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은찬가람/찬가람] Just one night

엘리스.aliceeli 2015. 10. 27. 11:02

[찬가람] just one night

* au 설정 주의

* 대딩으로 찬가람~

* 시럽님(@d_c_starsyrup)과 함께한 연성교환, 감사해요 S2


 

[찬가람] just one night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얇았던 그 숨 한줄기는 소란스러운 공기에 짓밟힌 채로 어둑어둑한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잘긴 숨을 내뱉어보았다. 이번에도 숨소리는 맥없이 꺼져버렸다. 가람은 고개를 숙여 테이블에 이마를 박는다. 가냘픈 숨소리를 따라 볼이 부풀었고, 목울대가 꿀렁였고,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짙은 알콜향이 코로 들어오는 통에 술을 깨기 위해 연거푸 숨을 내쉬면 내쉴수록 거나하게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태생이 내성적이라던가 소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가람의 미간은 늘상 찌푸려져 있었고, 그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그의 미간이 한 번 주름을 그어낼 때마다 잠재적인 불안감이 모두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곤 하였다. 시종일관 뚱한 얼굴과 무표정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무적인 어투로 대하다 보니 친구 따위 생길 리가 만무했다. 원만한 인간관계도 설계하지 못했다.

가람은 혼자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변함없이.

모임을 만들고 무리를 짓는 속성도 없었고, 앞으로 나서 만남을 주도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 모임들에 요령을 피워가며 빠져나오는 게 가람의 속성이었다. 한번이 어려웠지, 두세 번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봄과 가을마다 벌어지는 개강모임에는 얼굴도 잘 모르는 새내기들-혹은 군대에서 갓 제대한 복학생-이 즐비했기에 저를 노리는 포획꾼들은 없었다. 종강총회에는 으레 거드름을 피우며 빠져나가는 고학생들이 많았기에 그 역시도 손쉽게 가람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운동회나 학교축제 따위는 안가면 그만 가도 그만, 가람은 자유롭게 그룹 안팎을 넘나들며, 아니, 도리어 그곳에 속하지 않은 채 고고한 한 마리 늑대처럼 홀로 집합 주위만을 어슬렁거리는 채로 평화로운 생활에 안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는 걸까, 테이블에 줄곧 박아둔 탓에 배로 지끈해진 머리를 감싸 쥐며 가람은 고개를 들었다. 얇은 송곳이나 가는 바늘 따위로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가 싶던 작은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도가 거세져 마치 머릿속에 거대한 폭탄들이 군데군데 잠복해있다가 터진 양 지끈거리며 아파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뼈마디가 군데군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온 몸이 부서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영영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차라리 이 정도로 아플 거라면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그 쯔음, 이 모든 두통의 근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투명한 초록색 병, 그리고 그 병들을 따라 시선을 줄 긋자 보기에도 떠들썩해 보이는 중앙 테이블에 앉은 빨간 뒤통수가 보였다.

지금 그 뒤통수는 제 옆에 앉은 여자애의 어깨를 제 팔로 감싸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기울여 비워내고, 투명한 액체는 다시 비워진 그 술잔 속으로 들어간다. 가람 역시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처음은 입안 가득한 쓴맛, 뒷맛은 후끈거림이었다. 차가운 그 액체는 혀에 닿자마자 불처럼 변해 가람의 목을 뜨겁게 달구며 흘러내려 갔다. 가람은 가볍게 몸을 떨었고, 기침을 토했다. 양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가람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였기에,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들은 많았다. 휴양지에 흘러들어온 물정 모르는 관광객을 향한 호객행위처럼 그들은 앞다투어 가람의 곁을 꿰차고 앉아, 호기심으로 두 눈을 총총히 빛내며 그의 손에 투명한 잔을 쥐여주었고, 그 맑고 쓴 액체를 먹였다. 첫 잔이 두 잔이 되고, 마지막 잔은 계속해서 진짜의 진짜의 진짜라는 이름이 거듭 덧붙여지는 통에 그는 마지막 잔을 몇 번이나 들이켰는지 셀 수가 없었다. 쉴 틈도 주어지지 않은 그는 연신 잔을 들이켜야만 했다. 가람의 뺨은 물론 온몸이 새빨갛게 변해버리고 있었다.

