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은찬가람/찬가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엘리스.aliceeli 2016. 3. 11. 13:03

[은찬가람/찬가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 au 주의



나는 개 같은 거 필요 없어.”

우렁찬 목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벽을 쩌렁쩌렁하니 후려치며 지나간다. 긴 메아리였다. 복도가 텅 비어 그런건지, 아니면 장내가 우람하니 비대한 제 울림통을 자랑하느라 소리의 파문이 거세었던지 분간은 쉬이 가지 않았지만, 메아리의 근원지인 소년과 넓디넓은 대리석 복도는 이질적이었다. 아직 그림이 덜 채워진 텅 빈 화폭에 그어놓은 구심점같이, 하나의 작은 피사체처럼 소년은 연회색 짙은 대리석 복도 한 복판에서 다시 한 번 우렁차게 짖었다.

개 따위 필요 없어. 갖고 싶지도 않아.”

소년의 맞은편에 놓인 그는 거멓다. 단단한 외벽 틈바구니 사이로 돋아난 쇠창살 사이로 내리쬐는 하얀 빛들은 그의 머리칼에 닿아마자 그림자로 변한다. 그저 옅은 농도의 묵칠을 끼얹은 듯 그의 머리는 검고, 빛을 받은 부분은 좀 더 묽은 검은빛, 옷조차 새까만 와중의 오직 살결만이 허얳다. 병약한 폐렴환자처럼.

하지만 가람아, 아버님께서

어쩌라구.”

되바라진 음성이었지만, ‘아버지라는 단어만으로도 소년의 뺨 위로 미색이 떠올랐다. 못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어질 뒷말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님께서 지시하신 일이잖아. 개를 골라오면 분명 착한 아이라고 기뻐하실 거야.”

소년의 귓가에 그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부드럽게 착 감겨온다. 사탕받기를 고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미약한 홍조로 달뜬 뺨을 보폴리며 소년은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연지색 눈동자와 검은 밤빛 눈동자가 만난다. 그는 눈을 곱게 휘어트리며 웃었다. 창백한 살결의 그는 검은 눈을 굽혀 웃었기에, 하얀 하늘에 검은 조각달이 뜬 것만도 같다.

안 좋아하기만 해 봐.”

퉁명스러움을 뒤로 소년은 불만으로 얼룩진 발소리를 깨끗한 복도위에 새겨 넣고 있었다. 그 뒤를 그가 쫓는다.

 

*

 

깔깔한 성미를 자랑하던 소년의 이마 위로 잔 빗금들이 거세게 빗발치고 있다. 후둑거리는 빗방울에 두들겨 맞은 창문처럼. 잔 실금들이 기워져있다. 띄엄띄엄한 박음질 선의 바늘은 제 앞에 마주선 검은 소년, ‘현우에게 있었다.

너가 왜 여기 있어.”

여기 왜 있겠습니까. 개를 고르러 왔죠.”

현오!”

현우야……, 내가 알기로 너는 내일

그랬죠. 그런데 누구 멋대로 내가 뒷전으로 밀리는 겁니까?”

현우야. 네가, 네가 형이잖아. 형이니까.”

누가 형이야?!”

들으셨죠? 형 아닙니다. 그러니 없는 아우에게 양보할 이유도 없죠.”

현오는 난색을 표한다. 초조한 낯으로 가람의 기분을 살피며 그는 안절부절 못 한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현우의 관심은 온통 에게 쏠려있었다. 저 어둑어둑한 철창 너머에서 긴 쇠사슬을 목줄에 늘어트린 채 엄습해 올 제 개를 향해.

소년들이 서있는 방은 어둡다. 조명이라고는 양 벽면에 붙은 할로겐 램프 한쌍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천장을 향해 빛을 쏘아내고 있어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았다. 빛이 약한 방은 그림자를 뒤집어 쓰고 있다. 사방 온 벽면에 곰팡이를 풀어놓은 듯 벽지 또한 새까맣다. 습하고 퀴퀴한 향내가 뺨은 물론이고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어오는 통에 차분해진 머리칼들이 이마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곰팡내가 자꾸만 코를 웃돌았다. 코끝이 간질간질거려 가람은 연신 재채기를 토해내기도 했다.

검은 벽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모양의 방은 3분의 1가량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 경계에 너무도 단단하고 차가운 유리벽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이 방의 모든 방문객들은 유리창 너머를 응시하는 일만이 가능했다. 10cm 두께의 두터운 몸집을 자랑하는 단단한 유리창 위를 굵직한 쇠기둥들이 가로질렀다. 꺼져가는 화촉만큼이나 뿌연 빛을 내뿜는 조명등 아래에선 그 무엇도 빛나지 않았다. 빛을 머금지 않는 사물들은 그림자까지 제 몸덩이에 붙여내는 탓에 한층 더 두껍고, 단단하고, 묵직하고, 거대하게만 보인다.

