 소음들을 자아내며 유리병들이 봉투 안에서 깨지고,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병들이 깨지며 파편이 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작은 파편 하나쯤에 찢어진 피부 따위는 가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의 폭풍이 한바탕 두 사람의 적막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유리의 거친 폭풍 사이로 은찬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부드럽게 가람의 손등을 만지며 말했다.

"울지 마……"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걸까……. 제 뺨에 와 닿는 은찬의 손이 축축했다. 은찬의 손바닥과 제 뺨 사이로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눈물을 느끼며 가람은 울었다. 거친 손놀림으로 제 뺨을 감싸는 은찬의 손을 걷어냈다. 그러나 끈질기게 다시 제 뺨으로 향해오는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가람은 은찬의 손길을 받았다.

"너는 매번 말뿐이야……"

울음이 서린 목소리로 가람이 은찬의 가슴을 내리쳤다. 묵묵히 그 주먹을 받아내며 은찬은 웃었다.

"소리 쳐서 미안해……"

한참의 주먹질 후에 가람이 웅얼거리며 말을 뱉었다. 그 사과에 엉뚱한 말로 은찬은 응했다. 화난 가람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평온한 음색으로 은찬은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계란 후라이 해줘서 고마워."

"그런 말을 왜 지금 해……"

"그냥……?"

말들이 자꾸만 힘없이 버석이며 맥없이 흩어진다. 은찬이 내뱉는 숨 사이로 어렴풋이 희미한 술 냄새가 난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이 가람의 가슴에 자꾸만 먼지 쌓여간다. 자조 어린 목소리들이 긴 시간 만들어준 먼지로 인해 가람의 가슴엔 뿌연 잿더미들이 가득했다. 그 묵은 먼지들은 언제나 은찬의 말들로 이루어졌다. 먼지들은 곧 은찬과 제가 함께 한 시간의 무게였다. 그렇기에 가람은 언제나 하염없이 제 위로 쌓이는 은찬의 먼지들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자꾸만 꿈에 나와……가람아……, 그렇게 말하는 은찬의 이마엔 혹이 나 있었다. 이마의 한가운데에 불쑥 솟아있는 그 불청객을 바라보며 가람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이 자리에 이런 혹이 난 걸까……. 온 신경을 손끝에 쏟아 넣으며 가람은 부드럽게 은찬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 접함에 이마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아파?"가람의 물음에 은찬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고갯짓에 따라 힘없이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흐트러트린다. 고운 단풍빛이었다. 그 단풍을 한 움큼, 제 손바닥 안으로 움켜쥐어 그 속에 가람은 저의 코를 파묻었다. 단풍에선 희미하게 비누 향이 나고 있었다. 단풍은 소금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로 계속해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전에 같이 영화 보기로 하고……음……내가 늦었잖아……"

"응."

"미안해."

"응."

"또…… 전에 모르고 커피 쏟은 것도……"

"응."

은찬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사과하고 있었다. 이제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희끄무레해진 사과들이었다. 가슴을 막은 먼지들을 몽땅 게워내고 싶었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가람은 숨을 삼켰다. 공기 중에 부유하던 은찬의 먼지가 또 한 번, 가람의 가슴에 얹히고 있었다.

은찬의 감겨있던 검은 눈을 떠올리며 가람은 눈을 떴다. 눈을 뜨나 감으나 컴컴한 암흑만이 제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요를 깔고 몸을 편히 누여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잠은, 쉽사리 가람에게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너도 이랬을까?

눈을 감으면 엄마가 보여……

나도 지금 눈을 감으면 자꾸만 네가 보여, 주은찬……. 창문을 두드리는 달빛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잠들 수가 없었다. 창문 끄트머리의 일그러진 네모난 줄을 타며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 서랍이 있었다. 저 네모난 서랍장 제일 첫 번째 칸에는 주은찬이 먹던 약이 들어있었다.

서랍을 뒤져 무심한 손길로 약을 손바닥 한가득 털어 넣었다. 목구멍 뒤로 털어넘기며 가람은 눈을 감았다. 희뿌예지는 시야와 함께 천천히 안개 속으로 젖어들어갔다. 아, 이건 또 언제의 일이더라…… 그 즈음의 주은찬에게선 또다시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야……"

그렇게 말했던 건, 자신이었나? 주은찬이었나…… 이제는 기억마저 퇴색되어간다. 가람은 천천히 제 몸을 덮쳐오는 깊고 어두운 수면에 몸을 가라앉혔다. 곧이어 천천히 제게로 쌓이던 먼지가, 숨이 멎어들고 있었다.

은찬의 머리맡엔 먹다 남은 알약들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껍데기뿐인 약통을 보이지 않게 손바닥으로 밀며 가람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을 향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이불을 은찬의 몸에 덮어씌우며 가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힘없이 저를 향해오던 은찬의 손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너무 졸려……"

"그럼 자……"

"응, 잘 자…… 잘 자, 가람아."