술을 부어주어도 가람에게 흥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기에 시종일관 뻣뻣한 낯으로 응하는 그를 바라보며 시시하다는 양 혀를 차며 그들은 저들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홀로 버려진 가람은 눈을 껌뻑이다, 제 앞에 늘어선 술병들을 가지런히 세우고, 개수를 세워보다가 오전부터 시작된 경미한 두통이 다시금 거세게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인지했다. 고통을 덮어보기 위해 눈을 끔뻑였고, 빨간 눈동자를 감추는 얄팍한 눈두덩이 움직일 때마다 뇌 전체가 씰룩이며 들썩대고 있었다. 너무, 아팠다.

 

 

주름진 이마를 살살 밀어내가며 그는 두통의 근원지를 찾듯이 제 얼굴 이편저편을 쉼 없이 더듬고 있었다. 폐부 깊은 곳까지 차올랐던 공기를 배로 눌러 뱉으면서, 다시 그 쪼그라들던 폐부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차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는 묵직한 숨을 토하고 들이마시길 반복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다시 한 번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괜찮아?”

낯선 음성이 고막을 두드리는 동시에 등 한가운데가 돌연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이 이상 오를 온도는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등은 따뜻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손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그는 가람의 작은 등을, 어깨를, 목덜미를, 부드러운 머리칼을 품으며 돌보고 있었다. 가람은 고개는 들지 않은 채로 뺨을 돌려본다. 테이블이 시원했다.

미안해, 애들이 놓아주질 않아서.”

가람은 눈을 깜빡이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삼켰다. 소주의 쓴 내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탓에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많이 마셨어?”

말을 뱉는 순간, 숨과 함께 풍길 냄새가 두려워 가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마냥 웃는다.

설마 이걸 혼자 다 마신 건 아니지?”

눈꺼풀을 끔뻑이는 걸로 가람은 대답을 대신해 보인다. 진한 암색의 눈동자를 굴리며 그는 테이블 이곳저곳에 늘려진 병의 수를 헤아려본다. 어림짐작해보아도 열댓 병은 되어 보이는데, 작게 혀를 차며 손바닥으로 가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가람은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너 생각했던 것보다 술이 세구나?”

축 늘어져 있던 어깨가 잠시 공중으로 솟아났다가 맥없이 바닥으로 꺼졌다.

아니라는 거야?”

허물어지나 싶던 입술 사이로 조그만 틈이 생기고, 번들거리는 연한 속살이 비춰졌다. 그는 틈 사이로 새어 나올 언어를 기다렸지만, 말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저의 눈동자를 갖다 대어본다. 말은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야 당연하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가람은 다시 입술을 깨문다. 얼굴과 얼굴이 너무도 가까웠다. 서로의 코끝과 끝이 스치는 거리에서 마주한 채로 차가운 테이블에 뺨을 붙이고, 그들은 서로를 눈동자에 품고 있었다. 빨간 눈동자가 깜빡이는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그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는데, 가람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미간에 작은 흠을 패어내었다. 입술이 작게 열렸다. 오므라진다.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 입술을 건드려본다. 날렵하게 휘어지는 입술 산을, 벌어진 틈과 꺾어지는 턱과 그곳에 박혀있는 점을 손톱으로 찍어보았다.

그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 그의 입술이 요동친다. 거리가 점점 좁혀져, 이윽고 코와 코가 스치며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처음은 소주의 쓴 내, , 화한 입김, , 미약한 단내, , 그의 향기가 난다.

나갈까? 가람은 천천히 눈꺼풀을 내려 눈동자를 감추고, 그는 손을 들어 보드랍게 작은 뺨을 감싸 쥐었고, 코끝이 스친 두 사람의 입술이 스쳤다. 두 개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가람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었다. 입맞춤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어졌다. 미약한 단내와 알콜향에 취한 채로 가람은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혀가 옭아매어 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로 가람은 색색거리는 얕은 숨을 뱉어내며 그의 혀를 받아내었다.

몇 번의 혀와 얼만큼의 침이, 숨들이 오갔을까. 술자리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을 때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혀가 풀리는 동시에 긴장으로 바싹 세워졌던 무릎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며 가람은 입술을 핥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가람을 보며, 아쉬운 양 입맛을 다시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장난기가 듬뿍 배어들은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조용히, 나랑 같이 갈래? 그 유혹에 가람은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오빠, 벌써 가요?”

, 조금 취한 거 같아서 데려다주려고.”

아쉽다.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가람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를 향해 몇 명의 그녀들이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마치 게임 퀘스트를 통과하듯, 한 테이블에 한 테이블을 거칠 때마다 그에겐 한 명, 혹은 서너 명의 그녀들이 달라붙었고, 그는 웃는 얼굴로 다음에를 덧붙이며 떨쳐내고 있었다. 가람은 그를 따라 휘청거리기도 하고, 다시 힘주어 발자국을 세차게 바닥에 찍으며 걸음을 움직여내고 있었다. 가벼웠던 통증은 이미 사라진 져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지만,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하고 쓰렸다.

