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또 다른, 주은찬의 이야기
또 다른, 주은찬의 이야기
* 설정날조 주의!
1.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에 백은이 아이를 낳았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열 개로 성한 몸뚱아리의 노란 눈을 지닌 아이를 보며 백은은 '그렇구나' 라고 말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건이라 불릴 터였다.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리며 몸부림치는 아이를 제 가슴으로 품으며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왕이면 계집애가 더 좋았겠어. 그렇게.
계집아이라면 마지못해 다른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저렇게 크고 힘찬 울음소리를 자랑할 수 있는, 건강한 사내아이에게 건이란 이름은 너무도 잘 들어맞았다.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제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건아. 아이는 대답이 없다. 창밖의 나무만이 앙상하게 마른 제 잔가지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낸 채,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푸른 빛이 무성하던 이파리들을 다 떨궈낸 가지에선 퀴퀴한 향이 나는 것만 같다.
그녀는 잔가지를 따라 하늘로, 하늘로 눈동자를 올린다. 그가 보고 싶은 듯하다. 그녀는 하늘로 올라간 제 하나뿐인 피붙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2.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봄이 깊어지고 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아침나절로 쌀쌀한 가운데 정오가 되면 햇빛이 작렬하게 내리쬐며 이마부터 시작한 땀이 목덜미까지 번지기 십상이다. 목에서부터 검은 때가 묻어나온다.
중앙의 한여름 밤은 마치 남극의 백야를 닮아있다. 무성한 풀밭 사이로 솜솜이 싹트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그친 시각은 실로 고요하고 잔잔하다. 밤하늘의 은하수는 소리없이 흘러가는 와중에도 햇빛을 대신하는 양 중앙을 따사로이 비춰온다. 아름답다. 내 머리맡으로 거대한 오로라가 하나 그늘진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하늘의 일들을 생각한다.
3.
다섯 살이 된 어린 건은 좀처럼 우는 일이 없다. 무표정으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걸음을 걷고 넘어진다. 그래도 울음을 터트리는 법이 없다. 그러나 청가람의 아이는 곧잘 넘어져 울음을 터트리곤 한다. 아이의 무릎엔 시종 엎어지고 넘어지며 자갈에 긁힌 생채기들이 가득하다. 똘망똘망하게 빛내던 붉은 눈동자를 뭉그러트리곤 내 다리에 매달려 세상 떠나가듯 서글프고 처량하게 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애달프게 만드는 그 울음소리를 나는 이전에 언뜻, 가을밤을 스치우다 들은 적이 있다. 발소리를 죽인 채 장지문 앞에 선 나는 그 흐느낌을 귀 기울여 듣곤 하였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가을밤의 흐느낌과 무척이나, 매우 닮아 있다.
4.
펭귄은 남극에 살아? 북극에 살아? 청가람의 아이는 곧잘 내게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종종 내가 저를 홀로 두고 외출할 때면 그렇다. 내 발에 대문이 닿기도 전부터 무섭게 전화기는 울려오기 시작한다.
전자음이 섞인 그 콧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음악 같은 그 목소리가 나는 마음에 든다. 청가람의 아이에게선 푸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을 가득 품고 있는 거대한 바다같이 푸른 목소리다.
당연히 남극에 살지.
그럼 북극엔 펭귄이 살지 않아?
응, 북극엔 펭귄이 살지 않아요.
수화기 너머로 고른 숨소리만 전해져온다. 마치 수화기에 데고 호, 호, 하고 입김을 불기라도 하는 양 숨소리가 큰 전자음으로 내 귀에 닿다 맥없이 꺼져버린다.
왜 그러니?
북극은 외롭겠다 싶어서…
마치 북극을 사람이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그렇구나, 북극은 외롭겠구나. 하지만 북극엔 대신 곰이 살고 있단다. 그러니까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않아?
목소리가 물결친다. 그래,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무시한 채로 나는 웃는다. 어느덧 중앙에 홀로 남은 지 칠 년이 다 되어간다. 중앙의 밤은, 적요하다.
5.
나는 스물 다섯살부터 늙지 않았다. 정확히 십 년 전의 일이다. 그해 봄에는 참으로 비가 많이 내렸었다. 청가람의 아이가 하늘로부터 떨어지던 것도 그 해 봄이었다. 청가람은 그 해에 딱 한 번, 지상으로 내려왔었다. 예고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와 온 땅에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봄비처럼 청가람은 홀연히 내려왔다 사라졌다.
