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현우백건ts/찬가람ts] 안녕, 현

엘리스.aliceeli 2016. 4. 28. 16:46

* 현우백건ts / 은찬가람ts

* AU 주의


*



안녕, 현.



그곳은 지금 어떤지 궁금해서 한 번 펜을 들어봤어. 넌 별로 기대치 않았겠지만, 내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 실은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나조차도 스스로에게 놀라울 따름이야. 네가 그리워하는지 기억은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교정에는 올해도 벚나무가 꽃을 피웠어. 봄이 왔다는 증거지. 전월까지만 하더라도 꽃은커녕 파리 새끼 한 마리 날리지 않고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어서 이러다가 아사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여기서 또 나무는 아사 따위 하지 않는다는 허튼 잔소리를 할 생각이면 집어쳐. 하긴 뭐, 어차피 편지라서 들리지 않으니까 맘껏 해두 좋아. 아무렴 어때.) 어느샌가 꽃을 틔었더라구. 보기가 좀 좋은 것 같기두 해.




(……여기서 건은 잠시 펜을 놀리기를 주저하는 듯 머뭇거렸지만, 이내 다음 줄부터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교정에는 꽃도 피고 새싹도 돋고 하는데 봄을 타는지 나는 마음이 좀 헛헛해. 봄이 왜 이리 와버렸는지 몰라. 타령도 좀 허다가 괜스레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에먼 곳을 빙빙 돌면서 혼자 숨바꼭질을 하다 방을 향해 걸어가곤 해. 기숙사 뒤뜰엔 그늘이 져서 그런지 그곳 풍경만큼은 한겨울이 따로 없어. 풀 한 포기 자란 일도 없고 새순 하나도 없고, 덩달아 꽃도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가면 아직 마음이 좀 편해. 허전한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기도 헌데, 결코 이게 내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혼자 오만감에 도취하지는 말아. 너를 그리워한다거나 그런 추측일랑 하지도 말고. 결코 널 위한 말이 아니니까 말이지.


나는 그저 방에 혼자 있기가 싫어서 괜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뿐이니까 말야. 이쯤이면 왜 내가 혼자 일지 궁금해 할 거 같네. 여기까지 읽었다면 너는 분명 ‘같은 방 쓰던 친구는 어디로 사라졌냐’고 물을 게 빤하니 말해줄게. 올 겨울에 가람이 애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렸어. 애가 애를 낳는데 당연히 죽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내가 현을 만나러 나갈 때면 가람은 혼자 고고한 척은 다 부려서 창틀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로 ‘뭣하러 일부러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불편하게 걸으러 가야 한담? 것도 남자랑?’ 허고 있는 핀잔 갖은 잔소리를 다 끌어다 늘어놓더만, 어서 온지도 모르는 사내놈이랑 홀라당 붙어먹고 애까지 가지게 될지, 그땐 저도 미처 몰랐겠지.


애가 여간 비실비실하던 게 아니잖어? 뱃속 애새끼가 잠잠할 석 달 때까지는 지도 치마로 어떻게 가리고 지냈는데, 고것이 참 신통방통해. 넉 달로 접어들기 무섭게 배가 삽시간에 커져버린 게 아니겠어? 처음엔 난 가람이 무슨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밥술도 제대로 못 뜨면서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지 밤마다 도둑괭이처럼 깨끔발로 살금살금 빠져나갔다가 새벽에나 돌아오곤 했거든. 그러고선 또 아침이면 치맛자락에 대고 토악질을 해대서 바닥이고 어디고 온동 제 침으로 범벅질 해 놓고 말야. 그래서 한 번은 못 나가게 막아봤더니, 똥 마련 뭐 새끼마냥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침대맡을 한참이나 서성거리지 뭐야, 급한 전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도 보였어. ‘좀도적질이라도 하러 다녀? 밤마다 어딜 그렇게 쏘다녀?’ 하고 물으니 애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땡그랗게 뜨고서 암말도 안 하는 거야. 어딜 가느냐 물어도 답도 안 해주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냐고 물어도 말이 없기에, ‘말 안하는 거 보니 급한 일은 아니겠네. 잠이나 처자. 신경 쓰이게 왔다리 갔다리 하지랑 말고.’ 나도 모르게 제법 쌀쌀하게 말해버렸는데 애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게 아니겠어?