집에 갈래.”

성큼성큼 쉴 틈도 주지 않은 채로 계단을 올라가던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가람은 말했다. 계단 맨 꼭대기에 선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새빨갛게 빛을 내었다.

금방이야. 우리 집 여기서 안 멀어.”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가람은 입술을 깨물며 더듬더듬 말했다.

싫어.”

집에 가고 싶다면서.”

느릿한 몸놀림으로 그가 계단을 내려 저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칸 한칸, 저를 향해 내려오는 걸음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

힘들어서 그래? 얼마 안 걸려.”

그가 가람의 손목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손은 미끄러져 손등을 더듬고, 꽉 다물려있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얽매여왔다. 마디마디 힘주어 잡은 통에 에일 듯이 뜨거워 가람은 입술을 깨물었고, 그는 가람의 손을 이끌어 세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도통 떨어지지 않는 발을 힘주어 한 칸 오르고, 숨을 내쉬며 멈추고, 다시 한 칸을 오르며, 수없이 그 짓을 반복하며 계단을 올라야만 했기에 두 사람이 겨우 지하 1층밖에 되지 않는 술집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망설임을 거듭하며 그 자리에 뿌리박힌 양 움직이지 않는 가람을 채근하는 일도 없이 그는 묵묵히 손을 엮은 채로 기다려주고, 걸음을 옮겨주었다. 가람은.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한번 토했다. 전봇대를 붙잡고 가로등불의 쓰다듬을 받으며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배가 세차게 꿀렁였고, 목이 뜨겁게 쓰려 왔고, 입안은 엉망진창의 맛이 났다. 그 최악의 모습에 뒷걸음질 치는 일도 없이 그는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다. 부드럽게 등을 두드려온다.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가람은 제 안의 모든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괜찮아?”

다정한 감촉의 그 언어가 가람의 귀를 휘감았다. 돌연 바람이 들이닥쳐, 그의 향이 가람의 안으로 들어왔다. 폐부에 들어찬다. 하나하나, 미세한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듯 그의 향이 짙게 풍겨왔다.

 

 

 

오전에도 그랬지. 책상에 엎드려 두통으로 신음하는 저를 보며 홀연 그가 물어왔었다. 괜찮아? 소리 없이 신음하는 저를 들여다보며, 제 앞에 무릎을 쭈그리고 앉으며 눈썹을 팔자로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청가람. 그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고, 미간을 작게 찌푸려보았고, 숨을 쉬는 저를 보며 그는 근심 어린 미소를 한번 짓곤 사라져버렸다. 가람은 다시 고개를 책상에 파묻는다.

이거라도 마셔.”

손끝에 이질적이고 딱딱한 금속이 닿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드는 가람을 보며 그가 웃었다. 뺨이 크게 한번 부풀었고, 꺼져 내렸다.

두통에 오렌지 주스가 좋대.”

하얗게 웃는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연한 살굿빛을 띄고 있었다.

오후에 올 거지?”

혹여라도 가람이 인지하지 못했나 싶어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인다. 총회. 말없이 제 손에 들린 차가운 캔만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보며 그는 또 말을 기운다.

같이 가자, 분명 재미있을 거야.”

손안에 출렁이는 오렌지 주스를 느끼며 가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저를 부르는 음성에 이끌리듯 곁을 떠나갔다. 잠깐의 온기가 머무르다 떠난 그 빈자리를 느끼며 가람은 다시 고개를 책상에 파묻었고, 주춤거리며 수업의 끝에 그의 곁을 찾아갔다. 갈게.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그는 또 뺨을 부풀렸고, 새하얗게 웃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그의 품에 내몰렸다. 그가 자신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숨결을 따라 가람의 등줄기에 오한이 솟았다. 가람의 허리를 더듬거리던 손이 부드럽게 티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주춤거리며 가람은 그의 손을 붙들며 작게 고개를 저어내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물음이 아닌,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단정의 말이었다. 그 뚝뚝 떨어지는 음만큼이나 거침없이 매서운 속도로 그는 가람의 몸을 껴안아왔다. 거듭되는 입맞춤 속에서 가람은 끙끙거리듯 자그맣게 신음을 뱉었고, 그 위로는 그의 작은 한숨이, 가람의 신음이, 한데 뒤엉켜 두 사람을 뒤덮고 있었다. 그 밤은 참으로 길었다.

