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1
[현우백건/현백/현건] 녹다 1
* au 설정 주의
* 찬가람도 들어가있어요.
* 란님(@tigerinmarch) 과 함꼐 하는 연성교환
한 쌍의 성기가 얽혔다가 풀리며 끈끈한 점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그 멀건 액체를 바라보던 현우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 액체를 윤활제 삼아 다시 한 번 남성은 제 성기를 비비고 밀어 넣고 마찰시켰다. 내벽을 긁어내는 그의 허리 짓을 따라 여인의 침으로 젖은 입술이 번들거리며 붉게 빛났다.
사방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 쌍의 남녀는 교미 짓을 하고 있었다.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가슴을 핥고, 성기를 집어넣었다. 이따금 그들은 이를 세워 서로의 살점을 뜯어내듯 자국을 내었고, 그럴 때면 종종 서로의 뺨을 치며 성기를 박아대었다.
암흑으로 뒤덮인 가운데 한 쌍의 몸덩이를 따라 조명이 각도를 바꿔가며 빛을 쏠 때마다 그들을 둘러싼 유리 벽이 빛을 튕겨내며 번뜩였다. 물론 특수 제작된 유리였기에 내부는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안엔 저 발광하는 뜨거운 조명보다도 더 눈자위를 번뜩이며 교미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눈동자가 엿보이는 듯했다.
여인의 입에서 터지는 탄성이 스피커를 타고 귓전을 울렸을 때, 현우는 역력한 불쾌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쳤고, 그와 달리 소매의 커프스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여몄으며 드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의자를 거칠게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에 이끌리듯 흥미진진한 얼굴로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던 붉은 머리 사내의 시선이 현우에게 돌려졌다.
“벌써 가게?”
“시간 낭비니까요.”
“왜, 한창 재미있는 부분인데 .”
“당신에겐 그런 줄 몰라도 저는 이런 악취미는 없어서 말입니다.”
사이에 칼날을 잘 저며 놓은 말을 입술 밖으로 툭하니 내뱉자 사내의 미간이 얄팍하게 찌푸려졌다. 입은 묘한 미소를 띄어내고 있다.
“악취미라니. 나도 보러온 건 처음이야.”
“그런 것치곤 너무 자연스러워서요.”
“뭐,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여흥 정도로는 생각하고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내라고 생각하며 현우는 작게 혀를 찼다. 그에 아랑곳없이 이 사내는 주절주절 제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쁘다.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고, 그 물건은 오직 이 여흥 뒤에 치러지는 경매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응당 그렇듯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상류층의 불법 밀매에 관한 잡담이었기에 한 귀로 흘려 넘기기 충분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따라 현우는 다시 한 번 혀를 찼고, 팔짱을 끼며 삐딱한 태도로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
“대체 그 물건이 뭐랍니까?”
“그냥 애완동물이야.”
“고작 그깟 애완동물 때문에 이렇게 시간낭비를 합니까?”
“그깟 이라니. 굉장히 고급이라고. 길들이는 재미도 있어 보여서 아주 기대 중이야.”
현우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애완동물이야 안 봐도 빤했다. 윤기 나는 털을 지닌 혈통 좋은 고급 애완견이거나, 양쪽 눈 색이 다른 고양이라던가, 악취미적으로 다리가 세 개인 말이나 사람의 얼굴을 지닌 물고기 따위가 고작일 것이다. 그는 구매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라며 현우의 발을 붙들고 있었다. 그거야 그럴 것이다. 경매 물품이 생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면, 풀 먹인 허례허식을 깁스처럼 두른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다니는 겉멋이 잔뜩 든 이들의 고급스러운 취미에 걸맞을 물건-이를테면 몇십 년 전까지도 생기로 넘쳤던 밀랍인형이나 귀한 진미로 불리는 불쾌할 음식 덩어리라던가, 멸종동물의 박제품들-들이 등장할 터이니 말이다. 물건들은 효과가 좋다. 보이지 않는 예의범절 따위 보다야 저들의 지위나 우월감을 높여주는 임시방편으로는 썩 그럴싸할 터였다. 참으로 걸맞았으니까. 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흥미 없어요.”
“구경하면 재미있을 텐데.”