그래서 청가람의 아이는 이름이 없다. 가람이 지어주지 않았기에 줄곧 무명의 상태로 지내왔다. 그래서 나는 멋대로 청가람의 성을 떼어와 그 아이의 이름을 청이라 부르기로 했다.
청아, 하고 부르면 마당 구석에 핀 민들레 홀씨를 뜯어 멀리 날려 보내기에 열중하다가도 녀석은 쪼르르 내게 달려와 종아리께에 뺨을 부비곤 하였다. 그 해 가을엔 어린 건이 태어났고, 겨울엔 새로운 현무 후계자가 태어났다. 새로운 주작 후계자는 태어나지 못했다.
6.
청이는 사내아이답지 않게 피부가 곱고 희다. 햇빛에 조금만 내놓아도 빨갛게 트기 일쑤다. 좀 더 나이가 적었을 적엔 웃기만 해도 뺨이 붉게 물들곤 했다. 빨갛게 물든 채로 부푼 볼의 모양새가 마치 잘 익은 복숭아를 닮아, 참으로 어여쁘다 여겼었다.
청이도 올해로 열 살이 되었다. 청가람은 벌써 십 년째 지상에 내려오지 않고 있다. 아니, 청가람이 지상에 방문한 지 어느새 십 년이 지나버린 셈이었다.
올해 생일도 청과 나 둘이서 보내야만 했다. 청이는 부쩍 말수가 줄었다. 근심하던 것과 달리 생일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수다쟁이로 돌아왔기에 나는 안심했다. 청이는 이제 곧 열한 살이 되겠지. 나는 서른여섯이 될 터였다. 그러나 나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부터 늙지 않고 있다.
서른을 넘겨버린 은지는 어느덧 눈가에 주름을 지니기 시작했다. 애교살 밑으로 겹쳐진 잔 빗금 같은 주름들이 그녀가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는 듯하다. 스물여섯 살을 넘기며 대화가 줄었던 그녀는 요사이 청이를 따라 다시 수다쟁이라도 된 것 양 쉴 새 없이 전화해온다.
석 달도 다 지나버린 정초의 일부터, 반년도 더 된 작년 생일의 일하며 하나하나 꼬집어 말꼬리를 잡는다. 그렇게 늘려진 대화의 시작이 어떻든지 간에 마지막은 꼭 '이번에는 올 거지?'라는 말로 끝이 난다. 나의 대답도 언제나 같다. '갈게.' 물론 나의 이 말이 거짓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녀는 수긍하며 전화를 끝내준다.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같이 지낸다는 그 애 때문에 그래?
청이라고 해. 몇 번이나 알려줬잖아.
그래, 아무튼 청인지 뭔지 하는 애 때문이면 데려와도 상관없으니까…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겨버린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수화기로부터 흘러나와 자꾸만 내 귓속으로 파고든다.
꼭 와.
7.
올해로 청이는 열네 살이 된다. 이 말은 이번 겨울이 끝나면 중학교에 가게 된다는 소리다. 생전 처음 입어본 교복이 썩 맘에 든 모양인지 옷장 한쪽에 고이 모셔둔 채로 손도 못 대게 하고 있다.
중학교는 어떤 곳이야?
초등학교랑 별로 다른 건 없는데…
뭐야, 시시해.
열넷이 된 청이는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다. 종아리에 이마를 부딪치던 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내 가슴팍까지 키가 큰 사내아이만이 내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입학을 앞둔 청이를 위해 은지는 새 책가방을 택배로 부쳐주었다. 제 깐에는 깜짝 선물이었던 모양인지 택배 상자 위에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택배 상자 안에는 닭살스런 말이 잔뜩 쓰인 카드도 동봉된 채였다.
이게 뭐야, 부끄럽게.
퉁명스럽게 말을 뱉으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지, 청이는 택배상자를 즐거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방을 메고 거울 앞에 서 제 모양새를 이리저리 곁눈질로 살피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맘에 들면 고모한테 전화라도 해줘. 좋아할 거야.
됐어. 부끄러워.
그렇게 말하면서도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전화기를 자꾸만 힐끔힐끔 눈으로 훔쳐낸다. 나는 조용히 거실에 청이만을 남겨둔 채로 방으로 들어선다. 아주 약간의 정적 뒤에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서서히 온 집안으로 펼쳐지고 있다.
나는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푸른 목소리를 듣는다. 소리에 귀 기울이며 빛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어본다. 내민 손바닥 위로 햇빛이 한가득 고여 들었다. 나는 그 햇빛을 한 움큼 쥐어본다. 잠시 손안에 머무르나 싶던 빛은 이내 손가락 사이 빠지는 모래처럼 맥없이 바닥으로 흩어진다. 햇빛으로 물든 바닥 한가운데가 손바닥만 한 그늘로 얼룩져 있다.