 

 

달든 열이 식어가기도 전에 그의 몸이 가람을 품어내었다. 웅크린 채로 가람은 그의 품에 안겨서 작게 떨었다. 추워? 그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가람은 작게 기침을 토해냈다. 아니, 메말라 갈라진 탓에 뚝뚝 끊어지는 그 목소리에 그는 웃음을 뱉어낸다. 그의 뺨이 다정하게 물들어 있었기에, 따뜻한 그 색을 가람은 손끝으로 더듬어보았다. 그 손놀림을 따라, 은찬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가고 있었다.

 


*


 

청가람은 독보적이었다. 그가 원했듯 원치 않았든 교내-라고 말하면 거창해 보이겠지만, 주은찬이 알고 있는 한 학교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선-의 모두가 주목할 정도로 그의 존재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울타리 안의 온순한 양처럼 체계에 순응하는 이들과 다르게 그는 한 마리 방생된 늑대와도 같이 밖으로 뛰쳐나와 교내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단정한 미간을 제 손으로 짓뭉개며,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빠른 속도로 발을 놀리면서.

모두가 삼삼오오 무리 지어 떠들며 웃는 자리에서 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술집 안의 빼곡하게 들어찬 테이블과 형형색색 머리 틈에서도 가람의 머리는 물론 그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찾을 수는 없었다.

그와 반해 은찬이라면, 다른 의미로 교내의 유명인사였다. 총회, 개강회식, 종강회식 그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고 제 빨간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은찬은 그랬다. 테이블 여기저기에 제가 머물렀던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듯 제 소주잔을 여기저기에 떨어트려 놓고 다닌 통에 이 테이블에도 저 테이블에도 언제나 은찬의 잔이 머물러있었고 사람들은 언제나 은찬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로 은찬은 이곳저곳에 버릇처럼 제 소주잔을 퍼트려두었고, 그를 거두기라도 할 요량으로 테이블을 넘나드는 새로 까맣게 가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사이로 작은 틈이 엿보였고, 그 틈으로 은찬은 가람의 머리를 발견했다. 지쳐 잠이라도 들어버린 것일까, 테이블 위에 엎드린 그의 등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저를 보호해줄 단단한 담처럼 소주병들을 주변에 늘어놓은 채로.

그 자리에 누구보다도 은찬은 그 담을 허물어트리고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에게로 다가섰다. 금세 질려서 나가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그는 연신 숨을 토해내기 바빴고, 은찬은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으레 모든 술자리에서 그래 왔듯, 은찬은 말을 토했고, 그의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었다. 색색거리는 숨을 따라 등이 움찔거렸고, 손에 닿은 목덜미는 연한 감촉을 남겨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움켜쥐었다 펴내며 정돈시켜본다. 문득 고개가 돌아갔다. 촉촉해진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만큼이나 빨개진 뺨이 묘하게 요염했다.

"많이 마셨어?"

대답은 없었다. 눈대중으로 소주병들을 헤아려본다. 족히 열병은 넘어 보인다.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은찬은 연신 가람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제 수많은 물음에 대답인 양 눈만 깜빡거리는 그 얼굴을 한층 더 가까이서 엿보기 위해 그는 똑같이 제 뺨을 테이블에 붙였다. 테이블은 너무도 차가웠다. 가람의 숨은 뜨거웠다.

입술을 헤집고 비져나온 숨들이 은찬의 얼굴 위로 뿌려진다. 달궈진 따뜻한 숨을 얼굴 만연으로 들이마시며 은찬 역시 가람을 따라 눈을 깜빡여본다. 살짝 벌려진 입술의 연한 속살, 침에 젖어 반짝이는 입술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은찬은 거리를 좁혔다. 가람의 콧등이 은찬의 이마에 맞닿을 듯 가까웠다.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어."

고개를 올리자, 가람의 붉은 눈이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마치 아래에 있는 저를 내려다보듯 던져진 시선을 따라 옴폭 패인 두 개의 눈이 반짝였고, 그 위로 눈꺼풀이, 속눈썹이 가냘프게 떨렸다. 좀 더 고개를 올려 눈을 마주한 채로 응시해본다. 평소라면 시선도 맞추지 못했을 텐데, 기이했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문뜩 은찬은 웃음이 터졌고, 가람의 미간이 작게 패였고, 은찬이 숨을 토하는 동시에 가람의 손끝이 은찬의 입술에 닿았다. 마치 맹인이 점자를 더듬어 언어를 읽듯, 은찬의 입술을 더듬어 말을 가늠하듯이.