현도 알지? 가람의 성미가 여간 깔깔한 게 아니잖아. 사막에서 자라난 선인장이 따로 없잖어, 그것도 대바늘만 한 가시를 온몸에 달고 내두르는데……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는데, 기억해? 언제였나. 현이 날 만나러 왔는데 아마도 내가 방에 없었던 모양이지? 현은 초조한대로 문을 두드리고 앞 켠에 고개를 대고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가람이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듯 싶어. 현이 고개 숙여 무언가 바시락 대니까 가람은 아마도 네가 몰래 문고리라도 따고 방안에 들어가 뭐라도 훔쳐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알다시피 그때는 학기 초라 우리는 철 모르고 멋모르고 집에서 쓰던 세간이며 아끼던 반짇고리 채로 다들 짐가방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잖어? 현은 그저 나한테 남길 메모를 적고 있던 사정인데. 가람이 뒤에서 들고 있던 책으로 머리를 내려쳤잖아. 기억해? 기억 못 해도 어쩔 수 없어. 현은 사과받질 못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가람이 사과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허구, 앞으로도 영영 안 할 테고, 받지도 못할 거야. 아마. (죽은 애한테 무슨 수로 받는담. 지옥에서나 받을 수 있겠지.)


아무튼 가람이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 시름 제가 다 떠안은 양 잠옷바람으로 서럽게 우는데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어. 무슨 일이냐 물어도 대답도 않고 입만 꾹 다물고 수도꼭지처럼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는데, 그런 애를 무슨 수로 달래? 괜찮냐고 위로할 맘도 없는데 허투루 말 건네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가만 보고 있더니 애가 지 입으로 술술 불더라구. 그제야 부른 배가 눈에 들어오지 뭐야.


애를 가지면 산모 배를 보고 남산만허다고 하잖아? 그런데 남산 같지는 않고 조그만 에덴동산 같았어. 현은 이런 거 싫어할라나? 일요일 아침이면 매일 아침 내가 챙겨대던 그 검은 성격책 말이야, 그 맨 앞장에 보면 동산이 하나 나와. 태초의 남자랑 여자랑 손을 잡고 살던 동산인데, 아마 딱 가람의 배 같이만 생겼을 거야. 그 동그런 배를 보니까 조금 만져보고 싶더라니, 나는 가람의 배를 살그머니 만져봤는데 너무 신기했어. 딱딱할 거 같았는데, 감처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거렸어. 가을이면 익은 감 같았어. 조금만 힘을 주어도 껍질이 손톱 밑에서 깨질까 두려워서 살살 손바닥으로 어루만져보았어. 참 따뜻했어. 가람은 사과 같은 눈을 가지고 감 같은 배를 가지고 있었어. 눈만 깜빡거리면서 쳐다보더라. 그때 생각했어. ‘어쩔 수 없지.’ 현은 어떻게 생각해? 지금 날 비웃고 있어?




(…… 바람이 불자 책상 위에 놓아둔 편지지들이 나비 날개처럼 팔락거렸다. 나풀거리는 종잇장 위를 건은 묵직한 서진으로 눌러두곤 옆에 놓아두었던 담뱃갑을 들었다. 작년 봄에 현에게 선물 받았던 담뱃갑이다. 뚜껑을 여닫는 형태인데, 위쪽엔 자개와 금박들이 박혀있고, 그들은 서로 엉키며 탐스러운 포도 세 송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은 뚜껑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 고민을 하다 곧 내려놓고 다시금 펜을 들었다. 글자를 가리고 있던 서진을 문서 맨 위로 옮겨두고 다시 사각이는 소리를 들려준다. 잉크에 적셔진 촉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소리, 소리의 끝에서 문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로 우리 둘의 비밀스런 생활이 시작되었어. 가람의 커다란 배를 감추는 게 우리 앞에 닥친 제일 큰일이었지, 어딜 가도 튀지 않겠어? ‘고 작은 배가 튀어나와봤자 얼마나 튀어나온다구.’ 하면서 현은 비웃고 있겠지만, 전부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가람의 배가 얼마나 튀었는지 몰라. 작은 실수 하나도 커다란 열기구 풍선처럼 부풀어버리는 곳이 학교인데 뭐. 다행스럽게도 애는 겨울에 태어날 거 같았고, 그 말은 배가 가장 부풀었을 때가 가을이란 소리 아니겠어? 우리는 있는 옷가지란 옷가지는 다 끄집어내서 바리바리 두르고 다녔어. 트리 장식보다 더 요란하게 둘러댄 통에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가람을 보며 웃다가 나자빠진 적이 있는데 제 모습이 그렇게 웃기냐며 고것이 뾰로퉁하니 삐친 게 아니겠어? 땀 뻘뻘 흘리면서도 초가을 무렵부터 가람은 겨울 외투를 입고 다녀야 했어. 그 안에는 내가 그 가을에 입을라고 집에서 곱게 접어 모셔왔던 두툼한 카디건도 있었구. ‘내가 아끼는 옷이니까 조심히 입어.’ 말하니까 가람이 울쌍을 짓더라. 미안하다는 말을 고것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구.


