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굴레차!

[찬가람] 아랫집 주은찬 윗집 청가람 썰

엘리스.aliceeli 2015. 6. 21. 03:03

나 밥 좀 해주고 가라. 아랫집 남자의 첫마디였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빨간 머리의 사내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내가 왜? 반문하기도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싫어요. 녹슨 쇳소리가 끼익끼익 울리는 문안에서 나는 가까스로 거절의 의사를 밝힐 수 있었다. 남자는 내 의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문을 걸어잠그고, 슬리퍼를 벗는다. 퀴퀴한 여름나무 썩은 내와 흐릿한 꽃내가 나고 있었다.

소리지르며 뛰어가는 어린 아이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 방지턱에 부딪치며 굴러가는 바퀴의 소음, 자동차의 크락션 소리 따위가 왁자지껄하게 한데 뒤엉킨 창밖의 소음들처럼 방 안은 온갖 잡자한 분내와 계집내, 달고 신 향기 일색이었다. 발에 못이라도 박은 듯 달싹이지도 않은 채 현관에 서있는 나를 보며 그는 웃는다. 라면도 괜찮아.

마침 운 좋게도 봉투 안에는 라면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그는 성큼성큼 겁도 없이 내 앞까지 다가와 다시 한 번 내 손목을 움켜쥔다. 눈앞이 빨갛게 물들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라면 있네, 하는 웃음기 섞인 음성이 들렸다. 욕이나 실컷 퍼붓고 이대로 뒤돌아 잠긴 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사내의 빨간 뒤통수, 검은 눈, 그 아래 그늘과 올라갈 듯 올라가지 않는 그 입술을 보자 마음이 장마철 비 맞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옳지, 괜찮아. 들어와. 그는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와중에 붙들린 손목만이 뜨겁다.

방으로 발을 들이자 생각보다 선연한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발가락 사이로 몇 번인가 미끄덩거리는 고무더미가 밟혔지만 눈을 돌려 확인하는 순간 '설마'하는 의혹이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았기에 끝내 외면했다. 발가락 사이가 간지러웠다. 무시한 채 나는 냄비를 찾는다.

길어야 십분 남짓, 여차하면 알아서 먹으라 한 뒤에 도망치면 될 일이었다. 서둘러 끓여주고 빠져나가자, 그럴 생각이었는데 시원찮은 냄비 하나 찾는 일이 어려웠다.

언제 먹다 남긴 건지, 바닥에 눌러붙다 못해 떡진 밥알, 곰팡이가 잔뜩 핀 탓에 흙으로 짓기라도 한 양 보이는 갈색의 밥덩어리와 지독한 쉰내가 나는 바람에 입안에 침이 고이다못해 헛구역질하게 만드는 김치찌개 따위가 냄비 안에 잔뜩 들어차 있었다. 솟구치는 토기를 억누르며 그 모든 걸 하수구로 쏟아부었다.

창문 좀 열어요, 아무런 말없이 그는 창문을 연다. 나는 수도꼭지를 튼다.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냄비에 물을 담는다. 전자렌지에 불을 올리자 사내는 담뱃불을 켠다.

방안에 이번엔 담배냄새가 가득해졌다. 창밖의 소음들도 거세진다. 담배연기를 흐트러트리며 다시 한 번 아이들의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 차의 덜컹이는 소리가 방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온다.

담배 좀 끄면 안 돼요? 싫다면. 그는 짓궂게 대답하며 어언간 제 뒤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이 아슬아슬하게 목덜미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계란도 넣어줘. 계란은 없어요. 내 냉장고에 있어.

라면 끓여주고선 가람이 가려니까 가려고? 하고 묻더니 돈 2만원 쥐어주면서 라면 끓여줬으니까, 수고비 하면서 웃는 은찬이. 가람이 못내 찝찝한 기분에 돈 내팽개치고 가면 좋겠다.

그날 밤에 창문밖으로 들려오는 고양이의 거세고 거친, 귀가 따가운 성난 교미소리. 성난 울음소리, 앙칼진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맨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자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바닥을 타고 아랫집의 교성이 들려오는 착각이 인다.

아랫집에 대한 일화, 문을 열면 매일 매일 다른 모양새의 여자들이 뛰쳐나오는 거. 더럽다고 생각하는거, 매일밤 집으로 여자를 끌어들여서 잠을 잔다던가. 누나, 잘 가~하고 웃는 남성의 모습이라던가. 사실 스쳐지나가면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가람이라던가.

붙들린 손목이 후끈거려서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다음날 여성과 인사를 하면서 보내고 있는 은찬, 또 가람을 보면서 라면 끓여줘. 라고 말해서 붙들려서 가는 가람. 라면을 끓이는데 이번에는 허리를 감싸안는 은찬 때문에 당황해 떨쳐내는 가람. 덕분에 냄비가 엎어지면서 발등이 데여버리는 가람. 은찬이 미안해, 하면서 얼음찜질해주는 거 보고 싶다. 그것도 얼음이 없어서 아이스크림으로. 동시에 먹을래? 하면서 다른 아이스크림 뜯어다 먹여주고, 그거 받아먹으면서 아이스크림 찜질을 받고. 라면을 끓여주고, 티비를 보면서 나눠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람. 그날은 은찬이 주는 돈을 받아옴. 다음날 그 돈을 들고 라면을 사러 가는 가람이.