가람의 단단한 손톱이 연한 입술을 더듬는다. 흠집이라도 낼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입술을 더듬던 것과 달리 단단하게 점을 손톱으로 찍어낸다. 가람의 입술이 작은 곡선 모양으로 휘어졌다.

 

 

 

 

처음 발견한 건 도서관 구석, 인적이 드물다 못해 시험 기간에도 한산할 따름인 서양 서적 서고 끄트머리였다. 그 한쪽 구석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가람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뒤죽박죽 쌓아올린 책을 히터 근처 여기저기에 늘어트려 놓고선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이따금 책으로 고개를 박다가도 멀찌감치 제게서 밀어놓으면서. 연한 뺨이 따땃한 햇볕에 잘 달궈져 먹음직스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돌리는 새로 햇볕이, 머리칼을 쓰다듬고 눈동자를 어루만진 탓에 말갛게 빛을 내었다. 투영한 눈동자를 지켜보면서 은찬은 제 목적도 잃은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고개를 든 가람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곧게 제게 뻗어옴을 느낀 그 순간, 그는 몸을 숨겨 책장 뒤로 숨고야 말았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불규칙적으로 빗발치던 숨이 고르게 가라앉았을 때, 그는 고개를 내밀어 다시 한 번 가람을 찾아보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람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이제는 은찬이 서 있다. 등으로 볕을 받으며 가람이 놓고 간 책들을 들어 살펴보기 시작한다. 마치 제 영역을 표시하듯 어질러진 책들을 찬찬히 눈으로 쓸어보던 그는, 혹여라도 다시 들릴 그를 위해 가지런히 정돈한 후에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한차례의 우연한 만남 후에 은찬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 출석도장을 찍었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설레임 반, 막상 마주하게 되면 뭐라 말을 붙이면 좋을지에 관한 두려움 반으로 물든 가슴을 안은 채로 가람의 장소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가람은 없었다. 설렘으로 물들었던 가슴은 도서관 문을 빠져나올 때쯤이면 언제나 실망으로 변절해 은찬을 배반하곤 했다.

기다림에도 이골이 났을 때쯤, 은찬은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이글거리던 한낮의 태양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평소처럼 학생증을 찍고 입구를 빠져나가려 할 때, 문이 열렸다. 은찬은 아직 카드를 찍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영문을 확인하려던 순간, 가람의 빨간 눈동자와 흐트러진 앞머리, 그 탓에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가 보였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안녕, 이라고 말을 뱉었고 가람은 아주 약간의 틈, 정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청가람이 교내 이곳저곳을 혼자 누비는 유명인사였다면, 은찬은 유목민처럼 이 무리 저 무리 떠돌아다니며 제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냈기에 다른 의미로 유명인사였다. 어느 퍼즐에나 맞춰지는 조각처럼, 밑바탕이 되는 걸작마냥 은찬은 무리 속에 큰 부담 없이 녹아내렸기에, 약 일주일간의 부재에도 그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은 많았다.

"오빠,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

", 나비 안녕~"

"오빠 이번 회식에도 빠졌다면서요? 다들 해가 서쪽에서 뜬 줄 알았어요."

"~ 조금 할 일이 있었어."

"과제라도 했냐?"

"그렇지, ."

과실 안에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던 이들은 은찬을 둘러싸고 그간의 부재에 대해 물어왔고 그는 무성의할법한 대답을 친절한 태도와 상냥한 어투로 설명했다. 은찬은 어느샌가 또 무리에 이질감 없이 융해되고 있었다.

몇 마디의 대화 후, 화제의 중심이 은찬에게서 다른 것으로 옮겨졌기에, 그는 대답할 부담을 버리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는 듬성듬성 솟아난 나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크기와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 나무에서 한 나무로, 무성한 푸른 잎을 자랑하는 과목들을 바라보던 은찬의 고개가 불연 듯 아래로 숙여졌다. 초록잎 사이로 옅은 갈색의 머리칼 하나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붙고 있었다. 가람이었다. 은찬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갑작스레 떠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청소를 막 마친 모양인지 얼룩덜룩하게 젖은 계단은 미끄러웠고, 성급히 발을 놀리던 그의 몸이 두어 번 휘청거리긴 했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뛰어 내려와 놓치지 않았으리라 여겼는데 건물 뒤편 어디에도 가람은 없었다. 허탈한 심경으로 나무 주변을 서성거리다 그는 머리칼을 탁탁 털어내었다.

