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가람/] Amorosso
확실히 피아노를 다루기는 좀 어설펐지, 싶었다. 5초를 넘기긴 했어도 여지없이 불합격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건 합격번호 103번이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해 봄, 나는 학교에 무사히 입학했습니다.
Amorosso, 주은찬의 이야기
실기시험을 코앞에 두고 악기를 바꾸게 되었다. 보나마나 불합격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러한 저의 맘과 달리 학교로 들어가는 문턱은 보기보다 낮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것이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제 주변으론 무수한 소문이 겉돌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줬다더라, 기부금으로 몇억을 갖다 바쳤네, 혹은 이사장 아들이라더라,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뜬 소문들.
은찬은 숨이 막혔다.
자신은 천재도, 영재의 발끝도 못 다가갈 그저 하나의 평범한 범재에 불과한 인간이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는지는 스스로조차 의문이었다.
보통 5초지. 5초면 판별이 난다고 음악 선생님은 말했다.
"10초? 아니다, 보통 5초면 판별이 나."
"5초요? 너무 짧은데."
"그 정도면 긴 거야. 어떤 애들은 첫 음 치는 순간 땡! 하고 쫓겨나기 일쑤니까."
"그래선 시험을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하루에 수백 명의 연주를 들어야하니까, 첫 음만 갖고 판별을 한다는 것도 일리는 있지."
그나마 고등학교는 사정이 좋은 편이라며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술을 하려면 보통 두 분류인 것이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거나 혹은 비상한 천재이거나. 그리고 나는 그 해, 천재를 만났다.
그 천재의 이름은 청가람이었다. 청가람은 언제나 입을 꾹 다문 채로 제 몸둥이만한 첼로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물론 수업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이번 신입생 요주의 인물, 돈이 많은 주은찬 그리고 세기의 천재 청가람.
청가람은, 아홉 살 때부터 개인 연주회를 열었다고 했다. 그에 걸맞게 청가람의 손끝은 야무지게 굳은살이 박혀있다. 어린 시절부터 곧잘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뭐, 아버지가 음악계에서도 명망 높기로 소문난 작곡가에, 어머니는 외모 또한 출중하다던 천재 소프라노랬으니까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런데 보통, 그런 천재가 이런 예술 학교에 오나? 의문이 일었다. 천재들에게도 그들만의 라운드가 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줄리어드니 버클리니 하는 그런 음대들 말이야. 아직 고등학생이라 입학을 못 한다구? 그렇지만 정말 천재들이라면 나이따위 상관없이 그들을 채택할 테지.
청가람은 말 그대로 의문투성이였다. 그런 가람은 은찬에게 때마침 나타난 난데 아닌 수지였다. 한창 물오른 호기심을 촉촉이 적셔줄 단비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주은찬은, 청가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침 딱 좋지 않은가. 마침 제게는 괜찮은 구실도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애들이 말하듯 내가 돈이 많은 범재에 불과하다면 천재에게 호기심 따위를 갖는 건 당연스런 거 아니겠어? 뭐,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보통의 평범한 인간들이라면 천재에게 눈길이 가는 게 일반적일 테니까.
딱 보기 좋고 적당한 타이틀이었다. 제가 지니지 못한 재능에 대해 질투를 불태우는 꼴불견, 가람에게 접근할 구실은 충분했다. 그리고 뭣보다 은찬에게 있어선 친구가 필요했다. 학교는 넓었지만, 사람은 적었다. 이 안에서 은찬은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비단, 범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역시 천재는 다른 모양이다.
"내가 왜 너랑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기숙사로 넘어가는 공중다리 위에서 보기 좋게 가람에게 한방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제가 내민 손을 보며 가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쏘아붙이듯 날카롭게 대답했다.
