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찬가람?] 유서
유서
아주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철없고 허무맹랑할 너와의 미래를 나는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홀로 드문드문 천장 위로 그려놓곤 하였다.
하늘로 가지 않고 온전히 이 지상에 너와 나, 두발을 땅에 딱 붙여놓고 서로의 손을 잡고 매일을 그렇게 지내는 거야. 봄이면 냉이, 달래, 보리순같이 쓰잘데기없는 봄나물들을 때려 박아 된장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쳐서 저녁밥상을 차리고 앉아 도란도란하니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거지.
여름이면 불볕더위에 지쳐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란히 누워 서로의 고동을 벗 삼아 자장가를 불러주며 잠을 청하는 거야. 틀어놓은 선풍기의 바람이 좀처럼 내게 잘 오지 않아 나는 투정을 부리고 너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겠지.
가을이면 단풍도 보러 가고 고구마도 쪄먹고. 유치하지만 단풍잎을 책 사이에 끼워 넣어 바짝 말려 책갈피도 만들어 볼 거야. 사실은 나, 그런 것도 한 번 못해봤거든. 겨울엔 네가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어. 아니, 내가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어. 열에 들뜬 목소리로 아주 작게 칭얼대며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너는 내 앞에서 죽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나를 돌봐주겠지. 나는 그런 너를 보고, 아주 약간 눈물을 흘리고, 열 때문이라며 변명하고 웃다가 다시 또 울지도 몰라. 그럼 너는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고 미소 지어주겠지.
우리는 그렇게 겨울을 날 거야. 서로 번갈아가면서 감기를 앓고 위로하며. 병든 맘을 간병해주다 보면 눈 깜박할 새에 다시 봄이 오겠지. 그땐 또 된장국을 끓여먹고, 꽃놀이도 가고, 간간이 여름엔 피서도 가고. 그렇게 우리 둘이 꼭 붙어서 살자. 딱 우리 둘이. 많이는 안 바래. 더 많이도 안 바래. 그저 내 옆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있는 매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근데. 나는 이 모든 게 헛된 꿈이란 걸 알아.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것도 너무나 잘 알아. 그래서 지금은 너를 놓지 못하겠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