근데 너무 추운 거 같아, 은찬의 중얼거림에 몇 번이나 이불을 덮어씌우며 가람은 입술을 악물었다. 왜 그런지, 꽉 깨문 입술에선 자꾸만 짠맛이 났다.

늦은 밤, 고즈넉해서 마치 침묵이 제 몸을 단단히 요에 못 박히는 듯 한 강한 고독이 휩쓸던 그 밤에 나는 홀로 눈을 붙이며 생각했다.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엔 소금기가 잔뜩 어려있었고, 등 뒤로 시커멓고 차갑기 그지없는 곰팡이들만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푸르게 시린 하얀 달이 자꾸만 창문을 두드리는 통에 잠들 수 없었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그 밤, 감은 눈 뒤로 자꾸만 어른어른 너의 얼굴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 안으로 쏟아지는 바람에 괴로웠다.

눈 안으로 자꾸만 은찬의 모습이 수놓아지고 있었다. 집을 나올까 해, 어색하기 그지없던 카페에서 주은찬은 자신을 향해 다부진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입에 빨대를 물고 문 채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가람을 보며 은찬은 뭐라 했던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갈래?

거절의 의사는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제 손 등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주은찬은 말하고 있었다. 생각 외로 큼지막한 그 손에 믿음직스럽단 느낌이 들었다. 저를 쳐다보는 주은찬의 눈이 너무도 다정하고, 따스해서 가람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불에 덴 듯 손바닥을 빼내고 말았다. 은찬의 얼굴에 실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찰나에 가람은 대답했다.

"응."

근데 나 하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한참을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가람은 컵 안에 남아있던 음료를 숨 한번 쉬지 않고 쪼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들이켰다. 이어 다짐했다는 듯 숨을 뱉으며 물었다.

 

왜 나야……?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가람은 어설프게 말을 이었다. 그, 백건도 있고……내가 아니여도 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양새로 가람이 더듬더듬 말을 뱉고 있었다. 그때까지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키던 은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에 눈물까지 고여가며 한참을 웃던 은찬은 곧이어 부드럽게 가람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청가람."

"왜."

"좋아서."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가람은 빨대만 쪽쪽 소리 나게 빨았다. 쪼르륵하고 울리는 텅 빈 빨대의 울음을 들으며 주은찬은 웃었다. 그 멍청한 얼굴이 보기 좋아, 가람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뺨을 물어가며 참았다. 카페 안에는 어지러운 노래들이 잔뜩 뒤엉키고 있었고, 은찬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숨과 웃음이 공기 중에서 어설프게 뒤섞이고 있었다.

한밤중이 다 되어서 도착한 집 앞에서 두 사람은 아주 약간의 포옹과 체온을 나눴다. 주은찬의 교복 블라우스에선 소주 냄새가 났다. 주은찬에겐 언제나 술 냄새가 배여 있었다. 그리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아주 약간의 향수 냄새와 희미한 비누 향이 주은찬을 이루고 있었다.

"너한테서 술 냄새나."

"그래?"

한쪽 어깨를 치켜든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은찬은 제 블라우스에 코를 박곤 킁킁거렸다.

"아, 정말이네?"

미간을 찌푸린 가람을 바라보며 은찬은 어색하게 변명을 덧붙였다.

"엄마가 모르고 흘렸나 봐……"

은찬의 몸에 태생적으로 스며들어있던 불운은 소주의 냄새를 지니고 있었다. 쓰기 그지없는, 그러나 덧없이 투명한 그 액체가.

제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주은찬 역시 제가 원해서 적신 적 없는 그 불운의 이름표를 떼어낼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 이름표 덕에 은찬은 언제나 쉽사리 동정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은찬은 제 스스로 동정을 구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언제나 손쉽게 그를 향해 연민을 자선하곤 했다.

"기분 나빠?"

그러나 단 한 번도 가람은 은찬이 불운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소매를 걷어 올린 탓에 드러난 푸른 팔뚝을 감싸 쥐며 주은찬이 말했다.

"추운데 따뜻하게 다녀."

가람의 팔뚝 위로 버짐처럼 울긋불긋 피어오른 멍들을 감추며 주은찬은 말했다. 가람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있고,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었다. 불행은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말도 있고……. 제가 주은찬에게서 불행을 맡은 것처럼 은찬 역시 저에게서 불행의 냄새를 맡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람은 제 팔을 감싸 쥔 은찬의 손을, 팔뚝을, 그 몸의 선을 천천히 눈으로 따라 그려보다 물었다.

"나한테서 냄새나?"

그 말에 주은찬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곱게 접으며 웃었다. 대답은 '아니', 였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문뜩,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