나는 창문을 닫아 햇빛을 끊는다. 문이 닫히며 내는 창틀의 고통스런 잇소리와 동시에 거실의 목소리도 끝이 난다. 서른다섯 살이 된 은지는 드디어 올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짐짓 진지하게 예쁜 딸을 낳고 싶다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를 똑 닮은 붉은 머리의 아이이길 바란다며 웃고 있었다. 나도 그 미소를 흉내 내보이기 위해 굳은 뺨을 힘껏 위로 당기어보았지만, 나의 입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8.
청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에 은지는 아이를 낳았다. 체구가 작아 미숙한 계집아이로 그렇게 '주은찬'은 태어났다. 붉은 머리가 아주 멋들어졌지만, 화려한 머리칼과 달리 뼈대가 가냘픈 계집애였다.
유리창 너머의 잠든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리 둘은 오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둘 사이로 드문드문 퍼지는 소음들이 침묵에 생채기를 새겨넣곤 했지만, 우리 둘의 입술은 조금도 비틀어지지 않은 채로 굳게 닫혀있었다. 먼저 입술을 떼 대화의 물꼬를 튼 건 또 내 쪽이었다.
이름은 정했어?
오빠를 닮았으니까 은찬이라 부를까 해.
뜯어진 침묵 사이로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에 스며든다.
여자애잖아.
뭐 어때, 충분히 예쁜 이름이잖아.
그래.
봐, 오빠를 닮았어.
빨간 머리라서?
응, 머리가 새빨개.
그녀의 눈꺼풀이 접힌다. 그 눈 밑에 그려진 잔주름들이 얼굴 곳곳으로 퍼져가기 시작한다. 얼굴 전체를 찡그리며 웃고 있었기에 마치 그녀를 모르는 이라면 그녀가 울고 있으리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모양새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런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어본다. 빗질하듯 아래로 쓰다듬자, 그녀의 뒤통수가 가슴팍에 닿는다.
저 애도 나중엔 하늘나라로 가야겠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몸이 아주 엷게 떨리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위로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그 너머론 붉은 머리의 자그마한 계집애가, 그리고 그 옆엔 붉은 머리의 사내가 보인다. 그는 스물다섯 살로, 여즉 늙고 있지 않다. 나는 그 낯선 얼굴의 사내가 나 자신임을 깨달으며 눈을 감는다. 눈앞이 정전에 휩싸인 듯 캄캄했다.
9.
약 석 달 전, 갓 돌을 넘긴 은찬이를 데려왔다. 제 어미의 품속에서조차 칭얼거리며 울기 바쁘던 그 아이는 청의 가슴팍에서는 한 마리 순한 양 같았다. 갑자기 생겨버린 어린 누이가 청은 퍽 맘에 든 모양인지 한시도 제 품에서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러한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청은 은찬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을 표하며 기뻐했었다.
멀리 갈 일이 생겼다며 갑작스레 은찬이를 떠맡긴 채로 은지는 차를 몰고 사라졌었다. 다녀올게, 하고 웃으며 은찬의 이마에 입을 맞춘 채로 그녀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면 된다던 그녀의 외출이 길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차편이 끊긴 모양이었다. 약 일주일 뒤, 은지는 정말로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이 깊어지고 있었다. 밤낮없이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사람이 셋이라 그런지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청이가 열여섯이던 그 해, 다시 한 번 하늘이 열렸다.
10.
그해 겨울은 바람이 드세었고, 비가 자주 내렸다. 하늘이 흐려 볕이 제대로 들지 않은 탓에 그늘이 드리워진 중앙은 어두운 동굴 같았다. 그 겨울의 끝자락, 중앙엔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고, 천둥소리는 구름 속에서 깊게 울렸다. 산이 무너질 듯 커다란 하늘의 포효 속에 청가람이 내려왔다. 정확히 십 육 년 만의 일이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열여섯의 앳된 얼굴로 청가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비바람이 자꾸만 뺨과 눈꺼풀 위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통에 눈뜨기가 쉽지 않다. 얼굴에 고여진 빗방울들은 닦아내기 무섭게 또 다시 모여든다. 속눈썹 사이에 성글게 맺힌 빗방울 탓에 시야는 잔물결로 얼룩진다. 눈안에 물기가 출렁인다.
