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3

엘리스.aliceeli 2016. 3. 1. 23:13

[은찬가람ts/찬가람ts] 로맨스를 부탁해 3

체교과 조교 주은찬 x 기계체조하는 가람이 ts 

*설정날조 주의!




*

 

여기서 뭐 하냐.”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한참 기다렸잖아.”

문 앞에 건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제 둥지로 다가오던 은찬을 발견한 그는 그저 주머니에 꽂아두었던 손을 들어 보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이 좀 있어서.”

은찬 역시 주머니에 꽂아뒀던 손을 끄집어낸다. 손가락 끝에 딸려 나온 열쇠고리가 찰랑 찰랑거리며 맑은소리를 들려주었다.

무슨 일. 팔자 좋은 조교님께서 할 일이 다 있으셨어요?”

그런 게 있어.”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대낮부터 술은 무슨. 넌 누굴 양아치로 아냐.”

양아치 맞지. 근무시간에 멋대로 마실 이나 다니시는 한량 조교님.”

시끄러워. 게임하러 온 거면 조용히 게임이나 하다 돌아가셔.”

분부가 있겠습니까여.”

엷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은찬보다 먼저 잽싸게 건이 안으로 들어섰다. 난방을 틀어두고 가지 않았기에 조교실은 변덕 심한 가을날처럼 쌀쌀맞았다. 건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은찬은 히터의 전원을 올린다. 온기를 토해내는 히터의 숨소리가 윙윙거리며 일어날 준비를 하는 컴퓨터 본체 소리와 함께 맞물려 허공을 맴돌았다.

마치 그곳이 제 자리인양 건은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제 몸을 두었고, 은찬은 소파에 몸을 눕힌다. 수업시간 내내 졸았음에도 그의 입은 자꾸만 제멋대로 쩍쩍 벌어지며 하품을 토해내었다. 목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뼛소리가 묵직히 울려 퍼진다.

점심은 먹었냐?”

달칵 이는 마우스 소리에 겹 물린 질문이었다. 새삼스러운 건의 세심함에 은찬은 사뭇 감탄하며,

웬일로 니가 내 점심을 다 챙기냐.”

말했다.

안 먹었으면 짜장면이나 같이 시켜먹을까 했지. 한 그릇은 배달 안 해주잖아.”

그럼 그렇지……, 먹었어.”

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제 계획과 예상이 흐트러져 건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볼을 구기고 머리를 긁어대며 말했다.

먹었어? 쏘다니면서 끼니까지 챙기시고 팔자 좋네요.”

빈정거리지 마.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으니까.”

일곱 살 철없는 아이가 깐족거리듯 이죽이는 건을 향해 은찬은 한숨을 내쉰다. 소파 위에 몸을 눕히며 잠을 청하려는 요량으로 제 왼팔을 베고 눕는다. 몸무게에 짓눌린 소파가 이죽이죽 소리를 들려주었다.

마실 다녀온 주제에 뭐가 그렇게 피곤해.”

마실 아니야.”

건의 빈정거림에 그는 칼답이다.

그럼 어딜 쏘다니다 온 건데. 아침에도 와봤더니 문 잠겨있던데. 설마 여태까지 집에서 쳐 자다가 나온 거 아니지?”

내가 넌 줄 알아……, 할 일이 좀 있었어.”

그러니까 뭔 일.”

니가 내 마누라야? 뭘 자꾸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이 방에 있는 컴퓨터가 내 마누라라서 그래요. 내 마누라 좀 보려는데 니가 없으니까 마누라꼴을 반나절이나 못 봤잖아.”

봄날 공기에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인다. 먼지 부스러기는 봄을 머금어 반짝거리며 사방에 흩어지면서 바람 위를 부유하고 이따금 그의 뺨 위로 앉기도 했다. 그가 몸을 작게 비척일 때마다 작은 손가락질에도 반짝이는 먼지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몸을 팔랑거리고 부르르 떨며 빛을 털어댄다. 봄볕이 참 좋았다. 오전 나절까지만 하더라도 침침하던 게 맞는지 혹 제 망막의 오해는 아니었던 건지, 그는 허공을 떠다니는 빛을 본다.

조명등 아래에서도 먼지는 빛이 난다. 만들어낸 인공조명 아래서 부스스 흩어지는 먼지 티끌을 바라보던 은찬의 매끄러운 이마를 타고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련다. 눈꺼풀과 속눈썹이 머리칼과 엉겨붙는다. 눈을 세차게 깜빡일 때마다 눈앞으로 언뜻언뜻 발간빛이 일순 망막 전체에 쌓였다가도 흩어져 나간다. 비 오기 전 겨울밤에 하늘 위로 끼는 분홍빛 얼룩같기도 한 것이, 혹은 잔기침이 심한 오후의 석양처럼.