아쉬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그는 고개를 돌려 현우와 눈을 마주쳤다. 뒤이어 눈을 곱게 젖어 웃고는 유리 벽 너머의 중앙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귀한 애완동물, 잘 사기를 바랍니다.”
“아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주도록 할게.”
다시 한 번 여자의 교성이 터진다. 아까까지 흘러나오던 흐느적거리는 비음과 달리 거진 공포에 질린 비명에 가까운 그 교성에 현우는 귀를 막은 채로 묵직한 문을 열어젖혔다. 쏟아지는 조명이 뜨거웠다.
긴 복도에는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복도 중간중간에는 제가 아까 밀치고 빠져나왔던 굵직한 문들이 수없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아까의 소란스러웠던 실내와 달리 자그마한 소음 하나조차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직 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박차는 구두 굽 소리만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현우는 문 너머의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저도 모르게 머리로 떠올려봤으나 곧 불쾌감이 엄습해왔기에 말끔하게 게워내도록 노력했다. 이맛살을 뭉갠 채로 한참을 걸었을까,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복도의 끝에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반쯤 어둠에 먹혀들어 있었는데, 그 출구보다 더 존재감을 과시하는 물체는 따로 있었다. 복도 끝, 계단 아래에 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반쯤 약에 취한 듯 보이기도 했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으나 꽤나 가지런한 인상의 남자였다. 무엇보다 얼굴선이 수려했다. 몇 개피나 피운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앞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옷에 냄새가 배겠군, 현우는 그 생각으로 에둘러 발을 옮겨 곁을 떠나려 했으나 의외의 복병이 그의 발을 붙들어 매고야 말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터트려진 담뱃재가 그만 현우의 구두 위로 툭 하니 자리 잡고 앉아버린 것이다. 미약한 불씨를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일까, 옅은 탄내가 진동했다. 현우는. 조용히 구두굽을 세워 땅을 쳤고, 담뱃재가 툭하니 떨궈져 나가는 그 찰나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동자가 전구를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여자와 같이 침에 젖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현우는 눈을 접어 가느다랗게 뜨며 그 벌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올 사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 모든 현우의 예상을 뒤엎기라도 하듯 웃음을 터트렸고, 배가 찢어져라 큰 소리로 웃으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지켜보는 현우가 더 민망해질 정도로 세차고 세찬 웃음이었다. 복도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남자는 구르며 웃는다.
한창 서류를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데 노을이 툭 하니 서류 뭉치 위로 제 몸을 떨어트렸다. 뜨끈하니 번져가는 노란 얼룩이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노른자처럼 노란빛이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스며들어와 그의 시선을 뒤흔들고 있었고, 그는 피로로 흔들리는 제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았다. 폐에 가득히 차 있던 공기를 묵직한 한숨으로 연소시키며 그는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첩첩산중으로 늘어진 서류 더미들은 좀처럼 무너질 생각은 하지도 않는지, 점점 더 거대하게 제 몸을 부풀려가고 있었다. 현우의 기억에 저 서류의 산에 양분을 부어준 기억은 결단코 없었다. 사무실 문의 경칩이 삐걱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소리의 주인은 현오였다.
“문에서 소리가 나네.”
“네.”
“수리하는 게 좋겠어. 저대로 두었다간 망가질지도 모르잖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입술을 깨물다 제 왼쪽 손목에 채워진 우둔해 보일 정도로 커다란 알맹이를 지닌 시계를 매만진다.
“오늘도 야근이니?”
“왜 물어보시죠?”
“네가 없을 때 문을 수리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냥 진행하세요.”
“많이 시끄러울 텐데……”
이틀째 사무실에만 처박힌 자신을 밖으로 나돌게끔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히 섞여 있는 그 계획을 현우는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배려에 콧방귀를 치며 현우는 펜을 집어 들었다. 펜과 맞닿은 종이가 밀려 나가며 가느다란 소리로 사각댔다.
“문은”
그의 입술이 운을 뗌과 동시에 왼쪽 팔꿈치에 눌려있던 휴대폰이 책상을 거칠게 긁어대며 드르륵 소리를 내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주은찬이다. 받을 필요도 없겠군. 그는 전화의 진동을 무시한 채로 다시 한 번 말의 운을 떼었다.