마주친다 해도 별달리 건넬 말도 없었으니 되려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간의 태도로 비춰봐 대화가 이어질 리도 없을 테고, 제가 이토록 그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무슨 영문일까, 은찬은 스스로도 의아스러웠다.

호기심인가? 아니면, 그와 대화를 나누어봤다는 우월감을 제 안에 새겨넣고 싶은 것인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그런 거로 자신감이나 우월성을 가리기엔 저는 너무도 컸다. 어린애도 아니고, 대화 한 번 나눈 게 자랑거리도 아닌데.

어느 무리에나 유달리 존재감이 강한 인물 하나둘 정도는 있기 마련이었고, 그와 어울렸다는 사실을 훈장마냥 목에 걸고 다니기엔 은찬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가 이토록 그를 향해 열을 올리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동정심? 연민? 그 외 기타 등등? 동정이나 연민은 아니었다. 무리 밖을 벗어나 서성거리는 이방인을 향해 던지기에 그 감정은 일단 부주류에 속했다는 그들의 열등감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편이 옳다고 은찬은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은찬에게 있어 가람은, 가람이란 인물은 밀려났다기보단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했겠지만, 제가 원해 겉도는 인물이었기에 동정이나 연민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심? 만일 가람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방향성을 잡기는 했지만, 은찬은 머리를 저었다. 청가람, 그러니까 청가람은.

건물의 모서리에 걸려있었다. 햇볕을 가리는 차양처럼 드리워진 나무의 그늘 밑에서 청가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담배 한 까치를 입에 문 채로, 가까이에 있는 제 운동화 앞코를 향해 마치 멀찌감치 떨어진 아득한 산꼭대기를 바라보듯 시선을 던지며 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은찬은 조심히 뜸을 들여가며 발을 더디게 옮겼다. 골목의 길고양이를 향해 주춤거리며 다가가는 호기 어린 소년처럼 약간의 까치발을 들며, 기척을 감추려 애를 쓴다.

"안녕."

가람의 고개가 황급히 들렸다. 동요로 흔들렸던 머리칼과 달리 새빨간 눈동자는 단단했고,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을 은찬에게 꽂았다. 손가락 두 마디도 넘게 남아있던 담배를 발로 비비며 가람은 또 그렇게 자리를 비워낸다. 은찬은, 뒷머리를 긁었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투명한 용액들을 스포이트로 짚어 서로를 섞는 실험으로, 투명한 액체들은 한데 뒤엉키며 노랗고 파랗고, 종종 검게 변하곤 했다. 겉으론 다 투명해 보이는 액체지만, 각자 고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융해되는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하죠. 화학적 충돌이라고 합니다.

은찬은 지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건물 뒤편에서 가람을 마주했던 그 날처럼 턱을 괸 채로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어깨를 세운 채로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다. 점심시간을 앞둔 터라 그런지 강의실은 잠잠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기마저 고요했다.

창밖으로 엇비슷한 모양새의 머리통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지나가는 풍경을 엿본다. 낙엽색의 머리카락들이 반짝이고 때때로 찰랑거리며 나부꼈다. 그 옅은 갈색 어디에도 가람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교실의 문이 열린다. 두터운 쇠문은 열리기를 주저하는 듯 몇 번에 걸쳐 달싹이다 육중한 제 몸으로 바닥을 긁으며 아픈 소리를 끌어내었다.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가람의 머리카락이 엿보인 착각이 일었다. 은찬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문을 나서는 그의 발보다도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가람의 발이 더 빨랐다. 가람은.

빨간 눈을 지니고 있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매사 흐트러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만큼이나 구겨진 미간을 만들고 있어, 고운 선은 언제나 뭉뚱그려진다. 오늘은 평소보다 경도가 더 심했다.

오른손으로 적당히 머리칼을 정돈할 요량으로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가람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지금 사선으로 앉아있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테이블에 뺨을 붙이는 가람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상하듯, 은찬은 느긋한 태도로 응시한다. 가람의 어깨가 살짝 들렸고, 고용한 공기를 자그마한 숨소리가 튿어 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입술을 곱씹으며 망설이기를 거듭하고 거듭하던 은찬은 천천히 가람을 향해 발을 놀렸다. 머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가람.”

마치 제 이름이 아닌 양 미동조차 없다. 또 한 번 작은 숨소리가 고요를 틑는다.

괜찮아?”

동정을 가장해 손을 내밀어 가람의 등을 쓸어보았다. 더듬거리듯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자, 스르르 그의 고개가 돌려졌다. 은찬은 시선을 느끼며 가람의 등을 다시 한 번 다독였다. 안색이 파리했다. 고통을 참는 모양인지 꽉 물은 탓에 입술은 단단히 여문 꽃봉오리처럼 주름져 있었고, 미간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청가람.”