사실 현, 나 그 옷을 그렇게 아끼고 있지는 않어. 선물 받은 게 열네 살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한참이나 옛일이고, 그 카디건 말이야, 유행도 지났을뿐더러, 자주 입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아끼지 않는 게 분명하겠지. 입어본 것도 열, 아니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아보아. 소매도 한 뼘이나 짧아져서 입을 수가 없는 옷이야. 그런데 왜 내 가방에 챙겨서 왔던 걸까. 아마도 그 가을에 가람에게 입히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카디건은 스스로 제 운명을 깨닫고 내 가방 속에 숨어들어 왔던 걸지도 몰라.




(……잠깐의 뜸, 건은 결국 담배를 입에 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쳐내고 창문을 연다. 바람이 허락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문지기처럼 서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그녀는 바람을 좀 쐰 뒤 연초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초 끝에 빨간 불이 맺혀있다. 그녀가 힘없이 허공으로 뿌린 시선 끝에 얼른얼른 담배 잔불과도 같은 붉은 덩어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빛을 주시하며 희뿌연 연기를 몇 번 잇새로 기다랗게 내뱉던 그녀는 담배를 비벼 불을 끄고 자리에 앉는다. 펜을 집어 든다. 편지를 이어간다.)




현은 운명을 믿어? 난 사실 그 말을 잘 믿지 않아.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잘 생각해봐, 현.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가끔 애들끼리 돌려 보는 연애 서책있잖어, 거서 나오는 뜬구름 잡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내가 어째 믿겠어? 그래도 카디건과 가람을 생각하면, 뭐 믿을 수 있는 말이겠거니 하는데―지금 생각해보니 현은 운명을 믿을 거 같기도 하네. 물론 내가 몇 번 들춰본 서책에서 나불대는 시답잖은 ‘운명’ 따위가 아니라 영웅이니 신화이니 하는 초월적 운명에 대해서나 떠들어댈 게 분명하지.


운명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더 하자면, 애가 겨울에 태어나면 우리는 몰래 수녀원 앞에 내버리기로 했어. 현도 아는 곳이야. 여름이면 초목이 우거지던 그곳 말이야, 담장 밖까지는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아오른 기다란 침엽수목만 서있던 탓에 휘휘한 분위기를 내뿜던 곳. 몇 번 남몰래 담장 넘어 안으로 기어들어가곤 했잖아. 그러다 늙어빠진 사제한테 들키는 바람에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곤 했잖아.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게 뜀박질하곤 두 번 다신 들어가지 않겠다고 현은 화냈었어. 그곳이라면 애를 내버려도 새벽이면 산책 나온 수녀님이 데려가 줄지도 모르고, 새벽이 아니더라도 오가는 신도가 많으니 누군가 주워가겠지 싶기도 했어. 운이 좋으면 몇 번 담 넘어가 가람의 애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볼 수도 있고, 지나가는 척 문간 앞에서 기웃거리다 가람을 닮을 그 앙칼진 애가 다 자라선 우리에게 아는 척할지 누가 아는 일이겠어? 아니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멋대로 억지 부려 결정한 일이니까, 가람을 향한 공격은 그만두었으면 해. 가람은 찬성하지 않았어. 애를 데리고 제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내 말엔 반대였지. 남몰래 애를 낳고 조용히 길러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한테 들켜버리고 만 셈이었지. 헌데 뭐 어쩌겠어. 이미 들켜버린 것을.