“문은”
“전화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보나 마나 쓰잘데기없는 전화일 겁니다.”
그의 얼굴에 의뭉스러움이 피어오르는 걸 막기 위해 현우는 거듭 입을 놀렸다.
“최근에 애완동물을 샀다던데, 그 건에 대한 자랑일 겁니다.”
대답을 듣던 현오의 얼굴에 급작스러운 화색이 번졌다. 보나마나 작고 귀여운 동물이리라 멋대로 추측하고선 상상하는 게 빤했기에 현우는 입을 열어 뒷말을 꾸려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 봤자 커다란 사냥개 따위의 짐승에 불과하겠지요.”
“너도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그래?”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인상을 구겼다.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 채로 글자를 한 획 그었을 때, 사무실의 전화가 다급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주은찬이었다.
“정말 한가한 모양이네요.”
중얼거림에 가까운 어투였다. 쉴 새 없이 짖어대는 그 소리에 항복하듯 그는 짧게 혀를 찼고, 이어 수화기를 들었다. 귓전에 수화기를 가져다 대기도 전부터 그 무수한 구멍을 통해 은찬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간헐적인 현기증을 느끼며 현우는 전화를 받았다.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된 이야기의 끝은 역시나 제 애완동물에 대한 자랑이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전화를 끊기 위해 현우는 틈을 노렸다. 말과 말 사이가 비어들 그 틈을 현우가 찾는 사이에 은찬은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말이 물음이지, 결국은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내 애완동물 보러 올래?”
“하……”
“보러와. 빨간 눈이 굉장히 귀여워.”
자신에 집에 들러 애완동물을 보고 가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애당초 현우의 성격대로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테지만, 삐걱거리는 경칩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현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자 하니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건 문의 수리가 아니었고, 자신을 어수선스럽게 만드는 이 세 가지 불들을 한 번에 제압할 소화기가 필요했다.
어차피 지금 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또다시 제게 거듭 전화를 걸어 방문을 권유할 것이 분명했다. 제가 나가기 전까지 현오는 제 주변을 돌고 눈치를 살피며 문의 수리를 들먹여가며 저를 사무실에서 내쫓기 위해 수없이 도전해올 터였다. 현우는 계산이 빠른 편이었기에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무실을 나가자. 이편이 오히려 수월했다. 일거양득의 효과도 있지 않은가? 그는 조용히 차키를 집어 들었다.
시동을 걸기까지 그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바람 맞추고 이대로 바람 맞추고 차를 몰고 교외로 드라이브나 나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러나 무질서하고 충동적인 계획은 그 스스로 성향에 맞지 않았기에 그는 금세 잡념을 떨쳐버리곤 차를 몰아 은찬의 집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도로는 한산해 예정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시킨 그는 제법 유쾌한 걸음걸이로 문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정문으로부터 100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세워진 건물이 은찬의 집이었다. 회색의 외벽으로 이루어진 그 검은 지붕의 집은 은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는 편이었다. 가벼워보일 정도로 활기차고 경박스런 그의 외모나 성격 전면을 부정하는 듯한 저 묵직하고 세련된 건물은 마치 당나귀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말하자면 어색하고 황당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무렴 뭐 제집도 아닌데, 그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어느샌가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는 제 주변을 안개처럼 둘러싼 어둠을 헤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속도로 발을 놀리며 정원의 잔디들을 짓밟고 뭉개트렸고, 보기 좋게 손질되어있던 단정한 녹색 잎들은 그의 발아래서 무참하게 비틀어졌다. 초인종을 누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밝은 낯빛으로 은찬이 문을 열었다.
“어서 와.”
활기찬 음색이었다. 바람이 다소 쌀쌀맞았던 문밖과 달리 안은 공기가 다정하고 포근한 감촉으로 그를 안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주만이지?”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곤 그를 따라 서서히 거실로 향했다. 짧은 일자로 이어진 현관을 지나면 환하게 트인 거실이 나온다.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 건물 뒤편에 가꾸어놓은 정원을 감상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말하자면 풍경을 위해 만들어진 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둑한 시간에 맞추어 전등을 켜놓은 거실은 환했다. 발광체 주변을 황색지로 덮어 씌어놓은 양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거실은 따스한 공기와 맞물려 안락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와 달리 가구가 눈에 띄게 줄은 탓에 황량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거실 모서리에 걸쳐진 검은 소파세트 하나, 그 앞에 놓인 커다란 티비 하나, 그 아래에 장식장 하나, 그 옆으로 부드러워 보이는 카펫이 바닥에 깔려있었고, 시선을 좀 더 이어가다 보면 닿는 반대편 벽 쪽에 다닥다닥 박혀있는 책꽂이가 전부였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거실이었기에 공간은 마치 텅 빈 선물상자처럼 보였다.