은찬은 그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로, 그저 어설프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어야만 했다. 3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찼다. 가람은 그런 은찬을 비웃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람의 입은 다시 위아래가 꾹 맞물린 채였다. 그 등에 매달린 첼로가 둔탁이며 육중한 신음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가람은 닫힌 입으로 응석 어린 소리 하나 내뱉는 일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은찬 역시 저편으로 작아지는 가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발걸음을 달리했다. 기숙사로 돌아가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야지, 그것이 생각이었다. 이 학교의 좋은 점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어느 정도는 자율적인 수업참여였다. 저 하나쯤 수업에 빠진다 해도 이미 절반가량이 교실에 앉아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한참을 찬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양만을 세우던 은찬은 이내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이 학교에는 그 어떤 무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천재들은 하나씩 특출난 구석이 있다던데, 이 학교에 있는 애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외로움을 모르는 듯했다. 좋은 의미로 사생활이 보장되는 일인실 기숙사가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이면 홀로 이 작은 방에서 눈을 떴고, 밤이면 잠을 잤다. 하루 왠종일, 어둠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그들은 오롯이 자신의 악기하고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대화-삶은 악기의 연주가 전부인 듯 보였다.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는 일일까? 은찬은 홀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구석에 내팽개쳐둔 기타가 제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은찬이 가장 잘 다루는 악기는 기타였다. 오랜만에 손을 탄 기타는 노쇠한 노인마냥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줄을 갈 때가 된 모양이다, 튜닝을 해도 도무지 음이 맞지 않는다.
습관이나 다름없이 굳어버린 손짓으로 몇 번 줄을 튕기던 은찬은, 못내 기타를 다시 구석으로 치워 놓았다. 그 잠깐 동안 손에서 떨쳐내었다고 이렇게 쉽게 굳은살이 사라졌을 줄이야. 손끝이 칼에 베인 듯이 쓰렸다.
수업도 빼먹은 채로 홀로 방안에서 눈을 붙이기에도 진절머리가 났을 무렵, 4월이 되었다. 은찬은 이제 곧잘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빼먹지 않고 피아노 연습도 종종 했다. 그러니까, 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새로운 곡을 세곡이나 익혔으니 연습량이 그리 적은 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있는 애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그저 잘 쳐서 비상한 범재쯤이 되었고, 이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면 특별한 정도로는 안 되었다. 뒤에 붙는 수식어가 '영재'쯤은 되어야 했다.
치열하지, 싶었다. 고작 한 달 남짓 이곳에서 보냈을 뿐인데, 이 척박한 곳에서 도무지 제가 삼 년이란 시간을 버텨낼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버텨내야만 했다. 일단 들어와 버린 이상 오기라는 게 제 안에서 꿈틀거리기도 했다. 적정한 자극제였다. 뭣보다, 제가 포기 못 할 이유도 있었고.
제 주변에 떠다니는 풍문들처럼 제가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이따위 고민도 안 하고 당장에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나 있지. 자신은 부자가 아니었다. 제 입학에 들어간 돈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둘째 치더라도 누나가 제 눈에 밟히었다. 사실, 피아노를 잘 치는 건 은찬이 아니라 누나였다. 누나는 곧잘, 피아노를 쳐내었다. 누나는 6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누나는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고, 은찬은 그 옆에 앉아 듣기를 좋아했다.
가벼운 동요부터 시작해서 누나는 일 년이라는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곧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누나는 피아노 치기를 좋아했고, 더 나아가 피아노를 사랑했다. 누구보다 곁에 있던 은찬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누나는 피아노 연주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해에, 은찬은 피아노를 가지게 되었다.
피아노를 배우게 된 은찬은 곧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누나가 삼 년 걸려 터득한 그 수많은 연주들, 기법, 악보들을 은찬은 단시간 내 스펀지마냥 흡수하고 있었다. 누나는 웃으며 박수를 쳤고, 은찬은 그저 웃었다.
비상하지도 못한, 평범한 범재들은 그저 진흙 속에 묻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발견될 진주도 못 되는 발에 채이는 돌덩어리에 불과했으니까.
