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2

엘리스.aliceeli 2016. 3. 28. 20:57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2


* au 설정 주의

* 찬가람도 들어가있어요. 



*



재회는 의도치 않게 이루어졌다. 어두운 도시의 전망이 멋들어지게 도배된 그 투명한 방 속에서.

왔어?”

중앙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매끄러운 붉은 공단 옷을 입은 둥그런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중앙에는 탁상보다 자그마한 크기의 원형 테이블이 걸쳐져 있었다. 새빨간 천을 씌어놓은 건 아마도 미각을 돋우기 위한 심산으로 보였다. 모서리라고 할 곳도 없이 둥그런 식탁의 둘레를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어느 순간 하얀 덩어리 앞에서 멈춘다.

백건.

하얀 그를 보고 검은 머리의 그는 마음으로 조용히 이름을 읊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이리와 앉아.”

은찬은 제 오른편이자 백건의 왼편인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현우는 뜸 들이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안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지긋하게 응시했다. 금빛으로 된 나무줄기-덩굴들이 벽지 위에 수놓아진 그 방은 얼핏 보면 싸구려 술집같은 느낌이 배어 나와 저도 모르는 새 제 몸으로 스며들 것만 같은 위화감이 일었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벽지로 가려지지 않은 건 입구에서 정면으로 위치한 유리벽 이였다. 외벽이 탄탄한 유리로 이루어진 그 방은 조망이 꽤나 좋았다. 특히나 오늘 같은 저녁, 하늘의 반은 짙푸른 물이 든 남빛 심해와도 같고, 나머지 반은 쇠퇴해가는 태양 빛으로 작렬하는 주홍빛을 띄고 있는 야색은 실로 출중했다. 현우, 그의 심미 의식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현우가 자리에 앉기 위해 의자를 잡아당겼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굳센 소리를 허공에 던졌다. 까끌까끌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손에 들고 있던 차키와 휴대폰을 왼편에 올려둔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은찬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건가요. 한가하게 밥이나 먹자는 건 아닐 테고.”

한가하게 밥 먹자는 거 맞아.”

은찬은 넉살 놓은 미소를 배시시 띄우며 웃는다. 그 가벼움에 현우는 헛웃음이 절로 내뱉어졌다. 행동거지가 너무도 가벼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은찬은.

저번 일도 있고 해서 불렀어.”

저번이요.”

우리 집에 가람이 보러 왔을 때, 내가 그냥 내쫓았잖아.”

그 재수 없는 강아지.”

현우가 이 방으로 들어온 뒤 처음으로 듣는 건의 목소리였다. 현우는 살짝 고개를 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 단단한 옆얼굴은 시선에 미동조차 없다.

가람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마.”

제 아끼는 강아지에 대한 험담에 은찬이 불쾌감을 내비쳤다.

재수 없는 걸 어떡하라고.”

그 재수 없는 개 덕분에 이렇게 비싼 밥 얻어먹잖아.”

누가 사달라고 하디?”

백건. 미안하다니까?”

여타 어느 골목에나 가면 볼 수 있듯, 여섯 살배기 또래 아이들 사이의 실랑이와도 같은 대화를 들으며 현우는 지루함과 아찔함을 느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왼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대었다.

그래도 너 그 재수 없는 개 덕분에 내 도움받을 일은 있잖아. 안 그래?”

꽤 지긋하니 이어질 거 같던 말싸움은 은찬의 말 한마디에 맥없이 끊겼다. 깨끗하던 미간 위로 불쾌한 빗금을 하나둘 그어 넣은 백건이 단단히 팔짱을 꼈고, 은찬은 그와 달리 쾌활한 기분이 역력히 드러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튼, 저번 일은 사과할게. 미안하다.”

퍽이나.”

너 자꾸 그럴래?”

그의 단조로운 사과에 건은 콧방귀를 뀐다. 현우는 피식 이는 가벼운 웃음을 짓고,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정돈하며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양껏 먹어.”

양껏 먹으라고 해도……. 현우는 식탁 위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원형 테이블 각 가장자리엔 기름져 보이는 중화식 요리들이 늘어져 있었다. 기름기를 잔뜩 머금어 윤기 도는 탕수나 얄팍한 튀김옷을 입어 겉보기에도 바삭해 보이는 탕수육이나, 말린 열매 따위를 고추와 볶아 내놓은 음식이라던가, 죽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미안해질 정도로 느끼해 보이는 새빨간 냄비 속 멀건 액체를 바라보며 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먹을 만한 것이라곤 생뚱맞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뿐이었다.

실로 자연스럽게 그는 잔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투명한 유리잔이 미지근했다.

그 잘난 애완동물은 뭐하고 있냐.”