발간빛이 빗발친다. 흘러내리던 머리칼 사이로 잠들어있던 붉은 눈동자가 빗발친다. 귀 뒤로 들러붙어 귓불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갈빛 머리카락도, 그 머리칼 틈바구니속에서 가지런히 솟아있던 연분홍빛 귓불도. 생각이 났다. 문득.

은찬은 손가락 사이로 제 머리칼을 넣어 비벼댄다. 입을 열어 운을 떼었다.

청가람 말이야.”

청가람?”

의자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책장 너머로 건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뜬구름을 잡겠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시종일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은찬은 가람을 설명한다.

…… 기계 체조하는 애. 작고, 긴 갈색머리에 눈은 빨갛고.”

특징을 집어 말해봤지만, 건은,

누구지. 몇 학년?”

묻는다. 전혀 모르겠다는 낯이다.

아마 이 학년.”

아마? 그런 애가 있던가. 그런데 걔를 왜?”

아무튼, 걔가 있는데……

은찬은 말을 더듬으며 뱉어낸다. 가람에게 붙일 말들에 한껏 공을 들이는 듯도 보여,

설마, …….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조교까지 돼서 이제 이 학년한테 껄덕대려고? 니 나이를 생각하세요.”

신입생 시절 고백 몇 번 받아 사귀었던 여학우들의 일을 여태껏 트집 잡는 그였다. 건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을 주시하며 은찬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다. 기가 차 내뱉은 한숨 덕에 가슴 또한 주저앉았다.

. 사람이 말을 하는데 좀 끝까지 들어주지 않겠니. 사랑하는 친구야.”

, 사랑하는 친구님. 정신 차리시면 좋겠구요. 말해보세요.”

그리고 나 껄떡댄 적 없어. 누구든지 간에. 아무튼……, 그런 애가 있는 거 기억해. 어제 신우재가 나 부른다고 해서 다녀왔잖아.”

그랬지.”

그런데 나보고 그 애를 부탁한대. 말론 친구가 되어주라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중매는 아닐 테고. 신우재가 부탁할 정도면 운동도 잘 할 텐데? 생각이 있으면 너한테 여자애를 부탁하진 않겠지.”

관심 없는 태도로 건은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 까닥 거리고만 있다. 은찬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들은 쉴 새 없이 저들끼리 엉키거나 풀어지곤 하였는데 끄덕거리는 고개와 맞추어 위아래로 솟구쳤다 땅으로 떨어지는 발로 보아 그가 지루해하고 있음을, 또 대화를 끝내고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길 원함이 명백히 표났다.

사람 말 좀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래, 친구님. 친하게 지내라는 소리잖아.”

은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눈은 고운 주름을 접어가며 반듯하게 웃고 있었지만, 찌푸려진 미간이나 비대칭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다.

그런데 왜 너한테 그걸 맡겨?”

명백한 물건 취급이다. 은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불편함이 배어 나오는 몸짓은 아니었지만 성가심은 역력했다. 난처함도 슬그머니 꿰매져있다.

몰라. 내가 한가해 보이나 보지.”

너 한가한 거 맞긴 하잖아.”

아니거든. 바쁘거든요. 짱 바쁘거든요. 저번 주까지 신입생들 때문에 처리할 서류 짱 많았거든요.”

지금은 없잖아. 안 그래?”

분명 전주만 하더라도 서류와 각종 증명사진들이 오색찬란한 형광 종이처럼 굴러다녔었지만, 책상 위는 깨끗하다. 먼지 몇 알만이 굴러다니고 있다.

그건 그런데……, 자꾸 말 끊을래?”

그렇게 싫으면 여기서 투덜대지 말고 가서 하기 싫다 말하던가.”

사실 건의 말이 정답이었다. 은찬은,

어떻게 그래.”

무기력하게 말했고,

우유부단하기는…….”

샐쭉거리는 얼굴의 건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을 흘린다. 귓등으로도 흘려 듣는다 싶어, 누구에게 상담-혹은 투정-하려던 건지 스스로의 한심함에 은찬은 한숨을 내쉰다. 건은 의자를 굴려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우스의 달칵거리는 소리가 난다. 정말로 화제에 흥미가 없었음이 역력하고 또렷하게 발산되는 태도였다. 그 극명한 태도에 은찬은 홀로 팔짱을 낀 채로 머릿속을 굴려간다.

친구가 되잖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말이었다. 냄새 없이 사라지는 그 말처럼 청가람도 사라져버렸다. 어스름 녘 힘없이 풀어지는 빨간 빛 속에 가라앉은 하얀 구름처럼. 땅거미가 금세 모여들어 잡아먹히는 발밑 그림자마냥.

구두 소리가 빗발쳤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발자국은 찍히지 않고 있었다. , 어쩌면 잠에서 깨지 못하고 여즉 텅 빈 교실 속에서 홀로 눈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닐까. 못에 지는 물너울처럼 출렁이던 눈꺼풀을 생각한다. 아래로 뻗치던 속눈썹과 머리칼, 그리고 그 속에 빛나고 있던 새빨간 눈동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