땀방울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부풀어 올랐고, 이내 찌푸려진 미간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창백한 안색과 달리 뺨 중앙이 열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 한 번 머리카락을 거둬주는 척, 은찬은 무심함으로 포장한 손가락으로 가람의 이마를 가벼이 매만졌다. 손끝으로 열이 옮겨붙고 있었다.

머리 아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귀찮음에 역력한 눈길로 가람은 제게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은찬은 어수룩한 미소를 덧씌운 채로 강의실을 빠져나온다. 약이 제 가방에 있던가, 아쉽게도 은찬은 두통이라던가 머리 싸매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기에 그런 물건은 애시당초 소유해본 적이 없었다. 물이라도 사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 자판기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에 나비를 만날 수 있었다.

혹시 두통약 가진 거 있어?”

두통약이요? , 잠시만요.”

반가움을 표하는 그녀가 저를 향해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은찬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아주 약간의 뜸 뒤에 약을 건네주었다. 약에 대해 묻고 싶어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총명하게 반짝였지만, 은찬은 고맙다는 말만을 남긴 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자판기 앞에 서서 한참을 고심했다. 빈속은 아닐까, 그렇다면 무언가 요기가 될만한 것이라고 사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고심하던 차에 오렌지 주스를 골랐다. 그건, 그러니까

두통에 오렌지 쥬스가 좋대.”

손바닥에 쥐여주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일으킨다. 빨간 눈동자가 나부끼듯 흔들렸다. 은찬은 웃는다. 주머니에 넣어놓은 한쪽 손으론 두통약을 만지작거리며. 가람의 미간이 묘하게 풀려있었다. 매끈해진 이마와 그 아래로 연한 살구처럼 물들은 뺨을 보며 은찬은 능청맞게 물었다.

오후에 올 거지?”

여전히 약은 제 주머니 안에 있다.

같이 가자, 분명 재미있을 거야.”

손안에 들린 캔 이곳저곳을 더듬듯 매만지는 가람의 손가락을 눈여겨보았다. 좀 더 이야기를 늘어트리고 싶었지만, 뒤에서 저를 부르는 음성에 은찬은 돌아선다. 얼핏, 뒤돌아서니 가람은 다시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손안에는 제가 들려준 오렌지 주스를 어루만지면서. 은찬은 다시 한 번 주머니에서 알약을 만지작거렸다.

건네줄 생각이 없던 건 아니다. 그저, 한 번 더. 운이 좋게 약을 발견한 척 두통에 관해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고, 약을 빌미 삼아 대화를 두어번 더 나눠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약을 건네줄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갈게.”

제 뒤에서부터 주춤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본 자리엔 가람이 있었다. 여전히 안색은 파리했지만, 비교적 상태가 나아진 듯 뺨은 차분한 색을 띠고 있었다. 여전히 손안에는 오렌지 주스가 들어있었고, 그 손가락, 빨갛게 변한 손끝을 보며 은찬은 말갛게, 웃었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다. 때때로 콜라를 부어 넣는 이들도 많았다. 과학시간 때처럼, 마찬가지로 투명한 소주는 노랗게도, 짙은 밤색으로도 변해간다. 그 기묘한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는 이도 있고, 두세 번에 걸쳐 나눠 먹는 이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로 엉거주춤하게 입만 대었다가 떼어내는 이들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잔에 투명하게 액체가 차올랐다. 은찬은 단숨에 털어 마시는 편이다. 속이 뜨거웠다. 그 뜨거운 머리를 인 채로 은찬은 가람의 곁으로 다가섰다.

가람의 머리맡에 늘어진 잔들을 치워냈다. 투명한 액체가 반쯤 담겨있던 소주잔이 엎어지며, 굴러가고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찬은 가람의 머리카락을 다시금 매만진다. 가람의 손톱이 다시 한 번 약하게 은찬의 입술을 긁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감정에 목이 타 은찬은 침을 삼켰고, 목울대가 거칠게 꿀렁였고, 그 탓에 성대를 타고 터져나온 숨, 그 숨으로 입술이 달싹이며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리는 입술을 가람은 여전히 긁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화학적 충돌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

섞어버린 액체들을 손쉽게 개수대에 흘려보내던 때처럼 가볍게 여겨도 되는 걸까. 가장 깔끔한 건 실수였다. 변명이든 명명이든 이름표를 붙인 채 넘어가도 될 법한 입맞춤으로 끝내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은찬은 거듭 가람의 입술을 핥고 빨아보았다. 침과 침이 섞였다. 물컹한 입술을 이로 깨물며 집요하게 탐했다. 입맞춤이 아쉬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나랑 같이 갈래?”