그 소파의 한쪽 구석에 그가 앉아있었다. 지겨움이 완연한 얼굴로 그는 하품을 뱉고 있었고, 금빛 눈동자가 황색을 머금은 탓에 그 밤보단 엷고 은은하게 저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른해 보이는 그와 시선이 닿았다. 현우는 묻는다.
“저게 애완동물입니까?”
“넌 내 안목을 뭐로 보고…… 쟤는 내 친구고.”
가당키나 하냐는 표정으로 은찬이 어깨를 으쓱였다. 늘어져 있는 그를 지나쳐 은찬은 현우의 시선 사각지대에 걸쳐있던 장식장 뒤편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쓰다듬는다.
“저게 애완동물이냐. 상전이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건 초면이었기에 현우는 은찬에게서 그로 눈동자를 우회시켰다. 검은 눈동자와 금색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그는,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한쪽 입꼬리만을 끌어올린 채로 밉상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람아, 숨어있지만 말고 좀 나와 봐~ 응?”
“아까부터 그 말만 수백 번째지.”
“너희 때문에 겁먹어서 그래.”
“너 때문이겠지.”
거실 한 편에 손님인 현우를 세워둔 채로 은찬은 제 애완동물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절절매는 그 뒤통수를 그는 비웃는다. 핑퐁.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공을 주고받듯 말을 던져내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현우는 천천히 소파 언저리에 걸터앉았다. 소파에 앉은 그는 다시 한 번 나른한 하품을 내뱉고, 무신경하게 턱을 긁는다. 언뜻 시선을 돌리다 현우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가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해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쩔쩔매고 있는 은찬을 향해 핀잔과 비웃음을 하나둘 적선하는 게 전부였다.
“옳지, 착하지?”
녹진한 꿀이 타고 흐르다 못해 잔뜩 절여진 목소리였다. 다정한 낯으로 한껏 치장한 가면을 쓴 그의 손에 이끌리듯 장식장 뒤에 숨어있던 생물체가 서서히 제 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소파 위에 앉아있던 그가 제 눈동자를 호기로 달궈낸다.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창밖의 짙은 어둠은 쉴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기며 이들 틈으로 파고들기를 청했지만, 방은 너무도 밝았다. 그 밝은 불 아래서 은찬은 제 품의 애완동물을 한껏 뽐내듯 내보였다. 팔과 다리, 엉성한 몸선을 따라 시퍼런 멍울들이 이곳저곳에 맺혀있었다. 그 생명체를 보던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고, 턱을 긁었지만, 별다른 말은 던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아 보였던 그를 대신하듯 현우가 먼저 소리를 내었다.
“여자예요, 남자예요.”
보면 모르겠냐는 듯, 자랑스러움으로 옴폭 패여진 입우물과 선명한 보조개를 단 채로 그는 제 애완동물의 손을 움켜쥔다. 소리 없는 비명이 얼굴 위로 선명히 울려 퍼진다.
“수컷이야.”
남자는 혀를 찼다. 현우는 보기보다 침착했다. 애완동물을 산다기에 짐승 따위로 한정 지었던 제가 멍청했다, 아니 그보다도 엄청난 애완동물을 산 저 남자가 새삼스레 경이롭기까지 했다.
“남자한테 그 짓을 하다니 최악이네요. 남자랑 그런 짓 할 생각이 듭니까?”
보나 마나 이용목적이야 빤했다. 기겁할만한 그 질문에 그는 낯 한 번 달리하는 법도 없이 평범하게 대답했다. 마치 밥 먹었어? 하는 질문에 응, 나 밥 먹었어. 라고 말하듯 자연스럽게.
