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5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5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5
월요일 오후, 한주의 시작답게 책상 위에 가득 올라있던 각종 교무처 서류들을 말끔히 해치운 은찬은 체육관으로 향했다. 책상을 깨끗이 비웠음에도 얼굴에 개운함은커녕 비 오는 날 축 처진 개처럼 그늘져있었다. 그의 그늘의 연유는 딱 하나였다.
‘청가람’.
곁에서 챙겨줄 이 하나 없을 정도라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놓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그 이틀간 은찬이 지켜본 결과는 그랬다. 딱히 외적인 결함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결함은 내부에 기인하고 있는 거겠지…….
썩 그렇게 믿음직스런 인물이 아님이 분명한 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한다고 했을 정도면 응당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물건’일 게 분명하다는 게 은찬의 생각이었다. 우선 아무리 개인 종목이 활성화된 운동을 하고 있다 한들, 체육과 특성상 그들은 떼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방임 되는 대상이란 없었다. 그런 무리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청가람, 그녀의 결함 때문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육체를 소모하는 과 특성답게 대다수가 활기차고 넉살이 좋아 처음보는 이에게도 낯 부끄럼 없이 술 한잔을 얻어먹을 정도로 외향적인 게 태반이다. 내성적인 이도 간혹 있었으나, 바람에 펄럭거리는 체육복만큼이나 오지랖을 펄럭거리는 이들은 ‘동기사랑 나랑사랑’이라는 구호 아래서 겉도는 그들에게 ‘관심’이라는 구호품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으니 말이다. 서로간의 유대나 우정을 강조하는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강압은 아니었다.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관심과 애정을 서로에게 쏟으며 단결하는 분위기가 무리의 특징이었다. 적어도 은찬이 현역일때는 그랬다.
그녀 앞에 붙어있는 「인재」라는 이름표가 문제였을까? 그 인재라는 말은 실로 모두에게 껄끄러운 딱지와도 같아서, 미움을 받는 이들이 몸에 붙이고 다니는 아니꼬움과도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부여받은 가격표와도 같이 높은 자신의 상품가치만큼이나 미움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종종 그런 엘리트들도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숨만 쉬어도 모두의 시기와 동경과 질시, 질투를 받는 점이 그들의 특성이었다. 그 와중에 폭탄 하나를 터트렸다면……. 응당 엘리트라고 하면 모두가 고질적으로 갖고 있는 편견처럼 그녀 역시 도도한 콧대를 휘날려 미움을 받은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가 고립되는 건 아마 시간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가람이 미움을 받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은찬의 추리가 너무나 앞서나간 판단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야 그럴게, 가람은 정말로 혼자 있던 것밖엔 없었다. 혼자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연습했다.
개인 기록이 중요시되는 종목이다보니 개인훈련을 고집하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 체육관에 있어도 그녀는 그녀대로,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대로 훈련을 했을 테니 말이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오롯이 스스로에게만 몰두하기 위해 개인 훈련만 고집했던 이들도 몇 있었다. 멀쩡하던 이들도 슬럼프에 빠지거나 시합을 앞뒀을 땐 앞다투어 홀로 독방에 갇힌 죄수마냥 개인 훈련에만 몰두하였으니 말이다. 은찬 역시도.
은찬은 과도한 추론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아직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편견을 지니고 접근하는 건 제가 보기에도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같았고, 미리서부터 겁먹을 필요조차 없었다. 인재든 뭐든, 청가람도 결국 저와 같이 인간일 테니 사자처럼 저를 잡아먹을 리도 없을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질질 늘어진다.
체육관 앞까지 도달하는 데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느긋하게 풍경 하나하나를 마음에 그려 넣듯 은찬은 시선을 뿌려대며 느긋이 걸었다. 결국 은찬은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손톱을 세워 문고리를 긁던 그는 결심한 듯 문고리를 돌렸다. 문고리를 돌리던 순간, 문득. 생각했다.
도무지 저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청가람이 제게 무거운 짐이면 어떡하지, 버거울 때 벗어던질 수 있는 짐인가. 저울질하는 새, 문은 열렸다. 가람의 시선이 제게 강렬히 꽂혀오고 있었다.
*
“안녕?”
마침 가람은 매트 위에서 홀로 옷단을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검게 차려입었던 저번과 다르게 오늘은 진한 회색 민소매 상의에 진한 검은색 레깅스 차림이었다. 무릎 아래론 훤하게 드러나 있다. 그 덕에 허리 아래로 뻗어져 내려가는 골반이나 엉덩이, 탄력 진 허벅지에 자꾸만 눈길이 꽂혔다.
“청가람……, 맞지?”
선홍색 눈동자가 빛 아래서 반짝였다. 찌푸려지는 미간, 매끄럽게 휘어 올라가는 외 입초리. 보조개가 살짝 패인 그 얼굴 위 두 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역력한 적의였다.
“기자라면 꺼져요.”
“연습하던 중이야? 아, 혹시 방해니?”
“인터뷰 안 해요.”
“인터뷰 아닌데…….”
무안한 은찬은 귓불만을 매만진다. 가람은 그에 아랑곳없이 은찬의 한쪽 어깨를 퍽 밀치곤 매트 끄트머리에 널브러져 있던 수건을 탁탁, 먼지까지 일으키며 털어댄다. 은찬은 한발찍 더 당겨 가람에게 다가갔는데, 그때 가람은 슬쩍 뒷걸음쳤던 듯도 하다.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바지에 손바닥을 쓱쓱 비벼 땀을 닦은 은찬은 악수를 청할 요량으로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살갑고 느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걸었기에 상냥한 감이 역력했다.
“체교과 조교 주은찬이라고 해요. 지금 바빠요? 괜찮으면 이야기할래요?”
“댁은 시간이 넘치시나 보네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살갑게 대하는 은찬과 다르게 가람의 태도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내민 손도 냉랭히 무시한 채 지나쳐간다.
“아, 아니면 있다가 밥 먹죠? 같이 밥 먹을래요?”
“제 밥을 댁이 왜 신경 쓰시죠.”
“말했잖아요. 이야기하자고.”
“조교님께선 시간이 많나봐. 전 시간이 없어서 댁이랑 볼일이 없겠네요.”
지속되는 상냥한 목소리에도 날이 선 답만이 되돌아와 꽂힌다. 한쪽에 서 있는 그는 무시한 채 가람은 손목을 비틀고 팔꿈치를 주무르고 매트 위를 가지런한 몸놀림으로 한 바퀴 구른다. 마치 불청객 쫓아내듯 은찬을 뒷걸음질 치게 거리를 좁혀온다. 이윽고 쭉 내민 그녀의 팔줄기가 은찬의 콧등을 스치고 지나쳤을 때,
“방해니까 꺼져줄래요?”
가람의 체취가 훅 밀려들어 왔다. 빨간 눈이 은찬의 눈동자 속으로 정확히 맺혔다. 결함이군……. 은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