애를 낳는다고 애 아빠가 돌아오겠어? 키운다 헌들 애가 고마워하겠어? 가람이 무슨 일을 할 줄 알아? 기껏해야 자수 몇 둘 줄 알고, 남보다 요리 재주가 남다른 거 말곤 걔가 부릴 재주가 어디 있겠어? 난 반대였어. 고생길이 너무도 훤하잖어, 가람이 그 애를 혼자 키운다면 앞으로 살게 될 인생은 퍽퍽한 사막보다도, 말라비틀어진 시래기보다도 더 질기게 될 거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알아서 해.’ 하고 가람이 심통을 부리길래, ‘그럼 내가 사감님에게 가서 널 일러도 고까워하지 않겠네? 그렇게 돼도 네 일이니 네가 책임을 지겄지.’ 하니 그제야 순순히 알았다고 말하더라고.


그게 수긍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임시방편이었겠지.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인데, 그때 같이 키워보자고 도와주겠다고 허튼 말이라도 좀 내던져볼걸 그랬나, 넋두리라도 들어줄 걸 그랬나 싶어. 어차피 이리될 줄 알았다면 못해줄 게 또 뭐람? 또 뭐가 됐든 가람이 혀를 내두르며 알아서 거절해줬을 텐데.


어디까지나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어. 산달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람의 몸이 느려졌어. 거북이가 따로 없었다니까. 한발 옮기고 쉬고 한발 옮기고 쉬고, 누가 보면 다 늙은 노인네가 지팡이를 깜빡하고 산책 나온 꼬락서니가 따로 없어서 먼 곳에 가기는 무리였어. 남몰래 어서 애를 낳을지도 정하고, 그 날에 어떻게 학교 밖으로 몰래 빠져나갈지도 다 세워뒀었고. 감사하게도 가람의 애는 겨울 태생이 될 예정이었고, 그건 12월 아니면 1월이었거든. 고 때쯤이면 겨울 방학이니 애들도 다 제 고향으로 떠날 테니 기숙사에 남은 무리가 몇 안 될 거였거든. 초조해할 문제는 없었어. 매끄러운 빙판처럼 모든 일이 순탄했어.




(…… 그녀는 머리를 헝클였다가 다시 가다듬는다. 귀 뒤로 머리 타래를 넘겨 보이곤 다시 펜촉에 잉크를 묻힌다. 입술을 꾹 깨물곤 다시 편지를 써 나간다.)




사실 가람이 남몰래 아이 이름을 정해둔 사실도 알게 되어서 내가 그에 맞는 한자 몇 도 찾아다가 종이에 적어 건네주었던 적도 있었다. 손바닥 안에 슬쩍 쥐어줬더니 애가 처음엔 어리둥절 허니 얼빠진 낯으로 나를 쳐다보다 종이를 확인하고 배시시 웃는 게. 천상 애가 따로 없었어. 안 그래도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애가 환하게 웃으니까 동산 같은 배가 더 눈에 튀었어. 이즈음 가라은 항상 양팔로 제 배를 껴안고 다녔는데.


타령은 여기까지만 할게. 현도 이런 말을 듣자고 내 편지를 기다렸을 리는 없고. 현의 이야기를 물어야겠어. 그곳은 어때? 풍경이 여나 거나 별다를 거 없어? 그곳도 봄 되면 꽃피고 여름 되면 비 내리고, 가을이면 나무들이 옷을 벗겠지. 뭐 구경할 거 있다고 거까지 배 타고 가서 고생해? 계집애들은 어때? 고생해서 간 보람은 있어야 할 텐데 어딜 가도 나만한 계집은 없다고 새삼 마음 깊이 내 외모에 탄복하는 중은 아니었나 몰라. 낯 반반한 계집년이야 현 주위에 여럿 있을 테지만 나만큼 매력적인 여인은 없지 않겠어? 같이 다방에 가줄 년은 있어? 그곳은 다방이 아니라 다르게 부른다고 했었지? 답장에 다시 알려줘. 현은 아직도 설탕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시겠고? 처음으로 같이 커피를 마셨던 날을 기억해? 설탕도 넣지 않은 그 사약을 왜 먹냐며 내가 신경질 좀 부렸더니 현은 이마 가운데를 짙게 구겨트렸어. 그게 그렇게나 화낼 일이었나 싶은데, 나 지금 쓰다 보니 좀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그래. 다음에 만나게 되면 사과를 해. 정중하게.