“뭐, 나쁘진 않아. 뒤로하나 앞으로 하나… 기껏해야 구멍 차이인데.”
“차라리 암컷을 사시죠.”
“여자랑 하고 싶으면 창녀를 샀겠지.”
너무도 뻔뻔한 낯짝으로 그는 평온스럽게, 지극히 평온스럽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윤리의식에서 도태된 주제에 평화로운 성자 같은 낯짝을 덮어쓰고 있었다.
“창녀랑 다를 바가 뭡니까.”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은찬은 새삼스레 무거운 목소리를 내었다.
“말했잖아. 애완동물이라고.”
세 사람과 하나의 애완동물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에 짧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둔탁한 음이 공기를 어지럽게 만들었고, 모두의 시선을 이끌었다. 어느샌가 은찬의 품에서 애완동물은 사라진 지 오래로, 그는 붉게 달아오른 제 왼손을 쥔 채로 이마에 주름을 그려 넣고 있었다. 손등엔 커다란 바늘을 놀린 양 생생한 잇자국들이 띄엄띄엄 박혀있었다. 처량하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희가 와서 얘가 많이 예민해진 거 같아.”
“얼씨구.”
“다음에 다시 초대할 테니까 오늘은 그만 좀 가주라.”
“아주 불렀다 꺼져라 지 멋대로네, 주은찬.”
“미안, 빽건. 내가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게. 오늘은 애를 달래주는 게 먼저일 거 같아.”
손사래를 치며 그는 몸을 돌려 복도로 향했다.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지만, 배웅은 가당치도 않았을 거였기에 현우 역시 미련없이 복도를 따라 걷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투박한 발소리가 현우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간다.
뒤축이 구겨진 운동화를 다시 한 번 발바닥으로 짓뭉개며 그는 발을 우겨넣고, 현우는 그와 반대로 구둣발을 이용해 세심한 동작으로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단연 신발을 신는 건 그가 더 빨랐고, 현관문의 손잡이를 쥐어 잡은 것 역시 그가 먼저였다. 우두커니 그 뒤에 서서 그가 문을 박차고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그가 아. 하는 작은 탄성을 뱉으며 저를 돌아봤다.
“맞아. 우리 구면이지?”엉겹결에 악수를 청했고, 그는 받아주었다. 이어진 손과 팔이 줄넘기 줄처럼 공중에서 두어 번 흔들리다 풀어졌다. 정문으로 향하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지는 침묵이 현우의 가슴을 누르는 탓에 그는 답답했다. 이유 없이 답답하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으며, 불쾌감이 엄습해왔다. 그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헤쳤다.
“저게 네 차야?”
그가 한쪽 어깨만 으쓱하며 물었다. 어느샌가 다시 나른하고 졸려 보이는 멍청한 눈으로 돌아가 있다. 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콧등을 찡그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잔기침을 토했다.
“가는 길이면 나 좀 태워.”
친구 아니랄까 봐, 명령조가 똑같았다. 싫다고 단박에 거절할까 싶었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심란했고, 그 탓에 유연해진 심지가 그를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는 제멋대로 조수석에 올라타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몇 번이고 주의를 시켜야만 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태우지 않았던 터라 어디쯤 떨구면 좋을지를 갈등하고 있는 현우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한산한 도로 중간에서 그가 돌연 말했다.
“여기서 멈춰.”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그는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그대로 몸을 돌려 차가 여태껏 나아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나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창을 두드려왔다. 현우는 창을 반쯤 내렸다.
“너 이름이 뭐냐.”
반사적으로 이름을 대답하려던 그의 입술이 닫혔다. 잔뜩 뜸을 들이는 밥솥처럼 침묵하던 그는 제 안에 들어찬 압력을 내보내듯 묵직한 숨을 뱉어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채근하듯 다시금 물어왔다.
“이름이 뭐냐고.”
“그쪽은요.”
“나? 백건. 너는 뭔데.”
현우. 숨을 탄 묵직한 울림을 듣고서 그는 미련없이 제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현우 역시 곧장 차를 몰아 도로를 달렸다. 바퀴가 매끄럽게 도로 위를 내달렸다. 회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현우는 백건의 이름을 한 번 곱씹다, 이어 제 책상 위 서류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생각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 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