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은찬가람/찬가람] 아기와 나

엘리스.aliceeli 2015. 9. 20. 20:22

[은찬가람/찬가람] 아기와 나

*au 설정 주의

*미혼부 주은찬에 유치원선생님 가람이가 보고 싶어서 쓴 단문들.




1. 새하얀 종이 위에서 낯익고도 먼 그 이름을 발견했을 때 느낀 첫 감정은 기이한 면숙감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이름을 혀 위에 올려 소리 내 보던 그 순간, 가람은 떠올렸다. 나부끼던 커튼 밑에서 어린 고양이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로 종일 잠을 자던 닫혀있던 눈꺼풀과 매끄러운 콧잔등, 옴폭하게 패여 들어가던 입가의 보조개와 입술 밑 검은 점을 지니고 있던 소년을.

 


2. 단순한 동명이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가람의 추측이었다. 그 이름을 불렀을 때, 사람 열 명 중 다섯이 손을 들어 답응할 정도로 흔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할 수도 있을 법한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가람 역시도 제 이름을 단 낯선 인물을 심심찮게 마주하곤 했었다. 어떤 날은 허리 끝까지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던 '가람'을, 퍼트려놓은 꽃씨 같은 주근깨를 얼굴 만 면에 촘촘히 피워내던 '가람'을, 저보다 한 뼘 더 작은 키를 지니고 있던 '가람'이라는 옹졸한 사내를, 수많은 가람들을 지루할 틈 없이 종종 마주치고 스쳐 지나가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고 가람은 제 안에서 섣불리 단정 지었다.

 


3. 손을 들어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햇빛을 거둬내었다. 오월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볕은 여름 한나절만큼이나 매섭고 뜨겁게 제 열기를 분출시키고 있었다. 공기들이 텁텁하고 후덥지근했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 후에는 으레 장마가 찾아올 거라고, 원내 모든 선생들이 앞다투어 입을 맞추고 있었다. 마치 정론인 양 수차례 오르내리던 그 '장마'라는 말에 세뇌당한 양 가람은 이번 주에 내놓을 가정통신문 말미에 혹시 모르니 개인용 우비를 지참해달라는 문구를 잊지 않고 새겨놓았다. 그래 봤자 목요일 저녁 즈음에 보게 될 일기예보에 따라 삭제될지도 모를 그 문장은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역시 퇴근하기 전에 수정하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손을 들어 아이들을 모은다.

따가운 볕을 가리기 위해 손 갓을 펼쳐내며 입을 벌려 크게 아이들을 불러본다. 그러나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이맛살을 찌푸리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주름을 타고 주르륵 맥없이 흘러내리며 땅을 향해 고꾸라지고 있었다. 어느샌가 턱 끝에 땀이 방울져 있었다.

 


4. 또 한 번 제 말을 듣지 않을 시에 놀이시간은 주지 않으리라는 으름장을 한차례 매서운 소나기처럼 퍼붓고 난 뒤에, 그래서 몇몇 아이들의 얼굴로 울상이 번지고 난 후에야 가람은 미간의 주름을 펼쳐낼 수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입술을 깨물어 꾹 참는 아이들을 등진 채 그는 연거푸 한숨을 토해낸다. 어린 애새끼들은,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난다.

 


5. 반항만으로 이뤄진 진학이었다. 아버지는 가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람의 말투, 행동거지, 제가 물려주었을 것이 분명한 가람이 택하려도 택할 수 없었을 곱상한 생김새마저도 그는 가람을 비방할 투사체로 삼았다. 가람은 그야말로 증오의 물질이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 미간과 질시를 퍼붓기 바쁜 입술을 응시하면서 가람은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짜내고 털어내 갈아치워 버리고 싶다고. 그러나 불가능하지, 조소를 띄우며 가람은 저와 제 아비를 비웃는다. 언제나 끝은 매서운 뺨의 통증과 아린 혀, 그리고 구역질 나도록 비린 쇠 맛이었다.

 


6. 그날도 터진 입가에 대일밴드를 붙인 채로 터덜터덜 학교로 발길을 향하던 중이었다. 길목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평소라면 자연스레 지나쳤을 그 물건에 대한 호기심으로 소년은 발을 멈추었다. 지평선처럼 멀찍하게 그어진 골목 끝 선에 소년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쭈그리고 앉은 그 뒤통수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교내에 시뻘건 머리를 지닌 소년은 그 한사람밖에 없을 터였으니까.