라면 끓여줘, 라고 또 장보고 돌아오는 가람을 보고 웃는 은찬. 가람은 라면을 끓여주고 설거지를 하고, 깨끗해진 방바닥을 눈치 챔. 잘 개켜진 이불이라던가. 청소했어요?라는 말에 은찬이 웃으면서 응, 너무 더러우니까. 방이라도 깨끗하게 할까 싶어서. 하고 웃음. 가람이 그냥 넘김.

그날도 수고비라고 은찬이가 자기한테 돈을 쥐어줌. 만원 쥐어주는데 가람이 빤히 보니까 은찬이가 웃으면서 오늘은 돈이 없어, 그러니까 만원. 하고 그날 가람이 만원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을 자는데 아래층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음. 무언가 깨지는 소리따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뛰쳐나가니까 얻어맞는 은찬이가 있음. 가람이 그걸 보고 그만하라고 막다가 자기가 뚜들겨 맞아서 웅크리는데 눈치채보니까 은찬이가 자길 감싸면서 다 맞고 있음.

한참 뒤에 정신차려보니까 은찬이는 앞에서 담배피고 있고, 자기는 입술이 터진건지 입술에선 비릿한 피맛이 남. 할짝이고 있으니까 은찬이가 입술 터졌네, 하면서 웃음. 가람이 어이가 없어서 지금 웃음이 나요? 하고. 은찬이 웃고.

라면 끓여줄래? 해서 라면은 있어요? 하고 같이 사러가면 되지, 해서 둘이서 나란히 라면사와서 맥주도 마시다가 끌어안고 잠을 잠. 살고 싶지가 않아, 자살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고 있는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보니까 어떤 여자가 들어옴, 은찬이 가람이 보면서 미안한데 올라가서 자야겠다. 라면 고마워. 하고 멍하니 방문 앞에 서 있는데 안에서 교미소리 들리니까 얼굴 하얗게 변해선 방으로 올라감. 자꾸만 귓가로 고양이의 날카로운 교미 울음소리와 아랫집의 소리가 섞이는 듯 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위하는 가람이.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는데 다음날 아침에 문 앞에 나가니까 은찬이와 마주침. 은찬이 웃고, 가람이는 미묘한 기분.

더럽다고 손대지 말라고 말하니까 깨끗하게 씼었는데. 하고 웃는 은찬이. 가람이 더럽다고 손대지 말라고, 지난 밤 자기가 한 자위에 맞물려서 은찬이 때리면 좋겠음. 더럽다고, 돈주고 여자나 불러서 잠이나 잔다고. 그 돈으로 밥이나 시켜먹으라고, 여자년들한테 끓여달라고 하던가. 돈 주는데

(둘이 싸우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쳐들어온 남자한테 은찬이가 맞으면 좋겠다. 더러운 남창새끼 하면서 두들겨맞는 은찬이...라던가... )

더럽다고 손대지 말라고 말하니까 깨끗하게 씻었는데. 하고 웃는 은찬. 가람이 그런 말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남창이라는 말보다도 창녀랑 잔다고 소문나있다 밤마다 여자 불러서 자는 거를 어떻게 충격적으로 전달하지...? 아무튼 그걸 이야기하니까. 은찬이가 그냥 웃으면 좋겠다. 라면 끓여줘, 하니까 맨날 부르는 그 창년들한테 끓여달라고 하라고. 돈주고 부르면서 그깟 라면 하나 더 안끓여주겠냐고 말하니까 은찬이 표정이 싹 굳으면 좋겠다. 돈받고 떡치는데 안 더럽냐고,

은찬이가 비웃으면 좋겠다. 구질구질하다고. 가람이 데려가서 하면 좋겠다. 내가 특별히 너는 해준다고. 원래 돈 안받고 이 짓 안하는데, 너는 특별히 돈 없이 해주겠다고. 니가 말한 더러운 년같은 놈한테 따먹히는 기분은 어떻냐고. 나라고 좋아서 하고 있는 거 아니라고. 하면 돈주니까 한다고. 그런 식으로 따먹으면 좋겠다.

가람이 그날 잠에서 깨서 도망치려다가 잠긴 문 달칵여서 열려다가 은찬이한테 붙잡히면 좋겠다. 싫다고 주먹질하는데 라면만 먹고 가, 하면서 있다가 은찬이가 발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없어? 하다가 미안해. 하는데 대답없이 나오고.

그뒤로 소원하게 둘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갔는데 어느날 은찬이가 집앞에서 또 두들겨 맞고 있으면 좋겠다. 은찬이 아무런 말이 없고 가람이 그거 한참 지켜보고 있는데, 은찬이가 눈 마주치니까 씩 웃으면 좋겠다.

가람이 다가가서 은찬이한테 라면 먹을래요? 말하는데 은찬이 가만히 있다가 눈물 주륵 흘리면 좋겠다. 눈물 쓱 닦고, 라면 먹는데 은찬이 손에 수저 쥐어주는 가람이라던가.

라면먹고, 가람이 가려니까 은찬이가 버릇처럼 돈 주려고 하는데 가람이 가만히 있다가 필요없어요. 이걸로 다 안 될 거 같으니까. 어? 나한테 미안한 짓 한 거 알죠. ... 평생 갚게해줄게요. 특별히. 나도 평생 라면 끓여줄테니까. 라면 불어요. 얼른 처먹기나해요. 하고, 은찬이 가람이랑 같이 살면 좋겠다. 이제 좀 멀쩡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은찬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