(…… 잠깐의 뜸. 그녀는 혀로 제 입술을 핥아 축인다.)




아무래도 마저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 내가 지금 말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것 같아. 몇 장 더 낭비할게, 그래도 허투루 쓰고 있지는 않으니까 눈살 찌푸리지 말고 읽어. 읽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태워 버려두 좋아. 현이 읽지 않고 내버려두다가 다른 이가 읽어버리는 건 꺼림칙해. 


가람이 정한 이름은 ‘가은’이었어. 누가 보나 앞 자는 지한테서 따온 거고, 후자는 그놈에게서 따온 게 역력해서 내가 ‘그놈 이름에 ‘은’이 들어가나 보지?’ 하고 말했더니 어찌 알았냐고 놀라다 웃더라니. ‘세상에 ‘은’씨 성을 가진 놈은 없을 테고, 그럼 보나 마나 ‘은’ 자 들어간 사내놈일 게 분명치 않어? 머리가 그리 나빠서 어떡하냐, 넌. 애가 너 닮아서 멍청할 거야.’ 했더니 내가 지를 모욕한 건 신경도 안 쓰고 뒷말에 새끼 개처럼 낑낑거리더라구. 이름을 알게 되어서 한자 몇을 찾아다 주었는데, 거기서 가람이 무슨 글자를 정했는지 몰라 내 자세한 표기는 할 수가 없을 거 같다. 태어난 애는 계집애였어. 가은이란 이름에 참 잘 어울리는 듯도 보였어. 눈은 가람을 빼닮았는데, 나머지는 내가 얼굴도 모를 지 애비라는 작자를 쏙 빼닮은 것처럼 보이더군. 다행스럽게도 애 젖은 물리고 죽었어. 애를 낳고 사흘 있다가 가람이 죽어버린 탓에 애가 자꾸만 젖을 찾아 울더라고. 젖동냥하러 다니느라 나는 가람을 배웅하러 가지 못했어. 그래도 지 딸년 때문에 그런 건데 서운해할 일이겠어?




(…… 또 뜸)




사실 가람이 딸 년, 가은을 쏙 빼닮은 놈 하나를 본 일이 있어. 얼마 전 일이야. 아니, 가은이 그를 쏙 빼닮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겠지만, 내겐 가은이 먼저였으니 그가 가은을 닮았다고 써둘게. 알다시피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거든. 소리 없이 다가온 그가 문앞에 서 있더군. 마주친 낯이 초조해 보였어.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꽤 건장해 보였어. 옷은 소박했는데 추레하진 않았어, 어떻게 알았냐고? 소매 끝에 달린 단추의 무늬가 꽤나 섬세했거든. 그 무늬로 보아 모름지기 알 수 있었어. 게다가 소박할 뿐이지 누가 봐도 위아래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 모양새하며, 어딘가의 도련님이겠구나 싶기도 했어. 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고 알량한 자존심일지도 몰라. 그놈이 도련님이든 아니든 사실 나한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는데, 가람이 어디선가 굴러들어 온 끄나풀 같은 비렁뱅이라던가, 어수룩한 사내놈 하고 뒹굴었다고는 좀체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와 나는 대각선으로 서 있었어. 우리 방은 현도 알다시피 문 앞에 바로 서면 가람의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잖아. 그런데 그가 찾아왔을 때 가람의 이부자리는 몹시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였거든. 그 침상을 가람의 자리라고 불러도 될지도 난 잘 감이 잡히지 않아. 이제 가람이 없는데 자리가 남아서 무얼 해. 이제 가람의 자리도 아닌 그 침대를 보며 그가 한참 동안이나 가람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나는 그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냐’며 다소 쌀쌀맞게 물었기에 그가 놀란 듯 보였어. 눈이 커졌었거든. 사실 주먹으로 한 대 뺨을 후려치고도 싶었지만, 애써 참았던 거니 난폭한 어투 정도야 그가 참아야 하는 게 아니겠어? ‘가람은 집으로 돌아갔나요?’ 하고 묻더군. 아무래도 그는 모르는 듯했어. 나는 ‘아니.’ 라고 말했지. 그때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어. 가람이 여기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 같아. ‘어디에 있나요. 지금 만나고 싶은데.’라고 말했어. 그 자리서 그냥 ‘죽었어.’ 라고 말해버릴까 싶었는데, 사실 그에게 가람이 있는 곳을 별로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어. 나라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을 거 같았거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가람은 다를 거 아니야. 가람은 달랐겠지. 보고 싶었을지도 몰라.