무신경한 눈길로 가람은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번, 세차게 바람이 일렁이는 바람에 소년의 셔츠 깃이 위아래로 나풀거렸다. 그 틈새로 자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가 세찬 갈퀴질을 퍼붓곤 골목의 끝에서부터 가람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며 가람은 그 작은 생명체를 피했다. 가람을 피한 채 황망히 도주하던 작은 새끼고양이는 자동차에 치여버린다. 날개가 없을 텐데. 공중을 향해 세차게 비상하던 몸둥이가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가람은 바로 제 발밑, 운동화 코끝을 적셔버린 새빨간 피 몇 방울을 바라본다.

바로 제 뒤에서 울려 퍼지는 한숨 섞인 탄성에 미끄러지듯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머리의 소년이 여전히 보조개가 움푹 패여진 입술을 지닌 채로 쓴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불쌍하다, 그지?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 가람은 저도 모르게 운동화 밑창을 북북 소리 내가며 거칠게 아스팔트 위로 갈아내고 있었다.

 


7.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소년도 함께였다. 스스럼없이 소년은 제 교복 셔츠로 고양이를 거두었고, 공원 근처 적당한 풀숲에 묘지를 만들어주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성녀처럼 인자한 미소를 걸치던 소년을 따라 가람도 엉거주춤 손을 모은 채로 눈을 감아 보았다. 지루함에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던 새에 기도가 끝난 모양인지 그가 가람의 이름을 불러오고 있었다.

청가람. 눈을 뜨자 반짝이는 홍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다음은 입가의 점이었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소년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뺨을 간질이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소년은 말했다. 고마워. 영문모를 인사였지만, 가람은 그저 고개를 한번 떨궈내는 것으로 대답한다.

 


8. 가람은 눈을 깜빡여본다. 저도 모르는 새 깜빡 졸아버리고 만 모양이었다. 아이들 몇몇이 여기저기에 흩뿌려놓은 반짝이 풀처럼 제 자리에서 벗어난 채로 색색거리며 자고 있었다. 비져나온 머리와 발가지 따위를 이불로 감싸주며 그는 입을 쩍 벌어 하품을 토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꿈을 꾸어본다. 벌써 칠 년도 더 된 일이 이토록 생생하게 제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건 무슨 영문일까. 아마 요전번에 마주했던 그 이름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세찬 손짓으로 제 지친 눈두덩이를 비벼본다. 꼭 감은 눈꺼풀 안에서 바삭이는 빛을 따라 눈을 뜨자, 마침 제 발치에 가장 가까이 놓여있던 작은 발이 제일 먼저 망막에 맺혀왔다. 휘어지는 몸덩이의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마주하게 된 소녀의 잠든 낯빛에서 그 여름날 소년의 면숙한 뺨이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9. 그 후로 종종 가람은 작은 소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선생님, 하고 저를 불러올 때마다 휘어지는 입술의 선이나 그에 따라 곱게 파여가는 보조개와 여물기 시작한 발간 낯을.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솟아오른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소녀는 자신을 불러온다. 불리우는 그 이름 끝에 대롱대롱 맺혀오는 소년의 웃는 낯을 가람은 외면한다.

'수줍음을 많이 탑니다'라고 적혀있던 소녀의 통지서를 가람은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생경한 그 이름 세 글자를.

 


10. 보면 볼수록 소년과 작은 소녀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 빛 머리색이 첫 번째였고,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작은 보조개가 그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접어간 종이접기처럼 곱게 접힌 눈웃음이 꼭 그러했다. 뺨 중앙의 작은 점 하나까지도, 소녀는 소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11. 쓸데없는 착각. 소리.

 


12. 선생님 이름은 왜 가람이에요? 자리에 가서 앉아. 나는 내 이름요, 우리 아빠가 붙여줬는데. 선생님 이름도 아빠가 붙여준 거에요? 가서 앉아. 내가 태어났을 땐 봄인데 눈이 내렸대요. 주가은. 시끄러워. 선생님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 가서 앉아.

 


13. 아이는 울지 않았다.