으레 이런 경우에는 방법이 두 가지였다. 일단 자본다, 두 번째 생각하고 자본다. 그렇지만, 청가람은.

 

 

 

짙은 신음으로 토해내며 제 밑에 누워있다. 눈꺼풀도 볼도 눈동자만큼이나 빨갛게 물든 채로 오직 살짝 벌려진 입술 안 얇은 막만이 연했다. 사이로 비치는 새빨간 혀를, 촉촉하게 젖은 그 혀를 은찬은 다시금 맛보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입술을 문지른다.

뜨거운 잇새로 마치 증기와도 같은 흰 입김이 펄펄 날리는 모습을 선하게 눈에 그러담는 이 마냥 은찬은 가람의 입술을, 그 안에서 퍼져나오는 숨을, 요동치는 혀를 눈에 담는다. 동시에 뻗어내려 가는 턱선, 그 아래 가지처럼 뻗은 목줄기 중앙으로 옴폭 튀어 오른 돌기의 꿀렁임을 손끝으로 본다. 떨리는 가람의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넣어 품으며, 침으로 적신다. 잇몸을 혀로 긋는다.

거칠게 숨을 할딱이며 움츠리는 자그마한 생물을 은찬은 다시 한 번 제 품에 안았다. 그와 닿을 때마다 손끝부터 찌릿한 통감이 손은 물론 이성까지 마비시킨 양, 뒷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계단 아래서 주춤거리던 청가람의 머리카락이 노란 네온사인에 부대껴 발갛게 빛을 내었고, 그에 따라 젖은 눈동자가 서서히 얼굴 전체로 번져가면서 빨간빛을 띄게끔 만들었다. 그 짙은 홍조를 보며 은찬은 천천히 손을 당겼고, 가람은 주춤거리며 제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오르고, 서걱이는 발소리를 내며 제 뒤를 밟아오고 있었다. 찬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지겠지 싶었던 머리는 되려 추위에 에여 감각을 점점 마비시키고 있었다.

은찬은 너무도 손쉽게 욕망에 함락당했고, 그래서 제 몸을 내어주었고, 가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입술을 핥았다. 벌려내었다. 물컹한 혀가 혀끝으로 만져졌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시작된 입맞춤은 그렇게 그 밤이 끝나도록 끝없이 이어졌다. 은찬의 혀가 가람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괜찮아."

움츠린 가람의 어깨를, 목부터 시작해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그 부드러운 능선을 매만지며 은찬은 말했다. 바닥을 향해 단정하게 곤두박질치는 그 나긋한 음성이 누구를 향한 말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서로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얽혔고, 몸이 얽혔고, 숨이 얽혔고, 열이 얽히고 있었다.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얀 볕이 은찬의 이마를 건드렸을 때, 그는 눈을 떴다. 밝은 햇빛만큼이나 깨끗한 몸덩이가 제 품에 안겨있었다. 얽혀있던 손을 풀어내 눈꺼풀을 비볐다. 취기가 사라진 말끔해진 정신으로 은찬은 아차 싶었지만, 가는 몸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그대로 품고 있었다. 문득, 떨림이 전해졌다. 그 떨림을 따라 손끝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올랐다.

"추워?"

언제부터 깨어있던 것일까, 어쩌면 저보다 오래 눈을 뜨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제 물음에 그는 작게 기침을 토했고, 퍼석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아니."

뒷걸음질 치듯 그가 몸을 제게서 빼내었다. 품 안의 온기가 사라진 팔 위로 추위가 다시 한 번 타고 오르는 통에 소름이 돋았다. 못내 허전했다. 그 사실이 우스워 은찬은 푸스스 웃음을 뱉었고, 그 웃음소리에 이끌리듯 가람이 고개를 돌렸고, 눈동자를 보여주었다. 시선이 한데 얽혔다.

입술을 벌려 작게 틈을 만들어낸 그는 은찬의 뺨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거듭, 거듭해서 손가락은 뺨을, 눈꺼풀을, 속눈썹을 매만지다 다시 한 번 미끄러지듯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려 제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은 따뜻했고, 다정하게 제 온기를 은찬에게 옮겨내고 있었다. 은찬은 온기를 받아내며 한참이나 멍하니 가람을 눈에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