유리창으로부터 반대편 벽면까지 시선을 쭉 늘어트리면 정가운데 검은 쇠문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이 경계 너머의 생물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이어진 길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개들이 사는 곳과 주인이 사는 곳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개들은 주인에게 선택받기를 원했고, 주인은 기꺼이 제 맘에 드는 개를 구원해 주었다. 무릇 온순한 개에게는 다정한 주인이 붙기 마련이며, 그는 따땃한 품과 넉넉한 식량을 거며쥐게 되는 셈이었다. 그가 취할 행동은 단지 복종’.

꼬리를 내리고 이를 죽여놓은 개에겐 낙원이 찾아온다. 그것이 실로 낙원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종종 반대의 경우로 가 주인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오늘과도 같은 날,

…….”

초조한 낯빛으로 현오는 한 쌍의 주인과 한 쌍의 개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들어온 개는 단 두 마리. 두 마리 모두 수컷으로 한 쪽은 하얀 털을 자랑하고 새끼치고는 몸집이 단단했다. 뼈대가 굵어서인지도 몰랐다. 뼈대가 굵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거친 발길질에도 쉬이 부러지지 않을게 첫 번째였고, 금세 몸집을 키워 멋진 사냥개로 양육해낼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에 비해 다른 한 마리는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았다. 그렇다해서 비실비실하게 말랐단 의미는 아니었다. 단순히 뼈대가 굵지 않다는 말에 불과하다. 왼쪽의 개가 상대적으로 큼직한 팔뚝을 자랑하는 것과 달리 오른편의 개는 잔근육들이 다닥다닥 살갗 위로 붙어있어 상대적으로 피부에 탄력이 넘쳤다.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자랑하다)

두 마리 모두 다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품종이었다. 말하자면 S급 중에서도 특 S. 두 마리 모두 잘 조련하기만 한다면 뛰어난 명견이 될 미래가 예지되었다. 비록 주인의 머리가 아둔하고 멍청하더라도 그들은 웬만한 명견들 위를 웃돌 수도 있을 듯 보였다. 못해도 중박을 칠 개들이었다. 그러나,

개들은 주인에게 흥미가 없었다. 아니,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어보였다. 흰 개는 들어오자마자 유리창 너머를 재빠르게 눈으로 스캔하더니 등을 돌린 채 옴짝달싹 하는 일도 없다. 오른편의 개는 그저 제 검은 눈동자로 무심히 유리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응시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그저 어디 걸어둘 곳이 없어 유리창에 제 눈동자를 걸어놓은 것 뿐이다.

현우는,

원래 개들은 다 이렇습니까?”

묻는다. 그에 현오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입술로,

아직 야생동물이잖니. 길들이기 전에는 거친 게 당연해.”

대답했고, 그에 가람은,

재수없어.”

말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허탕인가, 싶어 현오는 마른 한숨을 내쉰다.

차라리 왼편의 개가 더 낫겠습니다. 일단 크잖아요.”

으응……, 그럼 현우는 그걸로 할래?”

누구 맘대로?!”

그럼 댁이 왼쪽개를 가지시던가요. 전 사실 별로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럴까, 가람아?”

누구 맘대로?!”

현오는 마른 한숨을 내쉰다. 성난 갈퀴질을 선보이는 가람의 음성이 둔탁하게 어둔 방안에 메아리친다. 할로겐 램프 불빛이 언뜻, 언뜻, 일렁였던 듯도 보인다.

심기불편한 가람의 눈가가 쪼글쪼글해졌다. 습한 곰팡내에 찌든 탓에 비틀어져버린지도 모른다. 날을 세운 눈동자로 가람은 유리창 너머를 세심히 주시한다. 왼편에서 등을 돌린 허연 개와 오른편에 놓인 검은 눈동자의 무기력한 개. 개의 털은 빨갛다. 새빨갛다. 제 눈처럼.

얼핏, 스치듯 빨간 빛과 빨간 색의 교집합이 자아졌던 듯도 해, 가람은 눈을 깜빡인다. 세차게. 눈커풀이 바스락거리며 저들끼리 엉겨붙었다 떨어지는 사이로,

가람아!”

, 하는 소리가 가람을 향해 돌진했다. 가람은 등줄기를 얄팍하게 흔들어대고, 떨리는 호흡을 내뱉는다. 긴장으로 목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개는 앞발을 들어 유리창을 밀어내며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 빨간 눈동자가 빨려들어가 있었다. 한참을, 또 한참을 공들여 꼼꼼히, 개는, 빨간 털의 개는 빨간 눈동자의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뿌옇던 눈동자 위를 덮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맑아졌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람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목울대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어 침을 삼키곤, 혀로 마른 제 윗입술을 축이곤 말한다.

이 개로 할게.”

눈동자가 단단히 빨간 개에게 꽂혀 있었다.

이 개는 내꺼야.”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