 


14. 눈을 뜨고 창문을 바라본다. 그 상태로 한참을 누워 가람은 창밖의 정경만을 응시했다. 연푸른 쪽빛의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갈 즈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유치원에 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간밤에 말쑥하게 다려놓았던 와이셔츠에 팔을 구겨 넣으며, 구색을 갖추기 위한 요량에 불과할 남색 넥타이를 목에 매었다. 남색 넥타이에 남색 양복바지라니, 혀를 차면서도 가람은 바지의 밑단을 정리한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선물 받은 낡은 양복이었다.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졸업식에도 찾아오지 않던 아비를 맹렬하게 대변하면서 어미는 백화점으로 가람을 데려갔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가람의 말에 종종거리며 진땀을 빼던 어미는 양복 한두 벌 정도는 사다 두면 필요한 때가 올 거라며 어거지로 손에 붙들어주었었다.

누군가는 소중하게 품었을 그 선물의 선택지라곤 단 하나였다. 옷장 구석에 처박히는 일. 미간을 찌푸린 채로 가람은 미련없이 옷장 귀퉁이에 양복을 처박아둔 채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그러나 한 달 전 즈음 통보받은 발표회 행사로 인해 그는 기억의 무덤 속에 잠들어있던 양복의 존재를 찾아내었다. 옷장에서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입기까지는 섣불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맘 같아선 당장에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일 년에 몇 번 입을 리도 없을 양복에 구태여 불필요하게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15. 어색하고 불편한 옷만큼이나 밝은 미소는 가람에겐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가람은 웃었다. 동물원에 갇힌 새끼짐승, 혹은 한 마리 구경거리의 광대가 된 것처럼 가람은 연신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차라리 웃는 가면을 하나 뒤집어쓰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몹시도 피로했다. 수업이 다 끝나고 해가 저물어갈 즈음엔 근육이 단단하게 뭉치는 바람에 더 이상 입술을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통증으로 아려오는 광대 부근을 주무르며 가람은 의자에 앉아있다. 맞은편 의자에는 소녀가 앉아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내심 기대한 모양인지, 활기가 역력했던 낯빛은 시간을 달리할수록 퇴색해졌고, 종내에는 일그러지고 있었다. 우는 낯도, 웃는 낯도 아닌 뺨에 걸쳐진 보조개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는 아이들 틈에서도 소녀는 자꾸만 미련하고 청승맞게 열릴 리 없는 뒷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꼭 비 오는 날 내쫓긴 강아지와도 닮아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 한번 들지 않는 소녀를 보며 가람은 목이 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커다란 떡 하나가 가슴팍에 맺혀버린 듯한 더부룩함, 혹은 제 가슴에 못을 박듯 쿵 하고 울리는 둔턱한 통증에 할 말을 잊고 멍청하게 서 있기도 했다. 종내에는 가람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소녀의 고개를 따라 뒷문을 연신 힐끔거리기도 하였으나, 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열리지 않고 있었다.

 


16. 교실 안팎으로 넘나들며 붉은색을 퍼트리는 노을을 보다가 가람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사탕을 꺼내 들었다. 말없이 사탕을 내밀자 소녀는 감사합니다. 라는 작은 인사말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껍질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소녀가 뱉은 최초의 말이었다.

사탕을 빠는 소녀의 혀를 따라 뺨이 올록볼록하게 솟았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가람은 가만히 눈을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어느새 오후 6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집에 갈까? 라는 말에 소녀가 휘둥그레한 눈동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단맛에 침이 고였던 건 입안만이 아닌지, 어느샌가 눈가에도 축축하게 침이 고여가고 있었다. 금세라도 눈물을 뚝뚝 흘려낼 것 같은 눈동자를 외면하며 가람은 다시 의자에 단단히 엉덩이를 붙들어 매었다.

 


17. 턱을 괸 채로 시계 초침에 따라 서서히 가까워지는 땅거미들을 바라본다. 어느새 하늘 끝은 새까맣고 촘촘하게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선잠을 자는 소녀를 등에 둘러업으며 가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시계는 어느새 8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피로감에 하품을 토해내며 천천히 뒷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상하게도, 제 손은 닿지도 않았는데 문은 미련없이 매끄럽게 젖혀지고 있었다. 열린 문 이편으로 면숙하고도 낯선, 그 얼굴을 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다.

 


18. 주은찬.

 


19.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름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