공통점도 유사성도 없는 세 사람의 만남의 대화는 겉도는 게 당연했다. 몇 번의 잔이 오가고 병이 기우는 새로 건은 문뜩, 유일하게 세 사람이 나눌 수 있는 공통의 화제라고 할 수 있는 은찬의 애완동물에 관해 물었다.

집에 있지. 혼자서 외로울 텐데……

홀로 집에 두고 온 제 개에 대한 생각으로 풀이 죽은 그를 보며 건은,

걘 니가 없는 게 더 좋을걸.”

하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아니야. 가람이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징그러워하는 거겠지.”

칭얼거리는 음성엔 물기가 어려 있다. 그런가……, 하고 말끝을 흐려 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은찬의 눈썹이 팔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따라 잔이 한 번 더 기울었다. 새까만 암빛으로 보이는 진한 액체가 투명한 유리잔 외벽을 따라 출렁거리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사라져 간다. 현우는 다시금 미간을 매만진다. 제 머리를 관통하는 따가운 통증을 느끼며. 웃음 하나하나가 매끄러운 가시가 되어 제 머리를 에워싸는 듯 한 통증에 현우의 미간이 쪼그라든다. 물을 먹어 쪼글쪼글해지는 한지처럼 가시를 먹어 구겨지는 미간.

건의 웃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은찬이 낮은 목소리로 짐짓 심각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

나 먼저 가볼게.”

갑자기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외투를 챙기는 그를 보며 건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걘 니가 없는 게 더 좋을 거라니까.”

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은찬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외로울 거야.”

말한다. 끝이 단단히 종결된 음절을 허공에 띄우는 그의 얼굴은 오랜 시간 공들여 숙려를 마친 수도승처럼 비장해 보였다. 현우는 조용히 제 빈 잔을 채운다.

먼저 갈 테니까 재미있게 놀아.”

건은 답응하지 않는다. 친우의 변덕스러운 태도에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바람맞는 일엔 아직은 익숙지 않은 듯도 보였다. 하기사…… 은찬의 변덕은 쉬이 맞출 물건이 아니기도 했다.

바지런히 손을 움직여 단추까지 곱게 꿴 그가 미련 없이 문밖으로 사라질 거라고 믿었는데,

오늘 또 먼저 가서 미안해.”

하며 현우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 손을 떨쳐내려는 양 그는 어깨를 가볍게 튕기며,

뭘 새삼스레.”

말했는데, 은찬은 빙그레 웃으며,

분명 재미있을 거야.”

하며 다시금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놓았다. 마치 단단한 담금질처럼 어깨를 지긋한 악력으로. 턱을 들어 힐끗 훑어본 그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고, 고개를 돌린 탓에 일직선으로 놓여진 조명이 눈이 시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린다. 이마에 주름이 걸려있다.

 

, 닫히는 문의 잠금쇠 걸리는 소리로 방은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침묵을 고요를 깨는 건 물 흐르는 소리, 건이 제 빈 잔을 채우는 소리이다. 투명한 유리 면을 거침없이 타고 흐르는 짙은 액체는 또한 거침없는 손놀림을 따라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제법 병을 비워냈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건을 보며 현우, 그 역시도 조용히 잔을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화젯거리라곤 없었다. 정적과 술 흐르는 소리가 번갈아 부드럽게 울리는 방 안에서 두 사람은 멍청히 잔을 들고, 술을 마시고, 마시고, 거듭 마시는 일만을 반복한다. 목구멍을 넘어 위장까지 축축하게 알코올에 절여지는 느낌이 들어 현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까지도 건은 표정 하나 변함이 없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테이블 위 올려둔 차키를 챙기며 현우는 이 식사의 끝을 먼저 알렸는데, 그 말에 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을 마주치니 알 수가 있었다. 변함이 없는 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미약하게 떠진 눈, 덕분에 아래로 휘어지는 속눈썹이라던가, 테두리가 부옇게 뜬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거리며 저를 쳐다볼 때 현우는 그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너 술 마셨잖아.”

하나 더 추가. 발음이 늘어진다. 취한 모양이었다. 빨갛게 젖은 눈으로 저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진득했다.

그렇죠.”

그럼 운전 못 하는 거 아니야?”

말끝은 높은음이다. 흥얼거리는 콧소리를 닮았다.

대리운전을 부르면 되겠죠.”

자고 가.”

손등이 따뜻해졌다. 건의 손이 그의 손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이 위에 호텔이다?”

손바닥을 타고 미지근한 미열이 스멀스멀, 제 안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현우는 이맛살을 작게 찌푸렸고 그 탓에 실눈을 뜨는 양 검은 눈이 작게 줄어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건은,

.”

하고 부른다.

나랑 잘래?”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적시며 물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