청가람이 다가와 내 눈꺼풀 위에 고인 빗방울들을 쳐내고, 소매로 얼굴을 닦아낸다. 하얀빛의 소매가 금세 탁해졌다.
소식 들었어.
청가람이 입을 열었다.
하늘은 소식통이 느리니까. 어제야 알았어. 어제라 해도 이곳에서의 어제일지, 일 년 전인지 감도 안 잡히지만.
청가람은 부쩍 말수가 는 듯 보인다. 물에 젖어 이마 위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걷어내며 가람은 소매로 제 이마를 훔쳐낸다. 소매가 한층 더 탁해졌다.
주작 후계자가 태어났다며, 축하해.
잔금 같은 비들이 청가람과 나 사이를 빽빽이 메워가고 있다. 땅을 내리치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천둥은 다시 한 번 구름 속에서 세차게 울음을 터트린다.
고마워.
청가람은 다시 한 번 내 얼굴 위에 쌓여있던 비를 닦아낸다. 그리고 얼굴을 더듬으며 물어온다. 한참의 망설임에 곱씹어진 그 작은 속삭임은 내 귀에 닿기도 전에 비바람에 휩쓸려 멀리 날아가 버린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뒤로 촉촉한 빗방울들이 텅 빈 귀를 채워간다. 물기 어린 귓가에 작은 울음소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깊은 가을밤의 이 울음소리를 나는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 이건 청가람의 울음소리다.
11.
다시 한 번 그 가을밤을 생각한다. 추운 겨울의 한기가 몰아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내게 있어 지금은 틀림없는 가을밤이다. 내 나이 스무 살이던 그해 가을, 너의 울음소리를 문지방 너머로 훔쳐보던 그 가을이 틀림없다.
내 기억 속 그 날도 밤하늘은 틀림없이 아름다웠다. 머리 위론 은색의 은하수가, 내 눈앞엔 너의 눈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니 너는 분명 그 날, 아름다웠다.
너의 울음소리가 가슴에 스며들어온다. 나는 문지방 너머로 너의 눈물을 핥고, 훔쳐내며, 숨을 내뱉어본다. 허공을 희미하게 흔들어대는 밤바람이 시렸다.
울지마.
나는 까끌까끌한 창호지에 내 입술을 갖다 대며 조용히 목소리를 불어넣는다. 거짓말처럼 너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그 뒤로 우리는 여타랄 진전은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문지방 너머로 너의 울음을 듣고, 너는 나의 속삭임에 눈물을 그치곤 했다. 너는 스물다섯을 앞둔 채로 하늘에 올라갔고, 나는 그해 겨울에 겨우 사신강림을 이루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 하늘에서 청이 내려왔다. 청이는 그 가을밤의 흐느낌을 지닌, 푸른 아이였다. 네가 보고 싶어지는 밤이면 나는 청이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작은 아이는 너무 따스해서 자꾸만 네 생각이 옅어진다. 그러나 그 붉은 눈동자는 틀림없이 너를 상기시켜온다.
그렇구나, 이건 또 다른 너로구나. 네가. 내게 보내는 네 마음이구나. 그렇다면 이건 틀림없는 너의 연서일 것이 분명했다.
12.
청이는 올해로 열여섯이 된다. 이 말은 네가 열 여섯 해가 다 가도록 하늘에서 나를 기다려줬다는 말이다. 너는 줄곧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너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심스레 숨을 불어넣는다. 울지마, 조곤히 속삭이는 내 목소리 위로 거짓말처럼 너의 울음이 멎었다. 이제 잘긴 빗방울조차도 우리 사이에 생채기를 내지 못한다. 너의 축축한 이마 위로 나의 입술을 살포시 올려본다. 축축한 낙엽의 냄새가 난다.
13.
이번 달만 지나면 청이는 스물다섯이, 은찬이는 열다섯이 된다. 청가람이 하늘로 오르던 나이가 되는 셈이다. 열다섯이 된 은찬이는 곧잘 주술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곧 있어 사신강림을 이룰 터였다.
그 이듬해에 청은 스물여섯이 되고, 은찬은 열여섯 살이 된다. 그리고 그 둘이 나란히 하늘로 오를 날도 그리 멀지 않겠다. 너와 내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그 아이들은 이뤄줄 터였다. 더불어 네가 내 곁으로 올 날도, 머지않아 곧.
14.오늘도 하늘 아래 중앙은 시끌벅적하기 그지없고, 내가 발을 댄 하늘 위 이 땅도 평화롭다. 네가 있을 그곳도 안녕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