누나는 그 뒤로도 종종 피아노를 두드리곤 하였다. 그러나 그 쾌활한 반주음은, 은찬이 곁에 다가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기 마련이었다. 은찬은 두 번 다시 제가 누나의 연주를 들을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나, 그럼 비상한 범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진흙 속에서 빛나도 상관없었는데, 캐내어 져 버렸잖아. 원치 않게 장식장에 놓여졌어. 근데 그곳의 그 수많은 보석과는 어떻게 겨뤄야 좋을까. 은찬은 알 수 없었다.
비상한 범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연습곡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계속해서 같은 구간에서 거짓말처럼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해보자, 이번에는 될 거야, 한 번 더 하면 될 거야, 다시 치면 거짓말처럼 잘 치게 될 수 있을 거야. 끝없는 자기암시와 격려를 해가며 은찬은 건반을 두드렸다. 그러나 피아노는 응답해주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춰버릴 때면 은찬은, 모든 걸 다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었다. 더 이상 건반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게 되었을 때, 은찬은 피아노의 뚜겅을 덮었다. 둔덕지고 웅장한 피아노의 괴기스런 비명을 끝으로 은찬은 도망치듯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두 번 다시 피아노가 보고 싶지 않았다. 은찬은 그 날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연 그들의 얼굴엔 아주 잠깐의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침 금요일 오후였기에 그들은 큰 반감 없이 은찬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은찬이, 네가 올 줄 알았으면 장이라도 좀 봐오는 거였는데."
"괜찮아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은채야. 네가 나가서 장 좀 봐올래?"
"정말로 괜찮아요. 그냥, 그러지 말아 주세요."
한사코 괜찮다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누나의 손에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주며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못이기는 척, 그녀는 쓴 웃음을 지으며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달칵이는 문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뒤엔 어머니와 가벼운 잡담을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근 시간에 맞춰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었고, 그럼 다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은찬은 간만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평화롭게 눈을 붙일 수 있게 되리라. 그렇지만, 그 뒤엔? 이다음엔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멋대로 학교를 이탈해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선? 이 뒤의 일은 어떡하면 좋지?
막연했다. 그래서 은찬은 방문을 걸어 잠궜다. 어둠에 잠식되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층 또렷해진 그림자를 세우며 피아노는 은찬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저하듯, 은찬은 그 앞에 앉았다. 떨리는 손길로 먼지가 쌓인 덮개를 걷어내었다. 달빛을 받아 애상에 찬 건반이 반짝이고 있었다. 은찬은 홀리듯 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데어 보았다. 그러나 음은 덧씌이지 않았다.
몇 번인가, 건반 위를 오가며 주저하던 은찬은 끝끝내 음을 누르지 못하였다. 무기력한 손이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은찬은 피아노 위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주저함 뒤는 거센 주먹질이었다. 세차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건반 위를 내리쳤다.
건반의 세찬 오열과 현들이 뒤엉키면서 내지르는 엉망진창의 소음들로 은찬은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피아노의 이들이 세차게 은찬의 손을 물어뜯는 바람에 주먹을 쥔 손이 아렸다. 문뜩 눈물이 났다. 그래서 은찬은 아주 조금 울었던 것 같다. 피아노는 그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대로 울다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은찬은 제 방문을 두드리는, 미약한 노크 소리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주은찬."
누나의 목소리였다. 황급히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서 문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마음먹고 잠가 버린 문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간밤의 격노로 아직도 부들거리는 손끝을 달래며 은찬은 조심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틈으로 마주친 누나는 아주 약간의 경악과 걱정을 섞은 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뒤는 곧 온화한 웃음이었다.
"밥 먹어야지."
누나는 분명 간밤에 제가 내지르던 비명을 들었을 것이다. 입을 벌려 소리 내진 않았어도, 격정적이던 피아노의 울분을 통해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느꼈을 테지. 그러나 누나는 나의 고통에 대해 한마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누나는 간밤의 일을 묻지 않았다. 우리가 식사를 통하여 나눈 대화라고는 엄마는?, 출근하셨어. 가 전부였다. 누나는 은찬을 향해 불필요한 말은 붙이지 않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그녀는 말없이 설거지를 했다. 그에 맞추듯 은찬은 텔레비전의 전원을 올렸다. 학교에 들어간 이래 정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헛다리 짚었던 모양이다. 좀처럼 누나와 저 사이에 감도는 장엄한 침묵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재밌니?"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은찬의 옆으로 다가와 누이가 묻는다. 은찬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젓는다.