(…… 숨을 크게 내쉰다. 그녀는 책상 위 편지지 옆에서 나뒹굴던 봉투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그곳엔 현의 주소가 적혀 있다.)




현,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 자리서 ‘죽었어.’ 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놈이 얼빠진 얼굴로 게으른 소처럼 눈만 끔뻑이면서 날 쳐다보지 뭐야? 그래서 내가 한 번 더 말해줬어. ‘죽었다고.’ 무심하게 말했지. 요즘 한창 인기 있는 거들먹거리는 그 여가수처럼 말이야, 클럽에서 나올 때면 세상살이에 초연한 듯, 무심한 듯, 손을 하늘하늘한 실크 커튼처럼 흔들대며 걷는 여자처럼. 그 자식이 그 자리서 애처럼 울었어. 엉덩이를 한 대 걷어차서 내쫓아버릴까도 했는데, 여긴 그래도 아직까지 가람과 내 방이라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참았어.


사실 거짓말이야, 현은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겠지. 가람이 그 남자를 사랑했다고 생각하면, 어찌 된 일인지 심하게 대할 수는 없다고 자꾸만 자꾸만 어리석게 굴어. 나는 여기에 없다고 말했어. 그가 산책을 나갔냐고 묻더군. 나는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얼버무렸지. 그는 기다리면 돌아오냐고 물었는데, 가람이 돌아올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아니 몇 년이라도 그 자리서 꼿꼿하게 서서 기다릴 것처럼 보였어. 사실을 말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니, 보여주는 편이 순순히 납득이 갈 테니까. ‘청가람이 시내로 나갔어요. 어디 있는지 알 거 같은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는 길이 엇갈릴지 모르니 여기서 기다린다고 말했어. 나는 초조했어. 그런데 거짓처럼 입에서 말이 술술 흘러나오지 뭐야? ‘청가람에게 안내를 부탁받았어요. 누군가 자길 찾아오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좀 모셔와 달라고. 아무래도 당신 같네요.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그는 망설이는 듯 보였기에 나는 내 말에 쐐기를 박아야 했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내 마지막 말에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한다고 말했어. 그와 나는 아무런 말없이 교정을 걷고 교문을 빠져나와 전차를 타기 위해 걸었어. 그가 자신의 차가 있다며 그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나는 별로 그의 차를 타고 가람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저었어. 사실 전차로 가는 길밖에 모르기도 했거든.




(……)




교정을 걸으면서 그가 동백나무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던 듯도 해. 동백나무는 겨울 동안 더 야윈 듯도 보였어. 가지가 힘주어 쥐면 비명을 지르며 부러질 듯 가냘파 보였지. 그는 시간을 끌어 미안하다면서도 한참을 그 앞을 서성이며 마른 잔가지들을 들여다보고 있더군. 나중에 교문을 빠져나올 때 해준 말인데, 가람이 동백꽃을 좋아했던 모양이야. 자주, 자주 말했어서 어떤 꽃인지 너무 궁금했다고 말했어. 꽃이 피지 않아서 또 아쉽다고 했고.


나는 가람이 동백을 좋아하는지는 몰랐어. 이년 넘게 한방에서 붙어 지냈지만, 걔는 걔대로 나는 나대로 우린 서로에게 무심했잖아?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며 한방에서 둥둥 떠다녔지. 나는 ‘그런가요.’라는 말로 대답을 끝냈어. 그와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이 자리서 죽어버렸다고 말을 할까 그 생각만 곱씹었지. 그에게서 가람의 이야기를 듣는 게 몹시도 불쾌했어. 그가 뭐라고.

전차 속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 나는 창 밖만 보며 걸었지. 그때 현과 같이 갔었던 다방이 눈에 들어와서, 아…… 돌아오는 길엔 저 다방에 들러야겠다, 하고 막연한 계획만 세웠었지. 사실, 나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고 마셨던 적이 있어. 현과 다방을 다녀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가람과 단 둘이 갔을 때였어. 여름방학이 목전이었는데 가람이 몹시도 우울해 보여서 내가 장난을 좀 쳐보려고 억지로 데리고 갔거든. 커피를 마시고 오만상으로 찌푸러드는 가람을 보면서 유쾌했던 듯도 해. ‘어린애네. 설탕이나 넣어서 먹어라.’ 하고 골려주었더니 가람이 혀를 내두르며 나를 보고 유치하다며 말했었어. 그 날 나는 커피에 설탕을 넣지도 않았는데 맛이 좋았어. 정말로.


가람은 공원에 있었어. 가람의 아버지가 단단히 화가 나서 선산에 묻어주지 않았거든. 그래도 상례 치른 게 어디야 싶기도 했어. 그는 ‘가람이 공원에 있나요?’ 물었어. 사실이잖아? 나는 그렇다고 답했지. 그는 곧 가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듯 보였어. 그게 맥없이 꺼져버릴 비누 거품과도 같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어 그의 희망을 깨부수고 싶진 않았어. 그건 내가 아니라 가람이 해야 할 일이었잖아?


나는 덤덤하게 공원을 걸었어. 채 몇 발자국 걸음을 떼지도 않아 이 곳이 보통의 평범한 공원과 다른 범상치 않은 장소라는 걸 그도 눈치챈 듯 보였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어. 그저 묵묵히 걷다가, 걷다가, 작은 동산 같은 묘들을 스치고, 걷고, 지나치고, 가람에게 닿았어. 가람의 무덤은 정말로 가람의 무덤이었어. 위에 써둔 것처럼 그 동산말야, 가람의 배가 쏙 빼닮았다던 그 동산. 가람이 그 아래에 묻혀있었는데 뭔가 가람의 배 같았어. 동그랬거든. 동그랗고……




(……)




나는 그 자리에 그를 내버려두고 나왔어. 가람과 그 만의 시간을 만들어줘야 했을 거 같아서 비켜줬어. 정말 현명했지. 돌아오는 길엔 앞서 적은 대로 현과 갔던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셨어. 설탕도 넣지 않고 잘 마셨어. 다음에 오면 꼭 보여줄게. 커피에 설탕 넣지도 않고 깨끗하게 잔을 비울 수 있게 되었거든.




(…… 그녀는 창문을 닫는다. 커튼을 치려다 희미하게 제 눈동자에 걸리던 빨간 점들을 눈치챈다. 노란 눈동자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 노란 바탕 위로 빨간 점 몇 개가 수놓아졌다. 그녀는 세차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커튼 치기를 이내 포기한다. 창문의 잠금쇠만 단단히 걸어둔 채로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펜을 들어 바삐 손을 놀린다.)




창문을 열어 두었더니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봄이여도 아직 겨울바람이 나그네처럼 허공을 떠돌아다니는지 몸이 시려, 방이 횅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 아직 가람의 침대는 비어있어. 아마 내 졸업 전까지는 쭉 홀로 이 방을 쓸 듯도 해. 말하자면 주소도 그대로라는 소리야. 집말고 이쪽으로 보내.

내가 이 방을 나설 때쯤이면 현이 다시 돌아오겠지.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내 선물은 미리 사두지 말아, 유행 지난 옷을 선물 받고 싶어 하는 여인은 없다는 걸 명심해. 현은 선물을 잘 고르지 못하니까 주변에게 물어서 사 오는 편이 더 좋겠어. 편지는 이만 줄일게. 줄인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길게 늘려 썼지만, 이 편지는 아마도 현이 갔던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 현에게 닿겠지. 답장 또한 그렇게 되돌아 올 테고. 나보다 먼저 현에게 닿을 편지가 조금 부럽기도 하네. 내 대신 편지를 앞에 두고 커피를 마셔줘. 그곳의 커피는 어떤지 궁금하거든. 또 그곳의 꽃은 어떤지, 벚꽃은 피었는지, 동백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려줬으면 해. 그럼.




추신 : 이곳엔 동백이 폈어.




-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