"피아노도?"
소리에 별안간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말이 매섭게 제 귀를 할퀴고 있었다. 황급히 눈동자를 돌리자 누나는 언제 말을 걸었냐는 듯, 조용히 텔레비전만 응시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전자음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웃음소리이기도 했고, 가끔은 비명이기도 했으며, 날카로운 소음이기도 했다.
은찬은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누나는 여즉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다. 간밤의 일에 대해 물어볼까, 잠시 궁리를 했다. 그러나 물을 수가 없었다. 은찬은 터져 나오지 않는 생각들을 반추시키며 연거푸 입술을 깨물었다.
침묵의 물꼬를 튼 것은 누나의 웃음소리였다. 별안간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는 누나를 보며 은찬은 아주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떠올렸고, 이어 전염되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두 사람은 정신없이 웃었다. 그다지 웃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도, 텔레비전이 재미있던 것도 아닌데. 한참의 폭소 뒤에 누나는 은찬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왜 눈치를 보고 있어."
"그냥.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피아노 치기 바빠서 사람이랑 말하는 법도 까먹었니?"
"그건."
"피아노 재미있지."
누나의 말에 솔직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두 사람 사이에 고요함이 살짝 덧입혀진다. 그 잠깐의 게식 후, 은찬은 조심스레 말을 뱉었다.
"누나도 요즘 피아노 쳐?"
"글쎄. 곧잘 치고 있어. 물론 네게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피아노 위에 쌓여있던 먼지를 은찬은 똑똑히 보았다. 누나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은찬은 다시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습은 괜찮니?"
"누나."
"응."
단어를 혀끝으로 누르는 듯, 억눌린 소리가 누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밉진 않아?"
말을 뱉은 것은 저인데, 되려 제가 그에 헤침을 당하는 것만 같다. 바늘에 찔린 듯 가슴이 쿡쿡 쑤셨다. 죄책감이 너무도 굳세게 어깨를 눌러오는 탓에 입에선 신음만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고개가 들어지지 않았다.
"글쎄. 전혀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은찬은 입술을 더 세게 물었다. 겁에 질린 듯, 입술이 하얗게 뜨고 있다. 계속 해 외면하고 있던 감정에 다가서는 일이란, 생각보다 무척이나 더, 두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고마웠어. 나는 어쩌면 네게 구원받은 건지도 몰라."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질책을 던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의아한 낯빛으로 은찬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누나와 눈을 마주쳤다. 입에 발린 말을 해주는 걸까, 싶었는데 초승달에 가깝게 접혀있는 그 눈을 보자 의심은 거짓말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구나. 그렇구나."
누나는 묵묵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려가며 그녀는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평범했잖아. 평범하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누나의 얼굴에 평온함이 차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찬은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돌아가려고?"
"응. 연습을 덜 마치고 왔거든."
"그래."
잘 다녀와.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은찬은 주저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렇게 집을 나섰다. 너무도 피아노가 치고 싶었다. 그렇게 문뜩, 갑자기. 피아노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막상 마주하면 그 앞에서 또 다시 도망치진 않을까, 그런 주저함도 아주 약간 저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은찬은 거침없이 문을 열었고, 그 앞에 피아노가 있었다.
방 이곳저곳을 황망히 떠돌던 악보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우며, 종이의 구김살을 펴며 은찬은 다시 한 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멈칫했던 것도 아주 잠시, 은찬은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저를, 피아노를 달래었다.
놀랍게도 거짓말처럼 건반 위에 고여있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가락은 여유롭게 건반을, 악보를 매끄럽게 뛰어넘고 있었다. 은찬은 웃고 있었다. 피아노 역시 환희에 차올라 웃음소리를 내어주었다.
실로 명랑한 화해의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